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사회

[밑줄]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강의 동영상 링크

두괴즐 2011. 6. 25. 10:29

[밑줄긋기]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1강 옳은 일 하기


정의와 관련한 오늘날의 주장은 거의 다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분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논의를 지배하는 사고는 행복과 자유다. 그러나 경제적 분배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다 보면, 어떤 사람이 도덕적 자격을 갖추었고 왜 그러한가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24쪽.(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탐욕 비판의 문제점은 금융 위기 때 구제금융으로 받은 포상과 경기가 좋을 때 시장에서 받은 포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탐욕은 악덕이고 나쁜 태도이며,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욕망이다. 그러니 탐욕을 포상하고픈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구제금융으로 상여금을 받은 사람들이 사업이 잘되어 더 많은 이익을 챙긴 몇 년 전보다 더 탐욕스러워졌다고 말할 근거가 있는가?

 월스트리트의 주식 거래인, 은행가,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들이다. 금융 소득을 챙기는 것이 이들의 밥벌이다. 직업이 이들의 인격에 영향을 미쳤다한들 도덕성이 주식시장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할 리는 없다. 따라서 엄청난 구제금융 상여금으로 탐욕을 포상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시장에서 후한 포상을 내리는 것도 잘못이 아닌가? 2008년에 (납세자의 지원으로 겨우 살아난 기업을 포함해) 월스트리트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160억 달러를 상여금으로 나눠 주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 액수는 2006년(340억 달러)과 2007년(330억 달러)에 지급된 상여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들이 지금 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유가 탐욕 때문이라면, 그 전에는 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단 말인가?

 한 가지 분명한 차이라면 구제금융 상여금은 납세자에게서 나왔고, 잘나가던 시절에 받은 상여금은 회사 수익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상여금이 부당하게 지급되었다는 확신에서 나왔다면, 상여금의 출처는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상여금이 납세자에게서 나오는 이유는 회사가 망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불만의 핵심이다. 미국인이 상여금과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탐욕을 포상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실패를 포상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인은 탐욕보다 실패에 엄격하다. 시장 중심 사회에서는 야심 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고, 이익 추구와 탐욕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의 경계는 분명하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포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아메리카드림의 핵심이다. 28-29쪽.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의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 이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다 보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재화 분배를 이행하는 세 가지 방식(···)[은] 행복, 자유, 미덕이다. 이 세 가지 이상은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한다. 33쪽.


 2005년 6월, 미 해군 특수부대 실(SEAL) 소속의 마커스 루트렐 하사와 수병 세 명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의 측근인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정보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이 찾는 인물은 140~150명의 중무장 세력을 지휘하면서 험한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특수부대 팀이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직후, 아프가니스탄 농부 두 명이 약 100마리의 염소를 몰고 나타났다. 일행에는 열네 살가량의 남자아이도 끼어 있었다. 모두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선택은 이들을 죽이든가 풀어주든가, 둘 중 하나였다.

 한 사람은 염소치기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상관의 지시로 적의 전선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속에 또다른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풀어주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 곧 후회할 결정이었다.

(···) 곧 이어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레반 무장 세력은 실 대원을 구출하려던 미군 헬리콥터 한 대까지 격추해, 그곳에 타고 있던 군인 열여섯 명을 모두 죽였다. 41-42쪽.


2강 최대 행복 원칙-공리주의


 우리는 이제까지 벤담의 ‘최대 행복’ 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에 많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73쪽.


이 쓴 글을 읽어보면 그가 개인의 권리와 공리주의 철학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밀의 저서『자유론』(···)의 요지는,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면서 개인을 보호하려 들거나 다수가 믿는 최선의 삶을 개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이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행동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라는 게 밀의 주장이다.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내 “독립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개인은 자신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주권을 갖는다.” 72-74쪽.


 그[밀]는 개인의 자유 옹호는 전적으로 공리주의 사고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내가 막연한 권리 덕에 남보다 유리한 입장에 선다고 판단된다면, 그런 이익은 공리와 무관한 것이어서 거부하겠노라고 말하겠다. 나는 공리가 궁극적으로 모든 윤리의 질문에 호소력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의 공리는 넓은 의미의 공리라야 하고, 진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이익을 줄 수 있는 공리라야 한다.”

