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사회

[밑줄] 김규항,『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

두괴즐 2011. 6. 25. 10:17

[밑줄] 김규항,『B급 좌파 세 번째 이야기』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대단한 데가 있다. 거의 모든 한국인은 여전히 편한 자리에서 일본 사람을 ‘일본놈’이라 일컫는다.(···) 알다시피, 한국인들의 그런 반감은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그 참혹한 경험은 한국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가 아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들 역시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였으며 한국의 지배세력은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 했다.

 그런 진실을 뭉뚱그려 일본 민족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만든 건 해방 후 여전히 한국을 지배한 일제 부역세력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그들은 실제로는 일본 극우세력과 철저히 야합하면서도, 대중들에겐 일본인 전체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을 심어줌으로써 제 정통성 문제를 은폐해왔다. 결국 대개의 한국인들은 젊은이들의 음악이나 옷차림 따위에 나타나는 왜색에 대해선 나라가 망할 것처럼 개탄하면서도 종군 위안부 문제처럼 정작 자존과 위엄을 보여야 할 문제엔 별 무관심한, 희한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148~149쪽.


 교회가 잘못된 게 참 많은데 비판을 하자니 목회자나 교회에 순종하지 않는 게 신앙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다니는 곳이 교회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보세요. 십자가 단 건물에 강대상 놓고 예배 본다고 교회는 아니니까요. 만일 교회가 아니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어요.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쓰게 웃으며 한 말 기억하지요?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복음>24:2) 바로 우리에게 한 말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개 ‘윤리적 타락’이라는 면에서 해석되곤 한다. 교회가 개혁되면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교회 개혁운동의 열정을 진심으로 존중하지만 그 운동이 한국 교회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들은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모시는 하느님은 과연 예수가 말한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인가?

 성서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은 많이 다르다.(···) 구약의 하느님은 자기를 섬기는 놈은 어떤 악행을 해도 축복하고 자기를 거스르는 놈은 바로 살아도 저주하고 징벌하는, 권위적이며 포악한 마초 아버지 하느님이다. 바로 오늘 팔레스타인 인민을 죽이는 극우 시온주의자들의 하느님 말이다.

 예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예수의 하느님은 잘나고 힘세며 늘 승리하는 자식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못나고 약하고 늘 지기만 하는 자식 걱정에 잠을 못 이루며 그가 사람대접 받으며 살길 갈망하는 하느님, 엄마 하느님이다. 죄를 후손 삼대에까지 갚고 마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뉘우치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하느님,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느라 체면도 품위도 잃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고상한 말이나 쓰며 으스대는 놈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 야단치는 하느님이다.(···) 예수와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충돌은 결국 두 하느님의 충돌이었다. 새로운 하느님, 엄마 하느님은 인민에겐 후천 세상이 왔음을 알리는 복음이었지만 옛 하느님을 섬기며 온갖 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겐 끔직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야만 했다. 156~158쪽.


 지식인들은 대중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대중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이 비난받을 만한 상태에 있는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의 지성과 실천이 모자랐기 때문에 대중이 그 지경인데 그 경과에 대한 성찰은 없이 대중의 상태만 똑 떼어내어 비난하는 건 무책임하고 염치없는 일입니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국가주의에 대해, 애국주의에 대해, 파시즘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습니까? 바로 지식인들이 할 일입니다. 카페나 술집에 모여 앉아 ‘천박하고 어리석은’ 대중과 자신들을 구별 짓기나 하는 게, 앞장서 대중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을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 말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지식인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제 고장 난 지성에 대해 생각하기 바랍니다. 지성이 작동하려는 바로 그 순간, 지성이 작동을 멈추었던 순간을 되새겨보길 바랍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좀 더 겸손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냉소와 혐오가 아니라 애정과 연민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랍니다. 164~165쪽.


우리는 유약하고 관념적인 비폭력주의야말로 폭력의 가장 충실한 옹호자임을 잊어선 안 된다.(···) 비폭력주의가 유약한 지식인의 관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폭력의 현장성에 대해 알려주고 비폭력의 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제일 것입니다. 168~169쪽.


 저는 진보란 사회가 더 행복해지는 것이라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극소수의 지배계급과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회가 행복해진다는 것은 대다수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가지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라는 것은 ‘행복하자, 살잘사’는 것입니다.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믿고서 인생을 소모시키거나 더욱더 고단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행복하자, 더 잘살자는 것입니다. 올바르고 정의롭기 때문에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진짜 더 잘살고 더 행복해지자는 것입니다. 187~197쪽.


