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조정래,『허수아비춤』
* 작가의 말: 우리의 자화상 보기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정치에만 ‘민주화’가 필요한 것인가? 아니다. 경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이 땅의 모든 기업들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투명경영을 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양심적으로 내고, 그리하여 소비자로서 줄기차게 기업들을 키워 온 우리 모두에게 그 혜택이 고루 퍼지고, 또한 튼튼한 복지사회가 구축되어 우리나라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4-5쪽.
진정한 작가이길 원하거든 민중보다 반발만 앞서 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 톨스토이의 말이다.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 타골이 말했다.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고, 노선은 이렇게 말했다.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의 말이다. 7-8쪽.
*
남 회장은 한 달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출감 사유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병보석이었다. 그리고 약방의 감초처럼 덧붙여진 한마디는,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고,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민경제에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 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 말은(···) 반복 반복 또 반복해 가며 틀어 대는 것처럼 벌써 4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그 생명력을 과시해 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 반복 행위를 지겨워하지도 않고, 신물 내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그대로 믿어 주고 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큰 기업이 잘돼야 우리도 잘살게 되지. 대중들은 이렇게 동의하고 동조하면서 재벌들이 저지르는 죄를 가볍게 여겼고, 그들이 받는 사법적 특혜에도 지극히 관대했다. 국민경제를 위하여······, 그 기업 옹호론과 재벌 보호론의 주문은 그 효력 좋고 생명력 강대하기가, 우리를 믿어야만 재물운이 트이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그 한마디로 2천 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배부른 번성을 누려온 종교들의 질긴 생명력과 맞먹었다. 신문들이 앞장서 설파하고, 법관들까지 활용하고 나서는 그 기업 옹호론과 재벌 보호론은 자본주의 한국에서 출현한 신통력 좋은 신흥 종교이기도 했다. 64-65쪽.
“돈은 살아 있는 신이다, 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전지전능한 힘이 여기 어디든 안 통하는 곳이 없다 그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 어떤 조직, 그 누구한테든 통하고, 먹히고, 효과가 납니다.(···)” 70-71쪽.
권력이 큰 자리일수록, 자리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확실하게 믿지 않는 돈, 조금이라도 뒤탈이 우려되는 돈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자기들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절대 원칙이지요.(···)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그들이 확실하게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첫째 우리 일광의 돈은 절대로 뒤탈이 생기지 않는다. 둘째 만에 하나 로비 증거가 드러나도 그 상대를 절대 불지 않고 100% 보호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그들 사회에서 암암리에 알려지게 되면 우리의 일은 땅 짚고 헤엄치기가 되고, 순풍에 돛 달게 됩니다. 74쪽.
“(···)근데 말야. 저쪽에서는 로비 상대들이 퇴직한 다음까지도 잘 봐주고 의리를 지킨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무슨 소리지? 사실이 그런가?” “예, 그거 사실입니다. 국세청에서 퇴직해 세무사 개업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계열사 일을 밀어 주고, 검찰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하면 큰 사건 맡겨서 수임료 크게 인심 쓰고 그러는 식이죠.(···) 일 처리를 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의리 있는 행위가 그 전 직장으로 순식간에 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아 진짜 의리 있구나! 하며 감동하게 되고, 내가 나가도 도와주겠구나! 하는 위안과 믿음을 갖게 되고, 그런 좋은 감정은 로비를 통해서 얻은 효과보다 몇 배 큰 신뢰를 얻게 합니다.(···)” 76-77쪽.
“헌데 저어······, 비용이 좀 들었습니다.” 건설사 사장은 머리를 읍조리며 기어 들어가는 소시로 말했다.
“당근을 줘야 말이 뛰고, 기름을 칠해야 기계가 도는 법이야. 멕여야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입 벌리고, 손 내미는 자들한테는 걱정 말구 멕여 줘. 잘 멕이구 잘 돌아가게 하는 것, 그게 바로 능력인 게야.(···)” 87쪽.
대형 건설 프로젝트에서 공기 단축이란 단순히 원가 절감의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처럼 손쉬운 비자금 조성 방법으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공사를 하는 경우 공기 단축은 이중 삼중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요술 방망이였다. 공기가 예정대로 진행되어도 수없이 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을 쓰는 건설업의 특성상 노동자의 수를 부풀려 비자금을 만드는 것은 가장 손쉽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공기까지 단축되면 어찌 될까. 그 공기 단축 기간 동안의 일용직 노동자들의 인건비에다가, 부풀린 인건비까지 고스란히 비자금으로 쌓이는 것이 아닌가. 또한 공기 단축에 따른 원가 절감 효과가 생기고, 입주자 빨라지니 잔금도 빨리 받게 되어 은행 비용까지 줄어든다. 그뿐이 아니라 그 많은 원자재 값의 장부 이중 기제, 여러 가지 하도급을 주며 으레껏 챙기는 리베이트 등 건설업에는 비자금 긁어모으기 딱 좋게 허술하고 침침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몇십 층을 헤아리는 최고층의 대형 주상복합아파트를 수천세대 지으면서 그 내부 자재들을 전부 외제로 하고, 그걸 구매할 때 구매가의 20%를 비자금으로 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외국에서 발생한 거래이기 때문에 세무서의 눈길을 깨끗이 피하게 되고, 그 막대한 비자금은 회장 개인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88-89쪽.