밀은 우리가 공리를 극대화하되, 매 순간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인간의 행복이 극대화되리라고 주장한다. 다수가 반대 의견을 막거나 자유사상가를 검열할 수 있다면 오늘 당장 공리가 극대화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불행이 늘고 행복은 줄 것이다.

 반대 의견을 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 장기적으로 사회가 행복해진다고 믿은 이유는 무엇일까?(···) [1]반대 의견이 전부 또는 일부가 사실로 판명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대다수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 [2]사실이 아니더라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3]관습과 관례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답답하고 순종적인 체제로 전락해,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힘과 활기를 잃기 쉽다. 74-75쪽.


[밀은]두 가지 이유에서, 개인의 권리에 설득력 있는 도덕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첫째로, 사회 발전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다면, 권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볼모로 잡힌 꼴이다. 이를테면 전체적 수단을 동원해 장기적 행복을 얻으려는 사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사실상 꼭 필요치는 않다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둘째로, 권리를 공리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그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든 당사자에게는 부당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밀은 이 질문에도 대답한다. 그러나 이때는 공리주의적 도덕이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밀은 관습이나 관례 또는 다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능력을 한껏 발휘해 삶의 최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이다.(···)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75-76쪽.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급 능력을 신뢰하는 이 표현은 수긍이 간다. 그러나 밀은 이 말에 기대면서, 공리주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만다.욕구는 더 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이제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과 욕구와는 별개인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어떤 쾌락이 고급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더 좋아해서가 아니라 고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에서 그랬듯이 고급 쾌락에서도 밀은 공리주의가 모든 것을 단순히 쾌락과 고통으로 이분해 계산해버린다는 혐의를 벗기려 노력하지만, 되레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고 만다. 82쪽.


3강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자유지상주의


 미국의 상위 1퍼센트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3분의 1을 소유하는데, 이는 하위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그리고 상위 10퍼센트 가정이 미국 전체 소득의 42퍼센트, 전체 부의 71퍼센트를 소유한다.

(···) 어떤 사람은 이러한 불평등은 부당하며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강요나 사기가 없었다면, 그리고 시장경제에서 자유로운 선택으로 부를 얻었다면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연 누가 옳은가? 87-88쪽.


 로빈 후드 각본은 적어도 두 가지 반박에 직면할 수 있다. 하나는 공리주의 사고에서 나온 반박이고, 다른 하나는 공리주의와 무관한 반박이다. 첫 번째 반박은 높은 세율, 특히 소득에 부과되는 세율은 일과 투자에 대한 의욕을 꺾어 생산성 감소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 이익이 줄고 재분배 양도 줄어들면, 전체 공리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들은 빌 게이츠와 오프라 윈프리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기 전에, 그 때문에 이들이 일을 적게 하고 돈도 적게 벌어 결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할 액수가 줄어들지는 않을지 따져봐야 한다.

 두 번째 반박은 이러한 계산을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기본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 반박에 따르면, 게이츠와 윈프리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의 돈을 가져가는 행위는 명분이 무엇이든 강압 행위다. 이는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자유를 침해한다. 이러한 근거로 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흔히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고 부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경제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들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도 똑같이 존중한다면,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 88-89쪽.


4강 대리인 고용하기-시장과 도덕


자유시장 옹호는 전형적으로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한다. 하나는 자유에 관한 주장이고, 또 하나는 행복에 관한 주장이다. 첫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의 목소리다. 이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며, 자유시장에 간섭하는 법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다. 이들은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두 사람이 거래할 때 둘 다 이익을 얻는다고 말한다. 거래가 당사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전체 공리는 당연히 높아진다.

시장 회의론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이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겉보기처럼 늘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특정 재화나 사회적 행위는 돈으로 사고팔 경우 타락 하거나 질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111-112쪽.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랭글은 정책 입안자들의 자녀도 참전 부담을 나눠야 했다면 전쟁은 애초에 시작되지도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기회 불균등이 지속되는 한, 시장을 이용해 군 복무를 할당하는 것은 대안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계층간 차별이라는 불공평, 그리고 가난 때문에 대학 교육 등의 혜택을 받는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부과되는 강제다. 121쪽.