 계몽의 진정한 의미가 사회적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 즉 제가 사는 세상의 얼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우뚝 서는 것이라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계몽이 필요한 세상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그 구조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계몽은 분명히 필요하며, 문제는 ‘계몽의 방식’이다.

진정한 계몽은 80년대처럼 지식인이 민중을 대상화하여 지도하고 영도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인이 대중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조선 노동자가 배를 만들고 교원 노동자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부가 농사를 짓듯 지식인은 ‘지식 노동’을 하는 것이다. 지식 노동의 요체는 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구조와 본질을 인문학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혹은 문화·예술적으로 해명하여 사회에, 즉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221~222쪽.


프레임을 깨뜨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오늘 한국인들이 경제적 유능함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걸 개탄할 게 아니라 현실로 인정하되 그놈의 경제적 유능함이 계급으로 전혀 다르게 갈린다는 사실을 되새겨주는 것이다. 부자들에겐 홍정욱이 노회찬보다 경제적으로 유능한 게 사실이지만, 서민 대중에겐 노회찬이 홍정욱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문제는 역시 계급의식의 빈곤이다. 224~225쪽.


 행복이란 무엇인가?(···) 평생 물질로 살아온 여든 된 해녀 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이 수확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인류가 생긴 이래,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해왔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게 남보다 앞서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걸 오히려 불편해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눈에 밟혀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게 행복이라는 생각. 앞의 것은 한 줌의 지배계급에게, 뒤의 것은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생각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수천수만 년 동안 유지되어온 생각이 오늘 사라지고 있다. 239~240쪽.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먹고 남은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한다. 그 생각은 다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환원된다. 많은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야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울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연민에만 그칠 때 나눔은 사람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쇼에 머물게 된다.(···) 나눔은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불의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더해질 때 비로소 그 최소한의 꼴을 갖춘다.(···)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261-262쪽.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그토록 열중하는, 아이들의 미래에 그토록 노심초사하는 우리가 직업이 몇 개인지조차 모르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답은 1만 개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부모들이 제 아이에게 바라는 직업은 몇 개일까?「고래가 그랬어」에서 조사해본 바로는 많이 잡아 20개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 직업에 온전한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 부모는 내가 ○○가 되길 바랐지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쿠바의 청소부는 의사보다 월급이 많고 노르웨이의 버스 운전사는 대학교수보다 월급이 많다.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월급 따위로 직업의 귀천을 가르진 않지만, 청소부나 버스 운전사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여긴 쿠바나 노르웨이가 아니라 한국이라고? 그렇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부모들이 내 아이가 청소부나 버스 운전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한 한국의 현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할 일은 되든 안 되든 20개 직업만 생각하며 아이를 닦달하는 게 아니라, 9,980개의 직업까지 두러 살피며 아이가 제 적성과 재능에 가장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280~282쪽.


 지나치게 오랫동안 자유를 빼앗겼던 한국인들에게 자유는 언제나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얼굴을 드러낸다. 정치적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 즉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자유는 매우 나쁜 것이다. 우리는 굶어 죽은 자식을 안고 ‘불쌍한 아이의 고통을 멈추어주신’ 신에게 감사드리던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로운’ 노동자들을 기억한다.

한국 민주화는 대중에게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화는 자본에게도 자유를 주었다. 후자를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283쪽.


 녀석들의 다툼은 언제나 먹을 것이나 놀 것을 두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 하는 경쟁심에서 일어났다. 충분한가 모자란가는 오히려 본질이 아니었다. 286쪽.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 격차는 지나쳐선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이건희 씨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 년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격차로 인정할 수 없다. 292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로 살지 않으려면 적어도 ‘소비의 속성’은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자본은 무한정 증식하려는 본능을 가지며 그런 자본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구입하지 않거나 구입한 물건을 수명이 다하도록 사용하려는 ‘전통적인’ 태도는 매우 곤란한 것이다. 그런 태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본은 소비를 촉진하는 두 가지 공작을 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필요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광고), 계속 새로운 물건으로 바꾸게 만드는 것(유행).(···) 오늘의 광고의 목표는 어떤 상품의 쓰임새를 부풀려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문화’로 만드는 데 있다.(···) 그들은 소비를 통해 문화적 감동에 빠지며 소비하지 못할 때 문화적 결핍에 시달린다. 320쪽.


 인텔리들은 뭐가 옳은가를 해명하느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경향이 있다. 327쪽.


 예수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병자를 치유하는 이적을 일으키고도 단 한 번도 하느님이 고쳤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늘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고쳤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교회에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교분리라는 말이 생긴 건 교회가 지배 권력과 유착되었던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는 거꾸로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를 반대하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말을 사용하지요. 쿠데타 일으키고 양민을 도살한 군인을 위해 호텔에서 조찬 기도회를 열어주던 목사들이 정교분리를 외칩니다. 예수는 하느님이 종교 체제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활동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오히려 사회주의자보다 더 급진적이고 근본주의적이어야 합니다. 357쪽.


