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김연수,『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두괴즐 2011. 6. 25. 10:31

[밑줄긋기] 김연수,『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내 말은,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글이 시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다른 내용이 담겼으리라. 할아버지가 쓴 또다른 글은 누구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 글은 할아버지가 자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엌 아궁이 속에 던져 넣을 때, 함께 불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꽃과 함께, 현대사를 거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4·4조의 운율을 지닌 대서사시만 남겨놓고 할아버지는 죽었다. 하지만 실제로 할아버지가 죽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동지 가까울 무렵의 매섭게 춥던 어느 날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궁이 속에다 집어넣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34-35쪽.


왜 할아버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뻔해서 오히려 거짓말에 가까운 대서사시를 우리에게 남겨두고,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토로한 그 글은 몰래 태워버린 것일까? 그 글은 함께 불태워버리려고 했던 입체 누드사진처럼 너무나 개인적인 경험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할아버지의 일생은 바로 거기에 있었으리라. 38쪽.


1990년 가을부터 1991년 초여름에 이르는 그 반년 남짓, 우리는 그날 밤의 일들에 대해 수없이 얘기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민은 나에 대해, 그리고 나는 정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날의 기억을 서로 맞출 수 있었고 공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맞춰놓으면 서로가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 엇갈리는 듯 느껴지고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정민의 기억 속에서 나는 “응, 나 되게 잘해”라고 말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민 역시 내게 “몇번이나 했어? 수백 번? 수천 번?”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히 정민이는 한참 입체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내게 그렇게 물었다.(···) 반면 “지금 여기서 한번 피워볼까?”라는 정민의 말은 둘 다 기억했다. 29-40쪽.


유대인의 피가 섞인 혼혈 독일인 즉 미슐링(Mischling)으로, 한때 쾰른에서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적이 있는 헬무트 베르크는 인간이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모두 사랑 때문이라고 말했다.(···) 증오나 분노와 달리 사랑이 가리키는 것은 저마다 달랐다. 예컨대 광주학살을 명령한 사람이 가족을 아끼는 감정도 사랑이었고, 그 순간 정민의 몸을 껴안고 만지려고 드는 내 마음도 사랑이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헬무트 베르크에 따르면, 하지만 그게 바로 신의 뜻이었다. 68쪽.


“아니야. 우주는 무한할 거야. 이 우주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 생각만 해도 추워.(···) 그때 달달달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은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일이었어. 그게 누구든, 나는 연결되고 싶었어. 우주가 무한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뭐래도 상관없어. 다만 내게 말을 걸고, 또 내가 누구인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우주에 한 명 정도는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우주가 무한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무한한 우주에서 살고 싶어.” 68-69쪽.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온갖 얘기들이 말해주듯 인간의 삶 역시 항상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 삶은 예전의 삶과는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예전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이나 다름없으므로 영원한 거처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83-84쪽.


정민은 그 전자음을 들으며 누워 있었다. 전자음은 우주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같았다. 아무 내용도 없는, 그저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알려주고자 하는 그런 간절한 욕망. 정민은 어둠 속에 누워 방해전파를 들으며 더없이 광활한 우주를 생각했고, 자신이 그렇게 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외로웠으므로, 정민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누군가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과거나 현재나 미래 그 어디에 있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꼭 같이 라디오를 듣겠노라고. 85-86쪽.


처음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할 때 정민이 나와 닮았다면, 투르게네프의『첫사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어준 적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불안한 마음으로 뭔가를 기다렸고 모든 것에 경이로움을 느꼈으며 무엇인가에 끊임없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을이 질 때면 나는 제비떼처럼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져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장난을 쳤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많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고 우울한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내 처지도 그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그 두꺼운 책이 너무나 부드러워 한없이 쓰다듬고 싶은, 한 여자애의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민과 잠을 자고 난 뒤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온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 것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마녀의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88쪽.


그 씨앗이 과연 어떻게 싹을 틔울지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94쪽.


 이처럼 지금의 사람들이 핸드폰, 블로그, 검색, 이메일 같은 단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사람들은 총격, 수류탄, 폭격, 사살 등의 단어에 노출돼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불행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행복과 불행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였다.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 그걸 가리켜 현실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순수한’ 개인이란 이데올로그들의 강변에 불과하므로, 함께 모여 그런 세계를 형성한 사람들이 자신이나 타인의 몸에 가하는 훼손행위에 지금의 우리와 같은 불편함을 느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정민이 말한 ‘갑자기 자신이 현실의 바깥으로 튕겨나간 것 같은 느낌’이란 자신이 그 세계, 혹은 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과 얼마나 강하게 연결돼 있는지 인식하게 될 때의 느낌일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게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첫 번째 단계였다. 102-103쪽


 “그게 그 얘기야. 살아남기 위해 늘어놓는 그 음악소리를 철학자의 목소리인 양 말할 필요는 없어. 그냥 미친 짓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야.”