 2007년 7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에 주둔한 병력 가운데 미국이 비용을 지불하는 민간 기업체 소속 군인(18만 명)이 실제 미군(16만 명)보다 많았다.(···) 이라크에서 사망한 민간 도급 인력은 1200명이 넘는데, 이들은 사망해도 성조기가 덮인 관에 들어가지 못하며, 미군 사망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128쪽.


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이마누엘 칸트


 아미누엘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분명하고 영향력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그의 설명은 우리는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목숨과 자유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148쪽.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다. 149쪽.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

 칸트는 우리가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더러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뿐이다. 152쪽.


 우리는 자유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의 생각은 다르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은 우리 밖에 주어진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이때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내 행동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든, 사회적으로 훈련된 것이든,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154-155쪽


 칸트라면 타율적 결정이라 부를 예다. 즉 이것을 위해, 저것을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이와 정반대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저 밖에 주어진 목적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칸트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156-157쪽.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덕법 그 자체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157-158쪽.


 옳은 일을 하며 쾌락을 느낀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62쪽.


 칸트의 답은 이성이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하는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 감각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이성이 우리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다. 166쪽.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지만, 이때의 이성은 도구로서의 이성이다. 이들은 이성의 역할을 어떤 목적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생긴 욕구를 충족하여 공리를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다.

 칸트는 이성이 이런 부차적 역할을 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칸트는 도덕과 관련된 실천 이성을 도구로 여기지 않고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으로 여긴다. 166-167쪽.


 칸트는 이성이 의지에 명령하는 두 가지 방법을 구별한다. 하나는 잘 알려진 가언(假言)명령이다. 가언명령은 이성을 도구로 활용한다. ‘X를 원한다면 Y를 하라’는 식이다.(···) 칸트는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는 가언명령을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定言)명령과 대조한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정언 의무나 정언 권리는 특정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나 권리를 뜻한다.(···) 칸트는 오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7-168쪽.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법칙의 첫 번째 공식은 이렇다.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한다.” 칸트가 말하는 ‘행동준칙’은 내 행동에 근거가 되는 규칙이나 원칙을 뜻한다. 그의 말은 궁극적으로, 모순 없이 보편화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168-169쪽.


 정언명령의 도덕적 효력은 칸트의 두 번째 공식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한다는 공식이다. 칸트는 정언명령이 나타나는 두 번째 형태를 설명하면서, 그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법은 사람, 즉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에게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칸트의 답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다. 사람은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에는 존엄성이 있다. 칸트는 이 추론으로 정언명령의 두 번째 공식을 내놓는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인간은 목적이라는 공식이다 170-171쪽.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법을 생각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도덕법은 정언명령인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루어진다. 정언명령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본성과 환경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와 도덕의 까다로운 개념은 서로 연결된다.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똑같은 하나의 개념이다. 173-174쪽.


 의문2: 칸트는 의무에 답하는 것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똑같은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무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법칙을 지킨다는 뜻이다.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답: 의무와 자율은 특별한 경우, 즉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을 나 스스로 정했을 때만 양립한다.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엄성은 도덕법에 종속되는 데 있지 않고, 내가 “바로 그 법”을 정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 법에 종속되는 데” 있다. 우리는 정언명령에 따를 때 우리가 선택한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능력에 달렸다. 자신이 만든 법에 스스로 종속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의문3: 자율이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라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덕법을 선택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정언명령이 내 의지의 산물이라면, 사람마다 정언명령이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칸트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도덕법에 찬성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성적 사고가 다르니, 서로 다른 도덕법을 주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답: 도덕법을 정할 때, 우리는 당신이나 나 같은 특정한 사람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이라 부른 것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선택한다. 따라서 도덕법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생각은 오해다. 물론 우리가 특정한 이익, 욕구, 목적에 따라 판단한다면, 수많은 원칙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도덕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신중한 원칙일 뿐이다. 우리는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할 때만이 특정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난다. 이 말은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한다면 누구나 똑같은 결론에, 유일한 (그리고 보편적인) 정언명령에 이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유의자와 도덕법에 따른 의지는 똑같은 하나다.” 175-176쪽.


