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서문
비평가는 비평할 ‘거리’가 있으면 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청탁’이 오면 그제야 주어진 주제나 대상을 뒤적이며 칼집을 찾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청탁’이 없으면 ‘비평’도 없다.(···) 이와 같은 비평의 ‘수동성’을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비평에 대한 고상한 의미부여’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비평의 관습’뿐이다.(···)
나는 ‘비평의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발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자가발전’이 불가능한 비평을 ‘죽은 비평’(또는 문단비평)으로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평정신은 청탁이 있을 때 마음을 잡고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비평할 만한 대상이 나타나면 어떤 이해관계에 대한 얽매임 없이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것을 말한다. p.6-7(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1. '문학의 종언‘과 약간의 망설임
가라타니 고진의 논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그가 보기에 소설 중심의 문학이 근대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책임을 상상력으로 떠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방기하는 순간 문학이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토록 당연한 이야기가 오늘날 그다지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학의 위기를 공적 상상력의 방기에서보다 새로운 예술장르의 등장에 돌리고 싶어 한다. 이때 훌륭한 알리바이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영화다.(···)
그러나 문학의 종언을 이런 예술장르의 진화론적 교체에서 찾는 것은 사태의 핵심을 은폐하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종언을 맞이하고 있다면, 영화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해도 소설들은 계속 창작되고 팔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때의 소설은 사회적 상상력이 부재하는 오락거리나 위안서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무리 사적(私的)인 것이라고 해도, 아무리 오락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 근저에는 공공의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종언의 당사자인 소설가들이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에 별로 동요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 ‘근대문학의 종언’은 엄밀히 말해 ‘근대비평의 종언’으로 읽혀야 한다. 비평가들의 불쾌함은 근대문학(소설)이 끝났다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역할이 종언을 고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p.25-27
에토 준의 충고를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할 것이다. “비평가는 키가 키고 핸섬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교수여야 한다.” 비평가의 수명은 위험과의 거리와 비례한다는 것은 오늘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p.28-29
이제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동료나 전공학생들만을 위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작품집 말미에 으레 붙어있는 해설은 확실히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설일 뿐, 비평이라 할 수는 없다. p.30
이제 비평가에게 중요한 것은 엄밀히 말해 작가가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다.(···) 최근 활동하고 있는 젊은 비평가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국문학, 즉 한국문학 전공자들이다. 다양한 전공자는커녕, 그렇게 많던 외국문학 전공자들마저도 이젠 찾아보기 힘들다.(···) 언제부터인가 비평이라는 장르가 한국문학 전공자들에게 유리하도록(적합하게) 변질되어 갔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국비평가의 특징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또는 하는)자일 것. 2) 대학의 교수이거나 그것을 목표로 하는 자일 것. 3) 문학교육(국어교육)으로 생활비를 버는 사람일 것(학원이든 과외든 학진연구비든). 따라서 비평은 어디까지나 부업으로서밖에 취급받을 수 없으며, 그런 이들의 이합지산 공간인 문단이란 국문학 전공자들의 ‘제2의 사교장’ 이상일 수 없다.(···) 비평가를 만드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국문학이라는 제도였던 것이다. p.32-33
2. '문학의 종언‘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문학의 종언’을 문학이 더욱 건강해지기 위한 ‘열병’으로 보는 것, 아마도 이것이 문학을 떠나지 않으면서 ‘종언’을 견디는 거의 유일한 방식처럼 보인다.(···)
그[백낙청]는 오늘날의 한국문학은 여전히 ‘영구혁명 중에 있는 주체성(주관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까지나 ‘신념(믿음)’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김연수 발언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장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의 종언이란 근대문학의 종언이고, 근대문학이란 자국어로만 소비되는 문학”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김연수의 말처럼 오늘날의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야 한다면, 결국 그것은 ‘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라타니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하게 된 계기가 바로 세계적인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p.40-47
가라타니는 하루키가 가진 영향력의 비밀을 풍경의 자명화에서 찾고 있다. 쉽게 말하면, 하루키 소설의 화자는 역사적인 기억은 능청스럽게 모른 체 하면서 거의 목록에 가까운 노래 제목이나 상품명들은 과도하게 쏟아내는데(사적 취미의 남발), 가라타니가 보기에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들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에 별 이유 없이 열중해 보임으로써, 의미나 목적을 가지고 뭔가에 열중하는 타인을 얕보는 태도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따라서 하루키가 보여주는 ‘새로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혹 그것을 새롭게 여기거나 오늘날의 현실적 상황을 적어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루키가 ‘전도를 통해 만들어낸’ 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p.50-51