대한민국 돈의 60% 이상이 서울에 있고, 그 돈의 70% 이상이 상위 10%에게 있다는 것이 객관적 경제 분석이고 통계였다. 93쪽.
“예. 각 대학 캠퍼스마다 건물을 지어 주는 것입니다.”
“건물?”
“예. 대학에는 4~5백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세미나실을 겸한 대형 강의실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정하고 있는 30억 정도면 그런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건물을 짓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땅값인데, 대학의 경우 그 땅값이 안 들고, 우리 건설사를 투입해서 실비 공사를 하고, 학교 건물들이란 비싼 내장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평당 공사비가 3백이면 훌륭하게 지을 수 있고, 그럼 30억이면 천 평 건물이 되고, 천 평이면 4~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멋진 종합 행사장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에 다가는 우리가 원하는 건물 이름을 붙이게 합니다. 우리 그룹 이름을 따서 일광문화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창업 회장님 호를 따서 창해문화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 그러면 전교생들이 그 건물에 드나들며 여러 행사를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그룹의 이미지를 좋게 갖게 됩니다.(···) 머릿속 깊이 새겨지는 그 생각은 바로 기업의 호감도로 나타나 기업의 인기투표에 직접 작용하고, 그 파급 효과는 사회 전체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지어 준다는 소문이 전국 대학으로 퍼지면 다른 대학들도 그 기대감으로 우리 그룹의 이미지가 더욱 좋아지는 파급 효과까지 생기게 됩니다.”
“(···) 또한 갈수록 문제가 되고 있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란 명분도 함께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원금은 문화적 기부라 그 액수에 따른 세금 감면도 받을 수 있습니다.” 103-108쪽.
“(···) 10년 전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려면 당선자의 경우 2천억이 들었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3천억이 든다고. 나라에서 주는 공식 선거 비용은 얼마 안 되는데 그럼 그 많은 돈은 어떻게 마련할까?(···) 다 기업인들한테 손 벌리는 거야.(···) 태봉 같은 기업은 자기의 목표를 향해 솔선해서 엄청난 거액을 판돈으로 거는거야. 그리고 당선되면 대통령의 뒷다리를 단단히 잡게 되는 거지. 또한 이미 통로를 마련한 그 참모들과 더 화끈하게 로비를 강화하는 거고. 그러면서 자기네 사장이나 임원으로 있는 사람들을 은밀하게 장관으로 미는 거야.(···)” 138쪽.
“아니, 그런 국회의원도 다 있소? 넙죽넙죽 제일 잘 넘기는 게 그 사람들인데.”(···) “아시겠지만 아주 칼칼한 여성의원들 가끔 있지 않습니까. 특히 소수야당에.” “아니, 그런 사람들까지 손댔단 말이오?” “예, 그때 급한 법안 통과가 있어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저런, 그럼 그 법 통과는 실패한 거요?” “그럴 수 있나요. 그 의원 나리 외국 시찰 나가시도록 손써 놓고 편안히 통과시켰지요. 혼자 그래 봤자 별수 있나요. 활동비만 궁해지는 거지요.” “그래요, 국회의원들 아무리 술수 좋고 수완 뛰어나다 해도 우리 당해 내기 어렵지.” 152-153쪽.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로 휴가비를 받으러 오는 그 잔챙이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은 거의가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아니, 뭐? 신문사 기자들이? 사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놀라움과 실망이었다. 그것은 신문 기자는 진실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고정 관념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기자들은 갖다 바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네 발로 와서 받아 가야 하는 최하급이라는 것 몰라? 아니, 기자가 최하급이라니.(···) 광고 때문이야, 광고. 우리 그룹이 무슨 일로 어느 한 신문에 괘씸죄를 씌워 1년 동안 광고를 중단시켜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대충 아시지? 어느 신문이고 휘청휘청 난리나 버려. 왜냐하면 우리 그룹 광고가 평균 15%를 차지하고 있거든. 그래서 신문사 사장들이 우리 회장님께 수시로 문안드리는 거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신문 기자들은 다른 분야에 비해 최하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 그렇게 쉽게 대해 버려도 어차피 나쁜 기사는 쓸 수 없는 형편이니까. 188-190쪽.
사람의 마음에만 있는 그 큰 수를 만 개나 비자금으로 감추다니. 다시 분노가 꼬약꼬약 괴어올랐다. 기업들이 이런 짓을 하라고 그 시절에 온몸을 던져 가투(가두투쟁)를 하며 화염병을 던지고 최루탄 가스를 마신 것이 아니었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민주주의 사회에서 경제도 제대로 운영되어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기를, 그런 세상이 반드시 오게 하겠다는 의지로 공부를 뒤로 밀쳤던 것이다. 그런데 한 기업인이 억을 만 개나 뭉쳐 혼자 배터지게 먹을 작정을 하다니······. 234쪽.
