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김규항,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알마, 2010.
2장 문화로 우리 사회 엿보기
p. 49-50
진지하다는 건 한마디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건데요. 한국의 인터넷 소통엔 경청이라는 걸 찾아보기 어려워요. 결국 엄청나게 많이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소통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가장 큰 문제는 소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소통으로는 절대 문제의 본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명박 정권을 욕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할 수는 있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지배 체제의 전모를 파악한다든가, 노무현 정권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는 이명박 정권과 큰 차이가 있었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하는 데에는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소통이 상당히 반동적이라고 봐요.(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 분명 인터넷에서의 소통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의 수평적 정보이동의 가능성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인터넷 소통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장을 만들어 가야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 54-55
자유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어떤 속박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또 하나는 어떤 사회적 돌봄도 없는 것, 우리의 문제는 후자죠.(···) 자유로운 경쟁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 같지만 실은 이미 가진 격차를 공식화하고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악한 수단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 독재에서 자유로워졌어요. 민주적인 선거도 하고, 대통령 욕도 하고, 언론의 자유도 상당한 수준이고, 어딜 가든 뭘 하든 전처럼 구속받는 일은 적어졌죠. 그러나 자유를 얻은 건 우리만이 아닙니다. 자본도 무한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어요. 민주화의 기쁨에 취한 채 군사독재에서 벗어났는데, 이제는 자본의 독재에서 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계발을 하고 경쟁에 몰두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양극화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건 다 부산물들이고요.(···) 자유를 얻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싸웠는데 이젠 그 자유에 의해서 목이 졸리는 세상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자의 자유에만 집착하고 있죠.
* 중요한 성찰이라고 생각된다. ‘자유’라는 것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무조건적 긍정을 하는 것 같다. “어떤 사회적 돌봄도 없는 것”으로서의 자유, 즉 자본의 자유에 대한 통찰이 시급하다.
p. 59-60
좌파라는 사람들조차도 계급 이야기를 하면 세상을 보는 낡은 방식인 것처럼 반응하기도 해요. 계급이라는 건 방식이나 관점이 아니라 그냥 사실입니다.(···) 다들 양극화가 문제라고 하잖아요. 양극화라는 게 뭡니까? 계급적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진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양극화라고 말하면 수긍하면서 계급이라고 말하면 알레르기를 보이죠. 물론 이건 이데올로기 공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엔 계급이라고 하면 잡아 죽이면 되었는데 이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어서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니 계급이라는 말을 쓸모없는 말, 사실과는 무관한 어떤 편협한 말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리고 옛날처럼 국가주의나 애국심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동의 변화’나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사라진다’와 같은 요상한 소리들로 계급을 말하지 못하게 하죠.(···) 노동의 변화도 디지털 시대도 맞아요. 하지만 여전히 계급은 존재합니다. 오히려 그 격차와 모순이 더 벌어지고 있죠. 계급은 그냥 현실입니다. 더 이상 계급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현실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 내가 참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점이다. 나 역시 ‘계급’을 낡은 것으로만 치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낡음의 취급이 전혀 정당한 사유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냥 왠지 요즘엔’이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취급해버렸던 것이다. ‘계급’에 대한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진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p. 67
그(김규항)는 요즘 예술가들은 상상력이 없어졌다고 개탄한다. 원래 사회라는 것은 시인이나 예술가가 시대의 전위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비평가나 지식인들이 그것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다음, 정치가나 관료 그리고 지배층들이 거기에 대한 답을 내놓으면서 변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 요즘 예술가들이 정녕 상상력이 없어졌는지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다. 사실 전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예술가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대를 하고 싶고, 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젠 문화향유자로서의 대중에도 주목하고 싶다. 예술에 대한 대중들 스스로의 전유 가능성을 무리하게도 기대해보고 싶다.
p. 72
1980년대에 예술이 사회변혁 운동에 복무해야 된다는 강박이 지나쳤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이 지나치게 없어서 문제죠. 예술이 더 세련되고, 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게 되었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사실은 예술이 상업화된 거죠. 사회변혁 운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본의 굴레에 갇힌 예술이 되어버렸습니다.
