정의사회

[밑줄] 김두식, 『헌법의 풍경』

두괴즐 2011. 6. 25. 10:39

[밑줄긋기] 김두식 『헌법의 풍경』

 

 

서장) 법학과의 불화

 

일반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법률가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고유한 특권을 누리는 출발점입니다. 법률가들은 일반인들이 모르는 언어로 가득 찬 법전 해석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언어가 쳐준 장벽 덕분에 보통 사람들의 진입이 차단됨으로써 법률가들의 기득권이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p.24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보통 소크라테스식 강의라고 불리는 미국 법과대학원 수업 방식은 이처럼 미리 정답을 설정하지 않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것이 변호사의 삶이라면, 이처럼 정답 대신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추도록 훈련하는 수업 방식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법원 판결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점수를 받을 수 없었던 사법연수원 시험이나, 교수님들의 가르침만을 성경 말씀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 법과대학의 수업 형태와 많이 다른 미국 로스쿨의 수업은 저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지요. p.33

 

우리나라 법 문화의 기형적인 특성 중 특별히 ‘시민과 법 사이의 철저한 괴리 현상’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법학자들은 법학자들대로 고고한 자신들만의 성(城)에서 혼잣말만 하며 살고, 법조인들은 법조인들대로 자기 특권 속에 안주하며 청지기의 소명을 저버리는 가운데,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은 길바닥에 버려져 뒹굴게 된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p.34

 

학문 언어와 일상 언어 사이의 괴리가 법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법학은 사회학, 정치학 등 다른 분야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합니다.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법조문과 법률 교과서들은 시민과 법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게 됩니다. p.35

 

변호사 사무실의 문턱이 너무 높습니다. 이런 현상은 민사 사건보다 형사 사건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형사 사건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약발’이 잘 듣는다는 이른바 ‘전관 출신’ 변호사를 선호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전관 출신 변호사들 중에는 석방을 조건으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아 챙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의자·피고인의 신병(구속 여부)과 관련하여 많은 수임료를 받는 폐해는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등을 쳐 먹는 야비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형사 사법을 왜곡시키는 주범이기도 합니다. 원래 형사 사건 변호사의 주된 임무는 형사 절차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거나, 피의자·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아내고 그들을 대신하여 법정에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형사 변호인들의 업무는 오히려 판검사들에게 읍소하여 관대한 처분을 받아내는 데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사건을 맡고 있는 판검사들과 담당 변호인의 ‘관계’가 수임 여부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는 곧 전관 출신 변호사들의 형사 사건 독점으로 귀결되었습니다. p.37-38

 

1장) 정답은 없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 없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은 그나마 가장 높은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 헌법은 곳곳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상대적 진리 찾기’의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고, 잠깐만 들여다보아도 헌법과 법률 속 대부분의 규정들이 공정한 절차 확보를 위해 마련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진리 찾기의 출발점은 ‘내 생각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상호 관용의 정신입니다. p.43

 

그렇게 법원의 입장이 불일치하거나 변화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자기가 서 있는 입장과 동일한 답을 법원이 제시하면 ‘그게 바로 상식’이라고 박수를 치지만, 상급심에서 그 결론이 깨어지게 되면 ‘정의가 무너졌다’고 분노하지요. 그러면서 ‘정답도 갖고 있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것이 어떻게 법원이고 법률가일 수 있냐’며 불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법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안에 있어서 법률가들은 정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법리(法理)라고 하는 수학공식 같은 기계가 있어서 거기에 집어넣으면 뚝딱 정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 판례로 축적되어 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의(正義)인 것도 아닙니다.(···)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이런 경우 의외로 논리보다는 직관에 의존하게 됩니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뿐만 아니라 일반 법원의 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법률가들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그 어떤 것’을 우리는 흔히 ‘리갈 마인드(Legal Mind)'라 부릅니다. 법학도들이 법률을 공부하면서 쌓는 수련도 이런 법적 직관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리갈 마인드와 잘 훈련된 법률가라는 개념이 그저 서로 빙빙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법률가들은 리갈 마인드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건 기록을 다 읽고 난 후 판사의 마음속에 샛별처럼 떠오르는 결론이 리갈 마인드이고, 바로 그것이 법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판사가 판결문을 쓰기 위해 인용하는 논리는 이미 판사의 머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스쳐간’ 논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훈련된 법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리갈 마인드라는 것도 결국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p.46-48

 

자연법과 함께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해줄 ‘사제’가 사라진 시대에는 정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화’ 또는 ‘절차’라고 하는 기준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누구도 정답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각자의 생각들을 가지고 공존의 장에 모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정답을 찾아 대화와 토론을 계속하다 보면 어떤 한 지점을 향해 의견들이 서서히 모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이런 대화의 장에서 법이 해야 하는 일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대화의 규칙 또는 절차를 보장해주는 것이며 이와 같은 절차의 핵심이 되는 것은 개방성과 민주성입니다. p.65-66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찾는 정의는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만들어 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답을 가진 사람들의 번쩍번쩍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포기하는 대신에 우리는 관용을 통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일한 해답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고통스러운 자기 한계 고백의 토양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나무입니다. p.72