화염병을 앞세우고 가투에 몸 던졌던 그때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정치민주화’만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도 함께 꿈꾸었었다. 노동자들의 열성적인 노동에 힘입어 기업들이 성장하고, 기업들은 양심적으로 투명경영을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서 복지 제도와 함께 분배가 잘 이루어져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치민주화가 시급했기에 경제민주화를 함께 내세울 수가 없었다. 단계적으로 실천하자고 했다. 그 유보의 세월 속에서 기업들은 거대 공룡으로 성장한 것도 모자라 분배와 반대의 길인 비자금 꿰차기에 나선 것이었다. 250-251쪽.
그러나 그 사건은 예상했던 대로 시간만 질질 끌고, 수사하는 시늉을 하고, 세상의 관심이 흐려지자 무죄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고, 국민경제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김없이 이 문구가 들어간 판결문과 함께. 남의 일은 사흘 지나면 다 잊어버리다,는 말처럼 해가 지나 버린 그 사건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처음 그 사건이 터졌을 때의 뜨거움과는 정반대의 차가운 침묵이었다.(···) 분명한 것은 대중들의 반응이 그렇게 되풀이되는 한 재벌들의 그런 비리는 끝없이 계속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264-265쪽.
“당신, 농담으로라도 영감탱이, 영감탱이 하지 말아요. 회장님은 진짜 우리의 은인이고, 하느님이시잖아요. 회장님이 아니시면 우리의 이 행복을 누가 주겠어요. 실없이 그런 말해 버릇하다가 당신이 어디서 정말 실수할까 봐 겁나요.”
그녀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녀는 30억 앞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는 회장님을 향해서 그녀는 늘 그렇게 신앙적 경배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장님은 그녀의 여자다운 옷사치에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온갖 사치의 욕망과 무한한 안락의 추구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해 주는 전지전능한 해결사였던 것이다.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종교의 신에 비해 회장님이야말로 생생히 살아 있는 신이 아니신가. 287쪽.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 왜 그런 사태가 거듭 벌어지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 망칠 그 거대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봉그룹이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주인이고 이 사회의 주인인 국민과 대중들이 그 끔찍한 사건을 방관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고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우리가 그 어리석은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기업들은 더욱 신바람 나게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간다. (322-327쪽)
우리는 지난 80년대에 피 흘려 ‘정치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모든 재벌들이 그 어떤 불법 행위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를 뽑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소비자로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권한인 ‘불매’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을 적극 벌이는 것이다.(···) 투표가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이듯이, 우리가 단결한 불매운동은 기업들과 우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다. 326쪽.
정작 경제민주화실천연대의 고발 건은 수사를 하는지 마는지 뜨뜻미지근하고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사흘이면 남의 일은 다 잊어버린다는 그 말을 다시금 입증해 주듯이 한동안 끓는 물 넘치듯 시끌벅적 왁자지껄해 대던 사람들의 입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속이 터지는 경제민주화실천연대에서만 어서 빨리 수사를 진행하라는 시위를 검찰청 앞에서 날마다 벌였다. 그러나 그건 법에 저촉되는 것을 피한 1인 시위였다. 그 침묵의 외로운 시위는 저마다 바쁘고 지친 도시인들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346-347쪽.
우리는 흔히 국민을 나라의 주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그 그럴듯한 말을 틀림없는 진실인 것처럼 꼭 믿게 해주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투표권 행사. 남·여·유·무식을 불문하고 누구나 한 표씩인 권리. 그 권리는 법 앞에 만인 평등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것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다. 선거는 지배 계급에게 주기적으로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정당성을 선사해 주는 제도일 뿐이다. 프루동의 말이다.(···) 그들의 배신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또 다른 감시와 감독 조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시민단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는 5만여 개에 이르는 시민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모든 권력 기관들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감독한다.(···) 그런 튼튼한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는 굳건해지고, 국민들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순수하게 국민 개개인의 돈으로 운영된다. 국민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 일정액의 회비를 낸다. 그 회비가 시민단체들의 맥박을 뛰게 하는 피가 된다. 그들은 하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여러 개의 시민단체에 가입해 후원하기도 하고, 직접 자원봉사에 나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들의 그런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모습은, 민주주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거저 주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힘을 합쳐 가꾸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시민단체가 몇 개나 있을까. 대충 2만여 개이지만,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단체는 2백여 개를 넘지 못한다.(···) 국민들의 참여 부족, 무관심 때문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속력 강한 회원들로 이루어진 5만여 개의 시민단체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수많은 눈들로 정치권을 감시하고, 경제권을 감독하고, 법조계와 공직 사회와 언론계를 눈 부릅뜨고 지켜야만 비로소 전 사회는 맑고 깨끗해져 선진국의 문이 열리게 된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다. 373-376쪽.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과 법조계, 우리 기업과 언론 사이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국민경제를 위하여······’ 하는 판결문이나 기사들을 정말 자기들을 위하는 것이라 믿을 뿐 아니라, 그 단순한 생각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반복됨으로써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 두 가지 효과가 합쳐져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업에게 배신을 모르는 자발적 복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416-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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