가라타니가 ‘종언’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것이 끝나고 이제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새로움(단절)도 역사에 등장하는 ‘반복’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나카가미 겐지의 죽음을 통해 일본근대문학(근대소설)은 끝났고, 그 이후 등장한 소설들은 소설이 아니라 로맨스라고 말하는데, 이는 카탈로그에 가까운 에도시대의 소설로의 후퇴를 의미한다. 이제 소설은 역사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로부터 벗어나 특정 대상이나 어법(입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p.52
3. 비평의 운명-가라타니 고진과 황종연
그[황종연]는 일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형성된 근대문학이 시대의 변화에 의해 쇠락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정작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은 ‘문학의 쇠락(종언)’ 이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가 한국 문학자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문학이 끝났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즉 오늘날의 문학)이 오락에 불과하다는 것, 다시 말해 문화생산양식에 있어 문학이 가진 최소한의 이념적 우월성마저 사라졌다는 데 있다.(···) ‘근대문학’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문학은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들의 ‘보편적 가치’가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p.58-59
문제는 황종연을 제외한 많은 비평가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문학의 유용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원론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신념’을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 ‘자의식’은 존재할지 몰라도 ‘내면’이 있을리 없다. p.62
황종연이 ‘종언론’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은 ‘종언 자체’보다는 궁극적으로 ‘종언 이후’를 위해서다.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종언’은 묵시론적 비전과 관련이 없다.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종언’이란 ‘예술의 자기해방’이다.”(···) 헤겔이 말하는 ‘예술의 자기해방’이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역사적인 세계관과 완전히 유리되어 소재나 형식을 취하는 데 있어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예술가의 내면과 무관하게 개별 형식/내용에 모순만 되지 않으면 어떤 작품이든지 만들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자기해방’이다. 역사나 내면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예술, 헤겔은 바로 이것을 예술의 최종국면, 즉 ‘예술의 종언’을 보고 있는 데 반해, 황종연은 반대로 바로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주권획득(즉 예술의 진정한 출발)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p.65-67
황종연이 말하는 문학의 불확정성이란 쉽게 말하면, 문학은 제도의 규제를 받기 마련이지만 항상 그리고 전면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데리다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문학은 역사적 제도이기도 하지만 그런 규칙성을 깨는 허구적 제도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분명 근대문학이 네이션 성립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끝없이 부정해왔다는 말이다. p.85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 즉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어떻게 근대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한 가치‘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고 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p.89
비평가는 이미 주어져 있는(그러므로 자명하게 여겨지는) 문학판만을 가지고 그것들의 지형도(성좌군)를 그리는 데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비평가라는 존재)과 자신의 비평행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을 수행해야하며, 만약 그와 같은 과정을 생략할 경우, 비평은 결국 ‘장식적 미(美)의 귀환’을 환영하는 잔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p.92
4. 비평의 노년-가라타니 고진과 백낙청
‘한국문학의 보람’이란 ‘국가조직(권력)’이나 ‘문학조직(권력)’에 대한 질문 대신에 그것들의 ‘운영’이, 수많이 차이들의 분산 대신에 ‘지혜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위치에서 바라본 ‘노인의 감회’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텐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의 종언’이라는 점에서 백낙청의 ‘문학의 보람’은 가라타니의 ‘문학의 종언’이 물구나무선 모습, 바꿔 말해 ‘문학의 종언’의 가장 강력한 증거라 하겠다. p.10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에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작가의 재능이 부족하다거나, 작가가 정열을 잃었다거나 현실과 격투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그것이 ‘문학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문학’은 그때까지 부여되어온 과잉된 의미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 그 자체는 무력하다고 해도 상상력에 의해 역전된다는 논리는 이제 통용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문학에 그저 무관심한 것입니다.(가라타니 고진)
“(···) 그러나 오히려 ‘문학’이 그 정도로 힘을 가진 시기가 도리어 역사적으로 이상한 사태가 아니었을까?”(가라타니 고진) p.106-107
가라타니가 보기에 근대문학(소설)은 그때까지 저급하게 평가되어온 상상력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등장한 것으로(네이션 형성과 밀접한 관련하에), 그저 오락에 불과했던 문학이 도덕적 책임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높은 지위를 얻은 것이다. p.108
험난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세력들이 대부분 제도에 안착한 오늘날, 한국문학은 바야흐로 근대문학이 이룬 훌륭한 성과인 ‘문학의 보로메오 매듭’(문학시스템), 즉 시장에서의 문학출판(자본)-대학에서의 문학연구(‘국문학’이라는 이념)-초중고 교육에서의 문학교육(입시산업) 속에서 행복한 안도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일단 이런 문학시스템에 제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을 보호받는 상황 속에서 한국문학이 갖는 보람은 비단 한 원로비평가의 비평적 감회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한국 근대문학 전체의 노년을 의미한다. 129-130쪽.