 자연 존재로서 나는 감각 세계에 속한다. 내 행동은 자연법칙으로, 원인과 결과라는 질서로 결정된다. 이는 인간 행동 중에서도 물리, 생물, 신경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나는 지적 세계에 산다. 여기서는 자연법칙과는 독립적으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칸트는 두 번째 관점, 즉 지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 세계의 여러 원인이 초래한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바로 자유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178-179쪽.


 우리가 이성적 존재만은 아니라는 점을 칸트도 인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지적 세계에서만 살지는 않는다. 우리가 순전히 이성적 존재여서, 자연의 법칙과 필요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변함없이 의지와 자율과 일치할 것이다.” 우리는 필요 영역과 자유 영역, 두 지점에 동시에 발을 딛고 있는 탓에, 우리가 하는 것과 해야하는 것 사이에,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과 존재해야 하는 방식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마련이다.(···) 도덕은 경험적이지 않다. 179쪽.


 자유지상주의의 자기소유 개념과는 정반대로, 칸트는 우리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보니, 우리 몸과 우리 자신을 다루는 방식이 제한된다. “인간은 자신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다.”(···) 따라서 칸트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181-182쪽.


6강 평등 옹호-존 롤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무지의 장막”), 그야말로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협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 롤스가 생각한 사회계약은 이처럼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언합의다.(···)

 롤스는 이 간언계약에서 정의의 원칙 두가지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언론이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이다. 이것은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198-199쪽.


 롤스는 능력 위주라는 개념이 도덕적으로 임의의 상황에서 나오는 특정한 이점을 되돌리기는 해도 정의를 실현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을 애써 똑같은 출발선에 세웠더라도 누가 그 경기에서 승자가 될지, 그러니까 가장 빠른 주자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른 주자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노력에만 좌우되지는 않는다. 풍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연이듯, 빠른 주자가 되는 것 역시 도덕적 우연이다.(···) “능력 위주 사회가 사회적 우연을 완전히 제거한다한들,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부와 소득의 분배가 결정되는 상황은 여전히 허용된다.” 215-216쪽.


롤스가 내놓은 대안은 차등원칙이라 부르는 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다.(···) 재능 있는 사람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218쪽.


 재능의 도덕적 임의성에 관한 롤스의 주장이 맞다면, 그 주장은 놀라운 결론에 이른다. 분배 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롤스는 성공에 이르는 사회적, 경제적 장벽만 제거된다면 누구나 재능이 선사하는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 위주 사회의 기본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것을 비판한다.(···)

 롤스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내가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재능을 가졌다해도, 그 재능이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째,(···)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 역시 도덕적으로 임의성을 띤다는 점이다. 나는 의문의 여지없이 나만의 재능을 가졌다고 외친들, 내 재능으로 얻는 포상 역시 수요와 공급이라는 우연에 좌우될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서 이러한 우연이 차지하는 부분을 쉽게 지나친다.223-227쪽.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231쪽.


8강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아리스토텔레스


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두 가지(···)

1.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 목적, 목표,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이해하는 관건은 그 둘의 무게와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262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정치의 목적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270-271쪽.


 도덕적 삶은 행복을 목표로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을 극대화하여 고통을 넘어서는 공리주의 행복이 아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대상을 구별할 줄 안다.(···) 도덕적 우수성은 쾌락과 고통을 모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구별하여 고상한 것에서 기쁨을 천박한 것에서 고통을 느끼는 데 있다. 행복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그런데 미덕으로 가득한 삶을 구현하려면 왜 폴리스에 살아야만 하는가?(···)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 수 있다.”275-276쪽.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키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법의 일차 목표다. 즉 좋은 인격 형성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입법자들은 시민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어 시민을 선량하게 만드는데, 이는 모든 입법자의 희망이며, 그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은 헌법과 나쁜 헌법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 교육은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습관을 기르고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277쪽.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규율이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그러한 생각은 도덕적 미덕의 두드러진 특징을 비켜간다.(···) 도덕 교육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행동과 관련된 문제나 우리에게 무엇이 이로운가의 문제는, 건강이 그렇듯 늘 변하게 마련이다.(···) 행위자 스스로 이 상황에는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그때그때 파악해야 한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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