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정도상 『그 여자 전혜린』

두괴즐 2011. 6. 25. 10:36

[밑줄긋기] 전도상 『그 여자 전혜린』


p. 25


 “너희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며? 난 전쟁터에 남아 있었지. 수많은 시체를 보았어. 모르는 얼굴도 많았지만 이름도 알고, 누구네 자식이라는 것도 알고, 습관이나 취미까지 아는 사람들도 많았어.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를 했던 사람이 땡볕 아래에 시체로 누워 있었지. 그의 눈, 코, 입, 귀에는 커다란 쇠파리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진액을 빨고 있었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총알을 맞았던 자국과 입과 귀와 콧구멍에 하얀 구더기들이 끝없이 몰려나오기 시작했어. 겨울엔 어땠는 줄 알아. 서서히 몸이 식어가면 몸 속에 살던 이들이 몰려나오는 거야. 하얗게 하얗게 몸 밖으로 나와 발버둥치지. 그럴 때 시체는 함박눈을 뒤집어 쓴 눈사람 같았어.”

나는 마구 헛구역질을 했다. 주희는 눈물을 찔끔찔끔 짜내며 백창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앞에서 실존이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p. 25


 “비켜 이년들아!”

 세 사람의 상이군인이 욕설을 퍼부으며 나와 주희를 밀쳐냈다. 양손에 갈고리를 끼운 사람,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고 있는 사람, 애꾸눈인 사람이 험악한 표정으로 우루루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행패를 부리며 상인들을 위협해 돈을 뜯어낼 터였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으니 당연히 보상을 해줘야 된다는 투였다. 거리에는 그런 사람들로 득시글거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백창우는 그들을 보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p. 27


 “나는 이제 막 지친 성기와 짧은 관계를 가지고 나왔어. 우리 누나도 창녀지. 양공주거던. 흑인 병사와 살림을 차렸어. 흑인 병사는 전쟁에서 살아남았지. 누나는 밀가루도 갖다 주고 쪼꼬렛도 갖다 주고 츄잉껌도 갖다 줬지. 내 동생은 그것을 들고 나가 팔았지. 우리 아부지는 이 세상에 없어. 빨갱이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했지. 정당한 재판도 없이 그냥 몽둥이찜질을 당한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 영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전쟁은 사람이 죽는다거나 건물이 파괴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전쟁은 총성이 멈춘 후에도 여전히 우리들의 삶을 그 뿌리까지 갉아먹고 있어. 인간의 삶과 영혼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전쟁은 무서운 거야. 나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어. 그런데 전쟁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

 (···) 백창우에게 그토록 많은 상처가 있는 줄 몰랐다. 백창우는 스물셋이었고 나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나이 차이보다 더 크게 삶의 경험은 완벽히 달랐다. 나는 아버지를 잘 만난 덕택에 전쟁을 피해 임시 수도인 부산에 있었고, 그는 고스란히 전쟁터에 남아 있었다.


p. 32


 “거리엔 불량한 사람들이 많아.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몰려 다니는 상이군인들은 통금도 아랑곳하지 않아. 그리고 골목마다 진을 치고 있는 거지들, 고아들도 문제고.”


p. 62


 “아프리카의 달은 정말 아름다워. 하지만 그 달 밑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은 비참하기 짝이 없어. 아프리카는 모든 희망을 유럽에 빼앗겼지. 어느 날 선교사들이 성경책과 십자가를 들고 아프리카에 왔어. 그들은 흑인들한테 기도하자고 했어. 흑인들은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했어. 기도가 끝나 눈을 뜨자 흑인들 앞에는 성경책과 십자가가 있었고 선교사한테는 아프리카의 땅이 있었어. 그후로 흑인들은 노예가 되어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끌려갔지. 아프리카의 주인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 되고 말았어.(···) 그런데 나는 이미 흑인일 수가 없어. 이미 백인의 정신과 관념으로 살아가고 있어. 그것이 싫어.


p. 106


 이차대전도 막바지에 올랐던 1943년의 어느 날 뮌헨 대학생이었던 한스와 소피아는 대담하게도 백장미의 서명이 쓰인 반나찌 유인물을 뿌렸다. 게슈타포 학생과 교수들이 들끓는 대학 교정에 뿌린 유인물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히틀러와 나찌는 비합리적이고 범죄적인 전쟁을 그만두라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한스와 소피아는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고 말았으며 당시의 뮌헨대학 총장이었고 인격자로 이름 높았던 후버 교수도 함께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대학의 정문과 후문 두 광장은 그들의 이름을 달고 동상과 분수가 그들의 자유의식을 후세에 영원히 전해주고 있었다. 독재에 대한 반항의식과 학문의 자유와 정신의 자유를 지키려는 전통이 뮌헨대학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그 전통 밖에서 있었다. 나는 슈바빙의 자유를 사랑했지만 슈바빙족은 아니었다.


p. 142


 “설사 실패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정열을 쏟으라구. 창작을 한다는 건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이니까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포기와 실패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야. 알겠지?”


p. 179


 “내 아버지는 식민지 치하의 고등계 형사였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족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감옥에 넣는 일을 했어. 매국노였지. 내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어. 그런데 말이야. 소위 해방이 됐거던. 당연히 매국노로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지위가 높아졌어. 경찰청장을 하고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은 암살되거나 또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나는 망명을 하고 싶었어.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치만 돌아갈 거야. 아버지의 세대와 싸움을 해야지.


p. 240


 상상해봐. 독일에서 힘들게 공부를 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선택한 일이 투쟁이었다면? 쟌느는 대학교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무명의 해방전선의 전사를 선택한 거였지. 영채 같으면 했겠어? 아마 못했을 거야. 존재의 상처 운운하며 낭만적으로 살았겠지.

 그러나 쟌느와 영채 둘 중에 누가 더 상처가 많았을까? 나는 쟌느라고 생각해. 쟌느는 대단한 문필가였어. 신문이나 방송에 프랑스의 지배를 통렬히 비판했지. 쟌느는 곧 알제리 민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었어. 그것이 문제였어.

 내가 알제리로 들어가 쟌느를 찾아 헤맨 지 일 주일만에 쟌느는 교외의 쓰레기장에서 갈기갈기 찍긴 시체로 발견되었어. 프랑스 정부가 납치해다가 윤간을 하고 죽인 거였어.



p. 277


 “참선을 했다면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했어?”

“나는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 않아. 내 손으로 내가 먹을 양식을 준비하지. 참선은 정신적인 노동이었지만 양식을 준비하는 것은 육체적인 노동이지. 그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인간은 존재할 수가 없어.(···) 폐병쟁이가 설사 훌륭한 학자라고 해도 그는 다만 생에 대한 나쁜 감상(感傷)만을 가졌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