 

“‘절대적 진실은 없다’며 절차주의적 진실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조차도 절대적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명제가 세상만사에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고 하는 절대적 진리의 존재, 헌법상 보장된 여러 기본권들의 절대적 가치를 믿습니다. 결국 제 생각은, 담론을 통해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이와 같은 궁극적 가치가 다른 사람의 사상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애매하고 모순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법 절차를 강조하는 저의 입장은, 첫째,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인정하고, 둘째,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임으로써, 셋째, 적법 절차 안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p.73-74

 

2장) 국가란 이름의 괴물

 

국가가 국민·영토·주권이라고 하는 형식적 요소로 구성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기원이 어떻게 되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국가라는 조직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정당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뭘 위해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국가 발생에 관해서는 가족설, 계약설, 실력설 등이 주장되고 국가의 본질에 관해서는 일원설, 이원설, 다원설 등 꽤나 그럴듯한 이론들이 넘쳐나지만 그 어느 것도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정확히 국가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우리가 거기에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만큼 황당한 논리도 없습니다.(···)

국가를 사랑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국가에 대한 ‘사랑 표현’을 강제할 수는 없으며, 국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국가를 ‘통제’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 나라보다는 국가를 통제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나라가 그나마 ‘덜 나쁜’ 나라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p.82-83

 

하나의 이념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의 이념과 배치되는 국가들의 범죄만을 주로 예시합니다. 좌파에서는 줄기차게 나치 독일과 제3세계 극우 독재자들의 범죄만을 이야기하고, 우파에서는 반대로 북한과 소련, 중국, 캄보디아 등의 범죄만을 이야기합니다. 한 쪽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국가 폭력과 범죄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좌우 어느 쪽에 의해서 주도되든지 간에 국가는 늘 괴물이 될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p.84

 

홀로코스트는 IBM뿐만 아니라 독일이라고 하는 국가 전체가 컴퓨터처럼 착착 손발을 맞춰 작동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법률가는 법률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군인은 군인대로, 철도원은 철도원대로,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컴퓨터처럼 잘 조직되어 운영된 나치 독일의 이야기는 국가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위험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개인의 범죄도, 어떤 깡패조직의 범죄도,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순간 만들어낼 수 있는 참극과는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전 국민을 한 장의 펀치 카드에 입력한 후 그들을 통제하고 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p.89-90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폐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만들어진 위원회의 조사결과는 충격적입니다. 대충 추산해보아도 피해자 숫자가 25,000~30,000명에 이르는 이 대학살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공비들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막강한 후원을 등에 업은 토벌대들이었습니다. 월남한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민보단 등 우익단체들은 살인과 고문, 강간, 방화 등으로 제주도를 공포의 섬으로 만들었고, 1948년 11월의 계엄령 선포 이후에는 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으로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습니다. 대표적인 주민 전체 400여 명이 국군 2연대에 의해 총살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군인들에게 총살 경험을 주기 위해 실시되었다.”라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북촌 사건’은 훗날 마을을 습격한 무장 공비들의 소행으로 책임이 전가됩니다. p.90-91

 

제주 4·3 사건도, 실미도 사건도 모두 국가 권력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법이 제대로만 작동했더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지요. 그리고 이런 사건들에는 늘 엉터리 재판이나 국가 권력의 무조건적 정당화를 통해 이를 묵인한 법률가들이 끼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p.99

 

국가의 범죄는 절대 권력을 지닌 소수 독재자들의 야욕과 그들에게 복종하는 다수 봉사자들의 협력에 의해 현실화됩니다. 몇 명의 정신 나간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런 거대한 범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독재 권력의 전횡에 참여하거나 방관할 때에만 비로소 국가라고 하는 괴물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p.99

 

우리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최고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저는 제가 왜 그 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면 제가 영원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생 낙오자가 되었을까요? 어쨌거나 그 당시에 제가 학교를 뛰쳐나오면 ‘인생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모두가 다 별 문제 없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 그 흐름을 벗어나는 것은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선생이나 성직자, 통치자 등 강력한 권위를 지닌 사람들에 저항하는 길일 때는 더욱 어렵습니다.