*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박민규 작가의 행보에 기대를 거는 나 자신을 본다.
p. 74-75
한국 영화계는 감독과 주연배우를 빼면 엄청나게 열악한 노동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대중에게 스크린쿼터를 호소하기 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후에 대중들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얻었다면 당연히 그런 문제를 스스로 공론화하고 해결해야 하는 거죠. 그렇지 못하면서 때만 되면 나타나서 눈물 흘리며 정의를 호소하고 있잖아요.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의 관계가 한국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관계와 비슷하다면 한국 영화계엔 독립영화 스크린쿼터가 필요하겠죠. 또한 스크린쿼터로 얻었거나 지켜낸 경제적 이득이 있다면 영화 자본가의 배만 불려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 너무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정말이지, 독립영화 스크린쿼터가 필요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파상공세에서 한국 영화를 보호하고자 하는 스크린쿼터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 자본의 논리가 아닌 보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독립영화 스크린쿼터가 있어야한다. 그래야지 상업영화의 파상공세로 부터 짓밟히지 않는 보다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p. 94-95
유치원 아이들도 섹시, 섹시 하더군요.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늘 흐트러지고, 늘 쾌락적이면 문제가 있잖아요. 갈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게 와르르 무너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분명한 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다 용서된다는 겁니다. 대박이 났다, 이러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모두 존경을 받는 겁니다. 기존의 어떤 가치나 관념도 송두리째 버려질 만큼 강렬한 존경이죠.
* 만몬신(물질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더욱 안타까워지는 것은 맘몬신에 대한 지독한 경계를 요청했던 예수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한국교회가 역시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기어코 2100억 짜리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진정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다면 그 2100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것 아닌가?
p. 99
요즘 한국의 아이들은 입시 경쟁으로 인해 사람처럼 산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겠죠. 위로와 치유가 필요해요. 그걸 음악산업 쪽의 자본가들이 잘 이용하고 있는 거죠. 청소년들은 스트레스를 대중음악으로 풀고, 음악 자본가들은 돈을 벌고, 체제는 청소년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빠들 지키는 데로 가니까 좋은 거고, 그런 거잖아요.
* 그래서 ‘교실이데아’의 서태지, ‘시대유감’의 서태지가 그렇게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예술에 진취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그리고 요구되어야만 하는 시점이다.
3장 김규항과 <그 페미니즘>
p. 119-120
저는 책하고 이론 속에서만 사는 사람들을 가장 한심하다고 봅니다.(···) 반대로 체험이 갖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체험은 대단히 강한 확신을 갖게 만드는데 그게 합리성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식인이 책에서만 사유하면 제대로 된 균형을 잡기 어렵고 삶의 체험이 참 중요하지만, 그 체험을 객관화하고 사회화하는 힘이 없다면 그 또한 위험합니다. 요즘 일류대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하지 않고 보수화되었다고 하는데요. 옛날에 일류대학교 학생들이 왜 학생운동을 많이 했냐면,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죠. 지금처럼 부잣집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어요. 없는 살림에 공부 잘하니까 출세해서 고생하는 부모님 호강시켜드리겠다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런데 새로운 공부를 해보니까 내 부모가 그리 고생하는 게 무지하게 억울하단 말이죠. 내 부모만 억울한 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수많은 부모와 가족들이 억울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 가족을 위해 출세해야겠다고 생각하던 학생이 오히려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에 뛰어드는 거죠. 그것은 20여 년 동안의 체험이 지적으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성의 힘이란 그런 거라고 봐요.
* 나의 공부란 나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위한 것이라고 끊임없이 상기한다. 나의 공부는 지성의 힘을 구현하는 것이지 독자적인 앎을 통한 저작권 획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항상 배움에 대해 공유하려는 것이고, 실천적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4장 한국 사회의 진보를 묻는다
p. 156-157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게 뭡니까? 24시간 내내 이기심과 경쟁심과 소비욕구를 주입받는 세상이잖아요. 이런 세상에선 아무리 사회과학 책을 읽고 인문 교양을 쌓아도 바른 가치를 지켜내기가 힘든 일입니다. 글이나 토론 같은 공적인 행동에선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아이 교육 문제 같은 구체적인 일상에선 ‘그래도 현실이···’ 이런 말이 절로 나옵니다. 워낙에 탐욕스러운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거죠.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국에선 보수 개신교가 참 소중한 것들을 많이 버려놨어요. 기도를 그저 신에게 뭘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도 그중 하나인데요. 기도는 오히려 그런 욕망을 덜어내고 비움으로써 내 안의 신성을 드러내는, 참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 김규항은 기독교 신자다. 그래서 그는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나 역시 기독교 신자이므로 예수의 가르침 아래에 모두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기도’라는 것은 특정한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영성이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의지 없이는 신자유주의의 폭격아래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새로움을 창출해 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저 버티기에 급급한 것이 되고 만다.
