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사회

[밑줄] 전대원, 『나의 권리를 말한다』

두괴즐 2011. 6. 25. 10:41

[밑줄긋기] 전대원, 『나의 권리를 말한다』

 

 

5장 건강권 앞에서 모두 눈 깔아! (건강권)

 

p. 80

그러나 건강보험의 성격을 제대로 안다면 절대로 불만을 제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건강보험은 민간보험사에서 운영하는 생명보험이나 화재보험 등과는 다른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영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방만한 운영으로 보험금이 효율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민간보험사보다 보험료나 혜택 면에서 월등합니다. 만일 이를 시장에 맡기면 우리는 미국과 같이 엄청난 금액의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고, 이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앞서 나온 영화 속 인물처럼 스스로 다친 자리를 꿰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 국민 건강보험’ 시스템을 붕괴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의료 시장을 개방하라는 미국이 외부의 힘이라면, 자유롭게 영리를 추구하려는 내부 이익집단의 압력도 있습니다. 여기서 의료 소비자인 국민에게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올바른 제도가 무엇인지 판단할 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지탱해온 건강보험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7장 광고야, 집을 욕되게 하지 마 (주거권)

 

p. 110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사는 곳이 사람을 말해 준다는 발상은 천박한 상업주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일 것입니다. 이 광고 카피를 들으면서 제 입에서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최소한의 부끄러움마저 잊어버렸구나”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안 그래도 아파트는 투기의 대명사로 한국인을 모두 투기꾼으로 몰아가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데, 아파트 광고가 한 술 더 떠서 인간 정체성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11장 참을 수 없는 소비자의 유약함 (소비자 권리)

 

p. 170

소비자가 약자인 이유는 정보력의 차이에서 옵니다. 소비자가 아무리 영악하다 해도 구매하고자 하는 상품에 대하여 생산자나 판매자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판매자보다 권력 게임에서 우위에 서려고 해도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는 늘 지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p. 174

“수업 시간에 들을 때는 알겠는데, 막상 시험을 보면 문제가 잘 풀리지 않지? 가만히 보니 공부하는 습관이 배어 있지 않구나? 의지력이 부족한 편이구나.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 이 학생은 누구잡아 주는 사람만 있어도 성적이 오를 것 같습니다.”

여기에 학생이 몇 번 맞장구를 쳐 주기 시작하면 학부모의 얼굴에는 드디어 희망을 찾았다는 표정이 나타납니다. 어느 순간 점쟁이 말에 넘어가듯 학원 강사의 상담에 쏙 넘어가서 학원 문을 나설 때가 되면 “선생님만 믿습니다”라는 말이 어머니 입에서 절로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학원 강사도 부응을 합니다. “저와 학원을 믿고 6개월만 맡겨 주십시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6개월 후에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고 항의를 하는 학부모도 없지만, 항의를 한다 해도 강사가 할 말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너무 노력을 안 한다고 책임전가를 하면 됩니다. 학생을 앞에 두고 “네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학원 강사가 애초에 양립이 불가능한 사실을 전제에 두고 자신의 논리를 펼치는 모순적인 어법을 구사하지만, 대부분의 학부모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13장 작정하고 쓴 종교 이야기 (종교의 자유와 한국의 기독교)

 

p. 205

교회의 가장 큰 잘못은 미국의 영향하에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낮은 자의 자리를 떠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종교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와 돈 많은 자들을 위해 존재하게 되면 그 의의가 사라지는 것인데, 기독교는 여기에 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p. 213

아내와 저는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혜로운 아이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작은 기도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들이 진정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이고, 봉사하는 삶이며, 내 것을 내어 주는 삶인데, 과연 자식이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냥 좋은 직장 잡아서 아들딸 낳고 잘살기를 바라는 이기적 생각이 더 강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해달라는 기도 역시 나 스스로 예수님에게 씌운 금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돈 잘 벌고 직장 잘 다니는 모습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저의 이런 고민은 이기적이고 죄에 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고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라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