‘민족’이란 제국주의의 침략을 통해서 비로소 형성된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또 그것은 외부로 향해졌을 때 또 다른 ‘제국주의’나 ‘배외주의’로 전환된다고 보는 가라타니 133쪽.
백선생이 앞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일정한 민족적 특성과 민족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 대다수 대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대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분열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분열감정에서 오히려 장래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가라타니 고진) 134쪽.
오늘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원로 비평가들이 지금과는 달리 폭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생활터전이었던 대학이나 문단이 제대로 시스템을 갖추기 이전 상태, 즉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있어 문학은 결코 자명한(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문학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당연 문학외부(사회)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학이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완성된 오늘날, 문학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본래의 임무, 즉 요즘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개별 작품들에 대한 성실한 호명작업‘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146-147쪽.
지금까지 한국사회(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억압했던 것이 ‘분단체제’라고 한다면, 그 체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문학을 억압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분단체제의 ‘석연찮은’ 해택을 받은 이들이 만든 ‘문학시스템’이라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본래의 임무’를 강조하거나 ‘작품으로의 귀환’을 촉구하는 것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옹호하는 것 이상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도-내-비평, 네이션-내-비평의 ‘제2자연’화, 다른 말로 ‘(근대)비평의 종언’을 의미한다.(···) 감히 말하건대, ‘백낙청의 비애’와는 정반대로 그와 같은 휘둘림[가라나티의 종언선언에 의한]이야말로 한국만학에 존재하는 한줌(최소한)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근대문학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문학이 끝났으니까 다른 것을 하라”가 아니라, 오늘날 확고히 자리 잡은 문학시스템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격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1993년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학’에 대해 자각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평적이고 정치적인 것입니다. ‘문학과 정치’라는 문제는 따라서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학적인 것은 고도로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147-149쪽.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이러한 문학에 대한 단호한 거부야말로 문학을 진정으로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 진정한 문학은 본래 자기보존(시스템보존에 기댄)이라는 현실원리에 의해 ‘교육되지 않는’ 강력한 쾌락원리에서 탄생한다. 따라서 문학정신은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다. 154쪽.
5. 입담 對 비평-가라타니 고진과 황석영
오늘날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아마도 열에 아홉은 황석영을 꼽을 것이다. 실제 얼마 전에 있었던 신진평론가들(20대에서 40대 초반 30명)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문인으로 그가 뽑혔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출간된 그의 신작 장편『바리데기』는 출간 전부터 인터넷서점에서 10%할인 + 15% 마일리지(그리고 2천원 쿠폰)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정가가 1만원이니까 무려 45% 할인으로 예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 출판사는 싸게 공급하여 판매를 늘리고, 서점은 ‘되는 상품’ 밀어주는 전략을 사용함으로 윈윈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술이 결국은 문학시장을 크게 왜곡시킬 것이라는 것쯤은 동네꼬마들도 알 것이다. 즉 『창작과비평』이 아무리 신자유주의(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싣고 FTA가 가진 문제성을 꼬집는다 하더라도, 창비에서 이런 식의 울트라-신자유주의적 행태를 보인다면(다시 말해, 자본의 힘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면), 그런 겉과 속이 다른 비판은 딴나라당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존심이 있는 작가라면 자신의 책이 덤핑으로 팔리는 것을, 그런 방식이 아무리 인세수입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157-159쪽.