p. 162-163
‘88만 원 세대’라는 말은 오늘의 청년들을 각성시킬 수는 있지만 상당한 혼란도 가져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세대’가 아니라 ‘계급’이라는 걸 명백히 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이십 대가 모두 88만 원 세대인가요? 아니잖아요. 지금 이십 대엔 극소수의 88억 원 세대도 있어요. 윗세대와는 달리 별다른 노력 없이 물려받은 수십 수백억의 재산을 가진 이십 대들 말입니다. 극소수의 88억 원 세대와 대다수의 88만원 세대가 존재하는 거죠. 바꿔 말하면 극소수의 88억 원 세대가 존재하기 위해 대다수의 88만 원 세대가 존재하는, 더 극명하게 계급화된 세대인 거죠.
* 나 역시 사회에서 가장 착취 받는 취약 세대라는 관점에서만 ‘88만원 세대’에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세대’로만 환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대론적인 접근과 더불어 ‘계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p. 163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한 건 그게 사회주의라서가 아니라 전제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제정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혹은 다른 무슨 주의든 상관없이 망하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들과 자본 진영에선 당연히 그걸 ‘사회주의의 패망’이라고 대중들에게 주장하고 선전해왔다. 그런데 현실사회주의가 세계에 해악만 끼친 건 아니다. 만일 왼쪽으로 당기는 현실사회주의라는 거대한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 나라들엔 복지라는 게 애당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른바 ‘사민주의’라는 자본주의에 이식된 사회주의 시스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 나로서는 순수한 차원에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구현을 상상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항상 나의 정치적 입장을 사민주의에 두고 있다. 물론 그나마 구체적인 상상을 해본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이행하는 공동체로서의 사회주의는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유토피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상 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이러한 예수의 혁명적 사상을 보수화 시키는 과정이었고, 물질적 소유의 정당화를 위해 예수의 가르침을 신비화해왔다. 역사상 유래가 없이 막강한 권력을 맘몬신이 소유하고 있는 오늘날, 과연 예수의 순수한 가르침이 이 땅에 구현될 수 있을까? 예수가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오면 또 모를 일이다만.
p. 167-168
북유럽식 사민주의 이야기를 많이들 하죠. 진중권, 홍세화 같은 분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이야기도 많이 했잖아요. 그분들은 실제로 가서 생활해보니까 이런 사회만 되어도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셨을 테고, 나 역시 가서 살아보진 못했지만 한국이 독일이나 프랑스만큼만 되어도 좋겠다고 당연히 생각하죠. 그런데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사민주의라는 게 사민주의 운동만으로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잖아요.(···) 사민주의는 그보다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강력한 투쟁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운동의 대립과 절충으로 사민주의가 이루어진 거란 말이죠. 만일 그 사회에서 사민주의의 왼쪽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다시 말해 사민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좌파운동이었다면 오늘날의 사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겠죠. 한국에서 사민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사회주의자들이 훨씬 더 세력을 얻어야 합니다.
*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역시나 분단현실,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북한과 동일시되는)가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p. 169-170
좌파적 태도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아닙니다. 국가 전체가 아니라 그 국가의 서민 대중을 기반으로 먼저 생각하는 거잖아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진보 정치인이라면 대한민국 그 자체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대한민국의 서민 대중을 기반으로 생각했어야 하는데요. 두 분은 먼저 국가 단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특정한 계급에 편중되지 않고 전체의 이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공평무사해 보이지만, 실은 대한민국 지배계급의 이익을 기반하는 거죠. 신자유주의가 서민 대중들에게 고통을 줄 순 있지만, 대한민국 전체로 보면 거기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실은 대한민국 지배계급의 이해를 위해선 서민 대중이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기도 해요. 두 분이 그런 악의를 마음속에 품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다만 진보적인 사고의 틀을 가진 분들은 아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요.