 

가공할 만한 국가의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괴물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사회 속에서 늘 칭찬 받으며, 윗사람 말에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른들 또는 권위자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왜?”라고 묻지 말고 그냥 “예!”라고 말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왕따당하지 않고 ‘원만하게’ 살아가는 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윗사람, 어른, 권력자, 권위를 가진 사람의 명령이나 가르침에 대해서, 그들의 말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정말 옳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진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자기 몸에 자꾸 손을 대는 성희롱 지도교수에게 앞뒤 볼 것 없이 “야, 이 씨방쉐이야!”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런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p.105-106

 

과거에는 총과 칼, 고문에 의한 철권통치가 독재를 상징했다면 이제는 얼마든지 정보에 의한 독재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꼭 협박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당신의 소비 패턴과 생활 리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핸드폰을 통한 위치 추적과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은 모든 시민들을 감시의 대상이자 감시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시대가 된 셈입니다.

 

이전 시대와 21세기 정보 독재시대의 차이가 있다면, 이런 통제 사회의 도래를 내다보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놀랄 만큼 빠른 기술의 발전은 이제 누구도 멈출 수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회 통제의 증대도 그렇습니다. 기술문명이 가져다 준 효율성과 편리함을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거기다가 새로 등장하는 테크놀로지 독재는 그 주체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주체의 불분명성은 국가 권력의 괴물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됩니다. 이를 막고자 하는 사람들도 도대체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p.110-111

 

3장) 법률가의 탄생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한 사람, 여기 잠들다.” p.124

 

군대에 다녀온 분이라면, 제가 지금가지 한 이야기를 듣고 아무리 군법무관들이라지만 설마 그럴 수가 있었겠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얼차려를 거부한다든지, 그게 적발되자 오히려 단식투쟁에 나섰다든지, 그래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모두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지시겠지요.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놀라울 정도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초반부터 누가 더 강자인지를 확실히 보여줬고 일단 관계가 정리된 후부터는 모든 것이 수월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법무관으로 임관했고, 이후 3년 동안 군검찰간, 군판사, 법무참모, 송무장교 등등 다양한 보직을 오가며 군대 내의 모든 사법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훈련받을 당시의 태도대로라면 군대에서 벌어지는 각종 불의에 맞서 결연히 압력에 맞선 양심선언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와야 했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군 내부의 비리를 캐내려면 우선 우리가 깨끗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출근을 대충 하거나 각종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누리는 대가로, 법무관 고유 업무를 상당 부분 포기하거나 방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근슬쩍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 특권의식은 결코 그 3년의 군복무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일반 시민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p.134-136

 

법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번 드렸습니다. 법이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라면, 법률가들은 바로 그 법이 올바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법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법이 우리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며 국가의 괴물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손발 역할을 하는 것이 법조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를 통제해야 할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이미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맡겨진 역할 수행을 포기한 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 법률가들은 결국 괴물의 수족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p.136

 

국가의 괴물화를 막아야 할 법률가들이 오히려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손발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제 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살고 있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더 나은 미래는 만들 수 없습니다. 역사 앞의 정직한 반성과 공개만이 고문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p.142-143

 

4장) 똥개 법률가의 시대

 

저는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 간 이 관계들을 ‘가족’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회창 캠프 내에서 불법이 자행될 경우, 그걸 가장 앞장서서 막아야 하는 사람은 법률가 서정우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내부 통제에 앞장서야 할 법률가들로 하여금 오히려 불법에 앞장서게 만드는 구조의 중심에는 바로 ‘가족으로서 법조계’라고 하는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p.157

 

권력의 통제 또는 국가 권력의 괴물화를 방지해야 할 사명을 지닌 법률가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의 뿌리’는 거의 독약에 가깝습니다. 단일한 뿌리는 내부 통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 우선 단일하고 폐쇄된 특권집단의 탄생을 막는 것으로 의미 있는 출발점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p.158-159

이런 상황에서 사법 개혁 방안으로 논의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미국식 로스쿨 도입을 통한 사법 교육의 개혁, 둘째는 법조 일원화를 통한 사법 구조의 개혁, 셋째는 배심 제도 등의 도입을 통한 시민 참여의 확대입니다. p.159

 

가장 경험이 적은 사람이 가장 높은 법대에 앉고, 그 다음으로 경험이 적은 사람이 국가 공권력을 대표하는 검사석에 앉고, 경험 많은 전직 판검사들이 변호사석에 앉아 있는 구조는 확실히 정상이 아닙니다. 이런 구조에서 새까만 후배 판사에게 끝없는 존경심이 우러나올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p.161

 

5장) 대한민국은 검찰 공화국

 

형사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사와 증거입니다. 그리고 수사와 증거를 통틀어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검사입니다. 특별히 수사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검사는 우리 형사소송법상 유일한 수사의 주재자이며, 기소편의주의, 기소독점주의에 따른 엄청난 권한을 지니고 있습니다. 엄청난 권한의 존재는 곧 엄청난 책임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불법적인 수사가 자행되고 있다면 그에 대한 최종 책임은 검사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p.177

 