만약 황석영이『바리데기』라는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지 않고 전작을 써놓았다가 다른 사람이름으로 신인상에 응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100% 떨어졌을 것이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문제적 상황들(···)과 그에 대한 묘사에서(···) 건전한 정치의식과 시의적절한 작가적 개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건전성과 시의성은 우리가 해외뉴스나 시사다큐멘터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서 단 한발작도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
(···)『바리데기』가 겨우 이 정도에서 머물게 된 것은 결국 문제의 핵심을 철저히 파고들어가는 작가적 예리함과 성실함의 결여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바리데기』에 그려지고 있는 갖가지 비참한 상황들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은 거세된 채로 ‘배경’으로서밖에 기능하고 있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상을 쫓기에 바쁠 뿐, 정작 그것들을 가능하게 한 모순에는 눈을 돌리고 있지 않다. 160-161쪽.
최근 들어 황석영은 ‘한국적인’ 서사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형식실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데, 그것이 서구적 문학양식인 ‘소설’을 넘어서는 시도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 그가 진정으로 새로운 형식실험을 통해 소설을 발전시키고자 했다면, 무엇보다도 전통서사에서 자명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착함’ ‘고난’ ‘희망’ 같은 자기-완결적 코드를 먼저 해체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바리데기』와 같은 로맨스에 가까운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황석영이 제시하는 윤리적 명제에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인공 바리 역시 다양한 모순들을 몽상(꿈/굿)으로 이념화하여 ‘생명수’라는 최종 메타포를 도출하는 데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이 메타포가 오늘날의 세계모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맨스를 지탱하기 위해 ‘턱없이 격상된 기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런 아이러니가 제거된 생명수야말로 세계모순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냉각수라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 로맨스의 대명사격인 김훈 소설의 주인공들처럼『바리데기』의 주인공들에서도 ‘인격’을 찾기 힘들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호 같은 개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62-165쪽.
필자는 솔직히『바리데기』가 왜 그토록 많이 읽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바리데기』는 실패작이다. 작가의 의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작품 내에 설득력 있게 녹아있지 않는 이상 마음씨 좋은 여선생님처럼 계속해서 이해심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작품이 대중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원인은 작품 안보다는 바깥에 더 많다. 다시 말해 그것은 생산이 아니라 유통, 작품의 질이 아니라 마케팅(광고)에 의한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인식하면서『바리데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정리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휘황찬란한 인생역정과 국가대표라는 상징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브랜드 네임이 있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이름에 압도된 비평가들의 ‘의도의 오류’에 기반한 카피 쓰기가 이어지며, 셋째로 그것들을 가지고 뛰어난 영업을 자랑하는 출판자본이 능력을 발휘한다. 결국 이 세 가지가 훌륭히 결합하여 어설픈 작품『바리데기』를 위대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174-177쪽.
황석영의 소설들은 시선의 대상이 내부가 아닌 외부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그것과는 다르다.(···) 외부성의 침투란 기본적으로 자아분열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황석영 소설에는 이런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소설의 전개는 등장인물의 갈등이나 성장이 아닌 ‘무대전환’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같이 각자가 맡은 역할에만 충실한 자동인형에 가깝다.(···) 설령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감동이 가진 진부함을 부인하기 힘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폐쇄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80-182쪽.
하루키에게 있어 해외체험은 그의 작품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황석영에게 그것은 ‘풍경’에 집착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187쪽.
근대소설이 이전 서사물과 확연히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했기(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대부분 ‘실패담’으로 끝나며, 고통이나 분열은 해소되기보다는 그대로 내포된 채로 마무리된다. 즉 근대소설의 주체는 고통이 어떻게 해결되는가가 아니라 고통이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있는 셈이다.(···) ‘치유’를 목적으로 한 황석영의 후기소설들이 코엘료식 ‘우화’와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탐정과 연금술사, 그리고 무당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근대소설은 결코 치유나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항상 구원을 지향하지만, 결국 그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199-200쪽.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소출판사를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며, 그들은 대형출판사가 놓치고 외면하는 분야를 훌륭히 커버하고 있다.(···) 일본에서 사재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스템 자체가 애초에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힘으로 더티-플레이를 하는 것은 일본출판계가 아니라 한국출판계이다. 일본에서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책 할인을 절대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경우, 책 내용이 좋아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의 힘이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돈이 없는 중소출판사의 경우 이런 마케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 역으로 보면, 일본에서 책이 할인 될 수 없는 것은 영향력 있는 대형출판사들이 할인시스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중소 출판사들은 우리보다 나은 환경에서 책을 만들고 있으며, 동네마다 서점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211-212쪽.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국내에 번역된 이후 이제 어느 누구도 ‘근대문학’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으로는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의심하면서도, 문학의 현실적 조건(시스템) 하에서는 어떤 ‘회의’도 하지 않는다. 230쪽.