* 그래서 철학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 아무리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규정된 철학적 한계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5장 ‘촛불’과 ‘추모’ 앞에서
p. 199
이렇게 얘기하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지식인이 대중을 계몽하느냐?’고 말해요. 지식인이 대중보다 높은 위치에서 지도하고 계몽해야 한다는 게 아니잖아요. 수평적인 의미에서 역할 분담을 말하는 거죠. 하루종일 다른 노동에 시달리고, 쉴 틈도 없는 사람들이 알아서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세상이 아니니까요. 책도 보고, 사회에 대해서 관찰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글도 쓰는 사람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게 당연하죠.(···) 프랑스나 독일에서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배우는 사회 지식을 한국에선 대학생들이, 그것도 대학이 아니라 자기가 책을 사고 강연을 들어야 배운다는 걸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궁금해요.
* 나도 이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는 시건방지게 가르치려 들고 있는 것일까? 계몽을 강제하려는 것인가?’하고 말이다. 이에 대해 김규항의 “수평적인 의미에서 역할 분담”이라는 것이 정말 맞는 말 같다. “대중지성의 시대”란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장 예수에게 묻는 이 시대의 진보
p. 209
예수에서 출발해서 마르크스로 보완했다고 할 수 있어요.(···) 내 밖의 문제와 내 안의 문제를 동시에 이야기한다든가, 영성 같은 주제를 말하는 것도 그렇고요.
* 나도 김규항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나의 좌파적 태도가 마크르스로 보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발은 분명 ‘예수’였다. 나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 신자이고 그렇기에 그의 가르침을 그저 따르는 것뿐이다. 물론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항상 마음만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다.
p. 220-221
“할머니,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훨씬 편하시잖아요?” “그럼 편하지. 혼자서 100명 몫은 하지.” “그런데 왜 안 쓰세요? 힘드신데.” 그러니까 할머니가 대답하실 “내가 그걸 쓰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그 할머니가 무슨 제주도 좌파해녀연합 의장임이거나 4·3항쟁 때 한라산에 숨었다가 몇 십 년 만에 나타난 사회주의자 해녀가 아니에요. 그냥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처럼 당신 노동으로 새끼들 건사하고 공부도 시키고 그렇게 살아온 평범한 분입니다.(···) 인류가 그나마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역사를 이어온 건 그런 보통사람들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보통사람들, 즉 서민 대중이라고 불리는 민중이라고 불리는, 인민이라고 불리는 보통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거의 잃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특히 지난 10년에서 20년 사이에,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진행된 기간에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어요.
*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김규항은 영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개선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 개개인들의 의식,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숭고한 대상’이 되어 물신이 된 것이 명백해 보인다.
p. 225
바리사이들은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개혁적인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 개혁에 하층 인민들의 삶은 배제되어 있었죠. 인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로마 제국주의에 수탈당하나 해방된 조국의 지배계급에 수탈당하나 다를 게 없잖아요. 그런 기만적인 사회개혁 노선에도 불구하고 인민들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어요. 김대중과 노무현, 박원순이 존경받듯이. 예수라는 사람은 전체 이스라엘 따위엔 관심이 없었어요. 예수는 매우 편향된 사람입니다. 오로지 지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죠.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선포했고요. 그런 예수 입장에서는 바라사이야말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사회 비판의 대상이 그 사회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아요. 가장 나쁜 놈들은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악영향을 끼치기 어려워요.