 “집시들과 나는 죄수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떠올린 채 죽어갈 수 있게 할 거야.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 까닭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죽고 나면 우리가 왜 이런 세상에 존재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리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의 문제야. 모든 죄수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면서 죽어야만 해.”

 “애당초 존재가 없었다면 고통도 없었던 거야. 너는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죄수들의 영혼을 노예로 삼고 있는, 죽음의 나팔수일 뿐이야.”

 “존재가 없다면 다만 고통만 사라질 뿐인가? 그들의 부모는? 아내는? 아이들은? 그렇다면 캠프에서도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우리가 쓰레기이기 때문이지.”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야.”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운명처럼 만들어지는 그 순간,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선율들. 그 선율들을 위해 그는 땀에 푹 젖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흘러간 집시 노래를 연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집시들의 연주를 들으며 가스실로 들어갔다. 266-267쪽.


나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그날부터 역사는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시청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게 자본주의의 미디어가 하는 일이야. 우리를 역사의 시청자로 만드는 것. 275쪽.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283-284쪽.


폭력이란 양심의 문제도, 신념의 문제도 아니니까요. 폭력은 결국 체제의 문제인데, 스리랑카의 현체제하에서는 타밀족이든 싱할리족이든 폭력에 무한정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적 체제에서 비폭력은 멸시의 대상입니다. 오직 폭력만이 찬양받을 수 있습니다. 299쪽.


하지만 그날의 산책길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쾌한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 다시 말하자면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존재였다. 그의 삶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불행으로 가득했고, 그 대부분의 불행은 폭력적인 체제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그가 그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 행복을 발견하게 된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 행복은 결코 환각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 그의 양심선언을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불행과 행복의 변증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이야말로 국가 권력에 일방적으로 희생된 한 인간의 분열된 자아로 여겼다. 315-316쪽.


 오나시 중장은 패전 이 개월 전, 죽음을 앞두고 “오늘 피어 내일 지는 벚꽃이 이내 몸이련가/ 어떻게 그 향가를 깨끗이 지키려뇨”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그는 가미카제 공격을 앞둔 젊은 군인들에게도 이런 미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죽음은, 그 어떤 자의 죽음이든, 한 생명의 종말일 뿐이므로 아무리 료칸의 시구를 들먹으며 “지는 벚꽃, 남아 있는 벚꽃도 지는 벚꽃”이라고 해도 그 앞도적인 최후를 견딜 수 있는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출격을 앞둔 특공대원들은 그 무엇에든 취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술에 취했다. 데우지도 않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거나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어떤 자들은 소리를 지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쉈다. 아이처럼 엉엉엉 소리내어 우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취하려고 해도, 취해서 모든 것을, 부모와 형제자매를, 애인과 아내를, 하룻밤만으로는 다 되돌아볼 수도 없는 짧은 인생을 잊어보려고 해도 상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군부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결국 난장판으로 끝이 나는 술자리, 고도 이만 피트를 최고시속 삼백칠십이 마일로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을 지닌, 하지만 이백오십 킬로그램의 폭탄을 적재한 탓에 결국 한번 급강하하게 되면 다시는 기체를 일으켜세울 수 없는 단발엔진 탑재 함상전투기 제로센, 그리고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삶이 덧없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마약, 즉 히로뽕이었다. 322-323쪽.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나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하죠. 이번 생에는 글렀으니까 혹시 다음 생에라도? 그런 게 저녁 여섯시에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태극기가 있는 시청 쪽을 향해서 몸을 돌리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던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정민의 삼촌은 ‘왜 이런 체제뿐일까?’라고 질문한 거죠. 바로 그 무렵에 중앙전신국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것을 직접 봤고, 청원경찰에게 폭행을 당하죠. 문제는 그게 우연한 폭행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 단군의 자손으로 태어난 한민족으로서 태극기를 향해서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던 사람도 그 다음 순간 아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심지어는 사형까지 당해요. 놀라운 반전이죠. 그런 일을 당하면 한민족이니 대한민국이니 유신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걸 깨닫고 나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가 없어요. 구역질이 나죠. 필연을 가장하는 그 모든 언사를, 그 모든 상징을, 그 모든 행위를 부정할 수밖에 없어요. 우연의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만에 하나 제비를 뽑는다고 하더라도 ‘정말 재수 없구나’라며, 그게 사주팔자나 손금에 계시된 불운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좋을 텐데, 정민의 삼촌은 자신이 그 제비를 뽑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내가 가난한 이유는 부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식이 되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사회 불만세력이 되는 거죠. 그건 필연을 가장한 체제에서 자발적으로 우연한 존재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해요. 329-330쪽.


나는 저 달이 존재하는 한, 내 존재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338쪽.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46쪽.


 “아니, 괜찮아. 그건 미안한 게 아니고 후회가 되는 일이지.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안나와 더 많이 사랑할 거야. 더 많이 키스하고 더 많이 포옹하고 더 많이 섹스할 거야. 아직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나이든 사람이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금언은 이것뿐이야.” 372쪽.


 실망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설사 그 일이 온기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우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열망이므로. 374쪽.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3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