옛 파시즘은 리얼리즘을 탄압함으로써 우리가 리얼리즘과 만나는 것을 차단했지만 오늘 자본의 파시즘은 우리가 더 이상 리얼리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듦으로써 우리가 리얼리즘과 만나는 것을 차단한다. 379쪽.


 한국의 교회는 ‘기복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그들의 기도는 늘 하느님께 복을 달라는 것이며,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많은 응답을 받은 걸로 선전된다.(···) 교회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인데 그건 실은 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많아질수록 영적으로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하느님이 그걸 준다면 그건 복이 아니라 저주를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진짜 복을 주신다. 하느님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부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명예를 얻고 싶어 잠을 못 이루는 사람에게 겸손이야말로 가장 큰 명예임을 알게 하신다. 하느님은 권력을 얻고자 눈이 빨개진 사람에게 섬기는 삶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임을 알게 하신다. 380~381쪽.


 국익이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모순이 있는데 어떻게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이익’이 있을 수 있는가.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의 거짓 표현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무엇보다 인민들의 계급의식이 얼마나 늘어나는가에 달려있다. 381쪽.


곽선희니 조용기니 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건 단지 그들이 성직자치곤 지나치게 비싼 집과 비싼 차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비싼 집과 비싼 차를 갖는 것이 좋은 삶이자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세상에 퍼트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싸우는 사탄이다. 436쪽.


 내가 목사를 사탄이라고 말한 데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손 모아 인사하며,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인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쳤던 일을 함께 묵상할 것을 권한다.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제자들이 기대하는 대로 영광의 메시아의 길이 아닌 수난의 길을 갈 것임을 밝히자 베드로는 ‘그러시면 안 된다’ 반발한다. 그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소리친다. 베드로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 하나 믿고 식구들 팽개치고 고향 떠나 풍찬노숙해온 사람에게 영광의 메시아의 길이 아니라 수난의 길을 갈 거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설사 베드로가 잘못된 말을 했다 해도 그렇다고 ‘사탄’이라고 욕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라는 인격을 정죄하며 욕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예수는 베드로라는 인격이 아니라 그에 거해, 그를 통해 작동하는 사탄의 기운에 분노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된다’는 예수의 말은 바로 그런 구분을 뜻한다.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사람을 정죄할 순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물론 나 자신을 포함한)에 거해, 어떤 사람을 통해 작동하는 사탄의 기운은 분명히 적시하고 싸워야 한다.(···) 교회 다니면 물질 축복을 받는다. 물질은 하느님의 축복이다는 따위의 말은 분명히 하느님의 나라를 훼방하고 대적하는 사탄의 말이다. 우리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퍼트리는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 외쳐야 한다. 437~438쪽. 


우스운 건,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말하면서 ‘계급’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양극화라는 말은 계급적 격차가 커진다는 뜻이다. 456쪽.


 계급으로 포획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지요. 내가 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좋은 세상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세상이란 뭘까요? 나는 좋은 세상이란 인간의 좋은 본성, 즉 진정한 것을 좇고 다른 사람과 상호부조하며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잘 발현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급적 착취가 횡행하는 세상은 인간의 나쁜 속성이 훨씬 더 잘 발현되게 되어 있지요. 이기심과 탐욕, 경쟁, 물신숭배 같은 것들 말입니다.(···) 계급 문제는 그것을 목표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숙제일 뿐 아니라 계급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숙제입니다. 476쪽.


이상한 건 한국의 부모들은 ‘공부도 적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 여기에서 공부는 물론 국·수·사·과니 영어니 하는 학과 공부를 말합니다. “우리 애는 운동은 영 소질이 없어”라는 말은 해도 “공부는 영 소질이 없어”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죠. 그래서 다들 하는 말이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요”입니다. 아이가 공부에 소질이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공부가 아닌 다른 데 소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에 소질이 없다고 해서 2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2류 인생을 만드는 건 바로 부모님들입니다.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를 억지로 족쳐서 이도 저도 아닌 스무 살짜리를 만들어놓고야 마는 우리 말입니다. 491~492쪽.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어로서 ‘88만원세대’라는 개념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오늘 20대는 모두 88만원세대인가? 그렇진 않다. 그 중엔 소수의 ‘88억세대’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한다. 대다수의 20대가 88만원세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소수의 88억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혹은,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텔리들이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려는 경향과는 아랑곳없이 계급적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5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