* 단일화에 매번 희생되는 진보정당의 운명도 어쩌면 이런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 같다.
p. 226-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얘기는 엄청나게 계급적인 얘기 아닙니까? 못 들어간다는 거잖아요.(지) “착한 부자”라는 개념을 아예 부인하는 말이죠.(···)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거예요.(···) 부자 하나가 존재하려면 수많은 가난한 사람이 존재해야 합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지식이고 형제자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부자는 어떤 부자든 간에 그 자체로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하는 거죠.(···) 부자 청년에 관한 에피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큰 걸림돌입니다. 교회 다니면 물질적으로 축복받는다고 떠들고 있는데, 예수가 그 자리에서 부인하는 꼴이니까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부자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정당한 분배가 가능한 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입니다. 예수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체제를 따질 것도 없이,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내가 부자라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겁니다.(···)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한 가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자발적 가난만이 정당하다고 예수는 말하는 겁니다.(···) 자발적 가난은 사람이 사이좋게 살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평화라는 게 폭력성 때문에 깨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실은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깨지는 거죠.(···) 적게 가지려 할 때 모두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 어쩌면 한국교회에 위협이 더 되는 인물은 ‘리처드 도킨스’보다 김규향일지도 모른다. 도킨스는 “신 따위는 없어 바보야.”라고 하지만 이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도킨스는 악마에 불구하다. 하지만 김규항 같이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이 정말 그런 거였을까? 우리 다시 한 번 성경을 꼼꼼히 보자.”라고 한다면 신자들 중 다시 성경을 보려는 사람이 생길 것이고, 이러한 것이 실질적으로는 한국교회에 더 위협이 될 것이다.
p.234
‘한 줌의 지배계급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에 대한 혁명은 ‘한 줌의 지배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제아무리 이상적인 분배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해도 ‘남보다 잘 먹고 잘사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가치관’이 살아 있다면, 그 사회는 여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남은 셈이다.
* 예수님이, 영성이 실제 현실 사회에서 더욱 유효하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 234-235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비폭력주의자,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 하느님의 아들 등등. 그런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선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지배 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로마제국이나 성전 귀족들만 죽이고 싶어 했던 게 아니라 인민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사이들을이 더 죽이고 싶어 했어요. 바리사이들도 종종 로마제국이나 성전 귀족들과 갈등을 벌이거나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는데요. 그건 엄격하게 말해서 지배 체제 안에서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신 아래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르침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p. 237
예수는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오로지 신의 일을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죠.
p. 245
오늘의 주류 기독교는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예수를 신으로 결정하면서 그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회의는 콘스탄티누스가 자기의 정치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 일종의 쇼였어요. 기독교는 예수를 이용해서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어요.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원죄를 말하고 있는데요. 기독교야말로 원죄를 가지고 있죠.
p. 247
십자군전쟁이라는 것도 그렇고, 부시의 침략 전쟁도 그렇고, 다 그렇죠. 자기가 갖고 있는 기득권과 물질적 부를 지키고 세를 더 불리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빙자하는 겁니다. 그리고 대개의 신도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신앙 논쟁의 형태였지만 순수한 이해관계 싸움이었죠.
7장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 교육
p. 263-264
경쟁 체제에 승복한 채 벌이는 악다구니로는 절대 안 된다고 봅니다. 악다구니는 한계가 있잖아요. 강남 애들은 경쟁에서 유리하다, 우리는 불리하다. 사교육을 방치하면 출발점의 차이가 더 커진다. 대학을 평준화해야 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똑같은 욕망을 전제로 하는 싸움이라면, 몫을 두고 벌이는 다툼이라면 나는 그 싸움에서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이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쟁을 공정하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죠.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비로소 해결이 시작되는 겁니다. 경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요? 사랑, 존경, 우정? 그런 게 아니잖아요. 돈과 물질인데 그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야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p. 269
좋은 교육이, 뭔가에 대한 가치 기준이 자본의 가치 기준에 통합되어버려서 다들 전교조 교사를 경멸하고 적대하는 거죠. 교사를 평가하는 가치 기준이 이젠 ‘교육’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성적을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거니까요. 그게 아닌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는 전교조 교사들은 그들에겐 경멸의 대상인 거죠.
p. 275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어른들 취향에 맞추어야 해요. 그들이 구매자들이니까요.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에게 좋은 책’이라고 여겨지게 만드는 게 비결이죠. 그런 책들을 아이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 하지만 김규항은 타협하지 않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잡지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적어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권하는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고래가 그랬어>이다. 정말 그런지 사촌동생에게 선물로 주고 냉정한 평가를 받아봐야겠다.
p. 276
금지는 단지 어른들을 위한 위안일 뿐 아이들은 결국 자기 삶에 필요한 걸 숨어서라도 하게 되죠.(···) 존중을 기반으로 한 대화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포기하면 어른은 열심히 금지하고 아이는 그런 어른을 속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소중한 내 아이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겁니다.
p. 277
부모들은 이미 스무 살 이전의 인생을 지나버린 지 한참이라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계집애 만나고 놀러 다니고 하는 건 대학 가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지금 못해서 안달하는 멍청한 새끼들이 있단 말이지.” 그 순간 한 녀석이 손을 들었어요. “그때 하는 거하고 지금 하는 거하고 같습니까?”