유죄의 심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보류하는 판단은 최고의 권위를 지닌 법원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죄가 있는 것이 분명한 사람을 검찰 마음대로 풀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열어두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검찰은 살인자나 강간자도 처벌 없이 그냥 풀어줄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기소유예입니다. 설마 싶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p.181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헌법 정신

 

헌법을 이해하는 열쇠말은 ‘인정한다. 그러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헌법은 ‘그림의 떡’, 또는 ‘잘 포장된 한 장의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마음대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미 헌법이 아닌 것이지요. p.215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위해서, 그 근본을 흔들고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공산당을 불법화할 수밖에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주장은 일단 타당해 보이지만,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많이 성숙한 나라에서는 이런 논리가 실제로 적용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방어적 민주주의가 처음 구체화된 독일에서도, 1968년부터 공산당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고, 통일 이후에는 동독 공산당이 이름만 바꾼 채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탄탄한 민주주의의 기반이 형성된 이후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굳이 방어적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해산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논리가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걸핏하면 북한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원래는 공산주의자들처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p.230-231

 

7장) 말하지 않을 권리, 그 위대한 방패

 

그렇다면 기자들과 수사기관은 왜 이런 일에 상호 협력하는 것일까요?(···) 방송기자들은 언제나 ‘그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자들은 무조건 밀고 들어가서라도 시청자들의 구미에 맞는 화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지요.

 

수사기관은 자신들의 업적을 홍보할 기회에 목말라 있습니다. 보도는 크게 나올수록 좋습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형사반장으로 인터뷰라도 한 번 하면 다음 날 가족, 친지로부터 축하전화가 쏟아집니다.(···)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이 보도 덕분에 더 높은 분의 칭찬을 듣게 되었으니 해당 형사를 예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기자들이 취재에 경쟁적으로 협조하게 되고, 필요하다면 연출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자와 수시기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순간, 피의자의 인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p.241

 

방송과 수사기관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데에서 명백한 차별행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또는 미군 병사처럼 권력이 있거나 함부로 다루었다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방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사생활을 보호해주고, 그렇지 못한 피의자들에게는 ‘유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p.241-242

 

‘검찰청에 들어가면, 검사님께서 나가도 좋다고 허락하실 때까지는 함부로 검찰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그동안 우리나라 수사기관들은 수사를 거의 공짜로 해올 수 있었습니다. 수사기관들이 일반인의 이런 오해를 적절히 이용해온 셈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체포, 구속된 피의자를 제외하고는 검찰청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은 누구라도 아무 때나 제 발로 걸어 나올 권리가 있습니다. 이게 기본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에는 예외적인 강제수사가 되며, 예외적인 강제수사를 하려면 반드시 판사가 발부한 ‘영장’이라고 하는 ‘특별한 무기’가 ‘따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p.249

 

검사에 비해서 아무 무기도 지니지 못한 나약한 피의자·피고인이 그나마 존엄성을 지닌 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 절대적인 무기가 진술 거부권인 것입니다. p.260

 

인권이 제대로 보장된 나라의 수사기관이라면 처음부터 ‘피의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수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 피의자의 진술에만 의존하게 되고, 피의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다 보면 억지로라도 자백을 받아내게 되고,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고문 등의 강압행위가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진술 거부권이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우리 경찰, 검찰도 지금과 같은 무식한 수사 방법을 버리고 과학적인 수사 방법을 개발하게 되겠지요. 과학수사가 정착되기를 기다리다가 범인들을 다 놓치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걸 몰라서 선진국들이 이런 권리들을 인정해온 것이 아닙니다.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 침해로 한 명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는 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예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권리들을 보장해온 것입니다. p.266-267

 

법원이 진술 거부권을 행사한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 법원은 자백한 사람은 ‘충분히 반성한 사람’으로,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으로 단정하는 관행이 있습니다. 자백과 반성의 정도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선입견입니다. 순전히 관대한 처벌을 받겠다는 계산으로 자백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억울한 마음 때문에 끝까지 자백을 안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근거 없는 선입견의 바탕에는 ‘개전의 정’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백 유도를 통해서 보다 편하고 신속한 재판을 하겠다는 법원 편의주의적 발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p.275-276

 

8장) 잃어버린 헌법, 차별받지 않을 권리

 

서부 버지니아 시민권법의 내용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신입 사원을 뽑을 때 물어보는 내용의 거의 저반 이상은 미국에서 금지된 질문항목에 포함된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우리나라의 일부 대기업들은 채용지원서에 위의 금지된 항목 대부분을 포함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가족 친지 중 국회의원 등 유력인사’를 적는 칸까지 따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차별 현실입니다. p.294

 

가난한 이웃, 차별받는 이웃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젊은 변호사들이 있고, 일상 속의 차별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아무런 구제책을 찾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의 연결을 막는 벽은 다름 아닌 ‘돈’입니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국가가 하면 되는 것이지요.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