가라타니가「장마」에서 발견한 것은 흔히 이야기되는 한국적 토속성이나 샤머니즘이 아니라 놀랍게도 횡적 연대에서 파생하는 합리성이다. 그리고 이는 나카가미가 말한 ‘근대적 퍼스펙티브의 부재’와 바로 연결된다. 흔히 근대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같은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근대적 퍼스펙티브’가 가져온 전대를 내면화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근대를 비판한답시고 그 표적을 ‘합리성’에 두는 것은 명백히 도착적이다.(···) 근대적 기제를 넘어서는 것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토속적 샤머니즘은 도리어 이와 같은 환상 자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손님』은 외래적인 것(기독교와 사회주의)을 마마(손님)로 간주하고, 그것이 일으킨 문제들을 우리의 전통문화(즉 굿이라는 샤머니즘)를 통해 ‘초월적으로’ 해결하고 있다면,「장마」는 마찬가지로 샤머니즘을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매개 이상의 기능을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문제는 결국 횡적 연대를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되고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초월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했을 때, 그에 대항하여 황석영이 발견한 민간신앙이라는 것 역시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그것은 ‘근저’를 믿는, 다시 말해 ‘근저’라는 환상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 ‘초월적인 해결책’으로서 등장하는 샤머니즘은 그것이 아무리 반근대적(반문명적/반이념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추지 못한 이상 ‘환상으로서의(근저로서의) 자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44-245쪽.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관점에서 ‘황석영’이라는 문제에 접근해왔다. 첫째는 황석영의 후기소설에 대한 논의로『손님』,『심청』,『바리데기』를 주로 다루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전통서사(굿이나 무가 또는 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근대소설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단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전통서사가 아무리 본래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서구적인 것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이상 이미 서구적인 것을 내재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외래적인 것 對 본래적인 것’이라는 구분을 고수하면서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소설적 엉성함을 ‘새로운 형식실험’으로 옹호한다. ‘시적 서사’와 같은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진짜 ‘황석영이라는 문제’는 그런 결함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었는데, 여기서는 일단 두 가지만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첫째는 문학 외적인 것으로 왜곡된 출판시장 속에서 이루어진 출판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이고, 둘째는 문학 내적인 것으로 ‘치유의 도구’라는 소설관이다. 이 두 가지 중 보다 문제적인 것은 당연 후자인데, 사실 코엘료와 하루키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석영은 이들을 대중작가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그와 이들 사이에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치유로서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자아탐색담’ 또는 ‘수난기’ 형태를 띠고 있으며, 거기서 역사는 항상 다른 어떤 것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풍경으로만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후자는 항상 전자의 무대장치로만 기능하고, 전자는 후자의 매개 정도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소설에서 아이러니를 가뿐히 추방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후기 황석영 소설의 본질을 입담화(구비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황석영 개인기(?)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아이러니서사(소설)라는 양식의 구술서사(또는 우화)로의 퇴행을 의미한다.(···)
황석영은(···) 기록되지 않는 세계, 즉 말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씌어진 것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서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인공적인 것(이차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일차적인 것)을 구분하여 후자를 보다 근원적으로 여기는 음성중심주의의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황석영이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하여 행한 발언에 대해서다. 그는 이 테제 자체를 우리와는 무고나한 일본만의 문제라고 못 박고 그것을 우스꽝스러운 일로 치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황석영의 일본관과 가라타니 고진(나카가미 겐지)의 한국관을 자세히 분석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입담의 논리와 비평의 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치이였다. 입담은 객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 반해, 비평은 주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탈-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52-254쪽.
‘동아시아문학’이 각국을 대표하는 작가 몇 명이 만나 친분을 쌓는다고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학습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위의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인지도 모른다.(···) 만약 동아시아 문학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그것은 독자들이 자국의 문학을 ‘국문학’이 아닌 여러 문학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민작가’라는 월계관도 더 이상 공정한 평가에 대한 방어막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즐거운 입담 역시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이 우스꽝스럽게만 여겨질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당의 입담은 우리를 치유(풀이)할지 모르지만, 소설의 정신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비평가의 비판은 그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건강함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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