* 나는 고2, 고3 때 첫 연애를 했다. 물론 그 영향으로 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나은 학벌을 획득하는 것 보단 그 때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나의 인생에는 더 중요했다. ‘창작을 하는 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는 그 사랑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사랑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p. 278
경쟁 위주의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발언들이 있는데요.(···) 이건 경쟁이 아닙니다. 5퍼센트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삶을 영속화하는 신분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마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 가짜 경쟁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p. 281
부모들은 아이가 운동에 재능이 없다는 건 인정하면서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 건 쉽게 인정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공부도 적성이고 재능인데 정말 타고난 공부 체질인 아이들이 있어요.
* 이게 사실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애들이 아닌 ‘평범한 애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정녕 옳은가를 고민해야 한다.
p. 288
분명한 것은 부모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이들 대부분이 훗날 노동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노동자에 적대적인 노동자, 대단히 이기적이면서 연대의식이 전혀 없는 노동자가 되는 건데요. 결국 공멸하는 겁니다.
* 따라서 노동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아갈 수 있는지, 권리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교육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배워야 한다.
p. 292
그런데 돈이 전부인 것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다들 조금이라도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조금이라도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다 보니 교육이라는 것이 무너져버린 겁니다.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을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p. 295
아이들이 나중에 1만 가지 직업 가운데 하나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텐데, 부모들이 생각하는 직업은 20가지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9,980가지의 직업을 갖고 살아갈 아이들은, 즉 거의 모든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이 사회생활의 출발부터 실패자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우리 부모는 내가 뭐가 되길 바랐는데 내가 실패해서 이걸 하며 살고 있구나, 이런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p. 296
보통의 아이들이 대학 입시를 통해 유의미하고 즉각적인 ‘인생의 질’을 확보할 확률은 2.5퍼센트 이하인 셈이죠. 2.5퍼센트 이하의 가능성이라는 게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세요. 이를테면 의사가 지승호 씨에게 심각한 얼굴로 “살 가능성이 2.5퍼센트 이하입니다”라고 말한다면, 혹은 “살지 못할 확률이 97.5퍼센트 이상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 사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우리의 아이는 2.5퍼센트 일거야.’라고 믿는다는 것이 문제다. 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97.5퍼센트라고 한다면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아이가 그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확률이 그 정도라고 하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 부모의 어리석음이 자식의 인생을 망친다. 그리고 이 체제를 곤고히 한다.
p. 302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은 없어요. 만날 미래만 있죠. 보다 나은 내년, 보다 풍요로운 3년 후, 보다 안정적인 5년 후, 그리고 또 내 아이의 10년 후, 늘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게 평생 동안이에요. 죽을 때까지 미래만 있고 오늘은 없어요.(···) 미래의 오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오늘이 되면 다시 미래의 오늘만 생각하죠. 그렇게 아파트 평수를 늘이고, 통장 잔고를 늘이고, 아이 대학 준비시키고, 취직 준비시키고, 그렇게 살다가 늙고, 단 하루도 충만한 오늘을 보내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겁니다.
p. 308
사람과의 관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경우에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어려움에 빠져도 그 사람만 생각하면 든든할 때, 그럴 때 사람은 행복하죠. 지옥이라는 게 별게 아니에요.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는 어떤 부자가 어느 날 불현듯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내 아들이 나에게 이리도 잘하는 건 내 재산 때문이 아닐까. 그 사람은 그 즉시 지옥으로 입장하는 거죠.(···) 반대로 정말 가난한 아버지인데 어느 날,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한 이야기를 전해 들어요. ‘우리 아버진 내세울 게 없는 분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멋진 분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 그 아버지는 즉시 천국으로 입장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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