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철학

[밑줄] 박가분,『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두괴즐 2011. 6. 25. 10:20

[밑줄긋기] 박가분,『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 문화비평


 근대 소설의 시점은 발화주체 개개인이 내면화할 수 없는 ‘외부성’ 내지는 ‘타자성’에 대한 강렬한 반성적 인식을 수반하며, 바로 그 인식에서 도리어 소설적 자율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적 시점 역시 그의 세대가 겪었던 역사적 곤경에서 유래한다.

(···) 박민규라는 순문학 작가를 소비하는 소위 88만 원 세대 역시 이러한 ‘외부성’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결여를 안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들에게 ‘참여’나 ‘현실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소통하고 사고하는 ‘시점’과 그 ‘감성적인 기반’이다.(···) 88만 원 세대론을 소비하고 유통시키는 젊은이들 자신도 세대모순에 대한 사유를 개개인이 변경할 수 없는 역사적 한계와 구조적 모순으로 연결시키지 않은 채 단지 그것을 스스로의 라이프스타일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계기로만 전유한다. 217-218쪽.


 낭만적인 성장담이란 그런 식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서사를 공유하며 세계 각국의 독자들과의 공통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은 내면적인 공감에 그친다. 서로 다른 나라와 환경 안의 성장과정들 이면에 있는 역사의 구조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의 화자가 그를 둘러싼 고유명을 다루는 화법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소설들에서는 확실히 풍속적인 ‘고유명사’들이 범람하지만 그것은 사실 몰역사적인 ‘풍경’에 불과하며, 낭만적 공감을 가로막는 역사적 고유성을 은폐하는 기술적 장치로 복무한다. 한 마디로 그것들은 심미적 배경으로 존재하며 다른 성장담의 배경과 얼마든지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러한 이름들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임의적인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234쪽.


 군부정권 하에서의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학생들은 얼마든지 두 선택지 모두를 거부하고 각자의 자폐적인 취미영역이나 자기 계발에 몰두할 여지가 있다. 이것이 그동안 시민사회 운동의 주축을 담당하던 학생운동이 오히려 시민사회의 어떤 영역보다 더 빠르게 탈정치화된 이유이다. 여기서 발리바르가 ‘시빌리테’, 즉 급진적 ‘시민권’으로 일컬은 그 무엇이 떠오른다. 그것은 운동의 폭발적인 봉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되던 해방적 연대의식을 제도적으로 물질화함으로써 그 경험에 제도적·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반인종주의 운동에서 경험된 시민적 연대는 단지 그 운동 속에서만 지속될 것이 아니라, 이민자들에게 마땅히 부여되어야 할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확장이라는 제도적 형태로 재기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운동에 의해 시작된 변화가 국가적·이데올로기적 영역에 간섭하면서 진정한 정치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빌리테=시민권’이란 운동과 제도 양자를 매개하며 시민적 권리에 물질성을 부여하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학생운동에서는 이 양자(운동과 제도)사이의 연결고리가 그 동안 빠져 있었던 것이다. 350-351쪽.



* 시사비평


 우리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모두 자본이 제공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생산해내는 사회적 일자리들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제3부문이 ‘이윤’에서 자유로운 만큼 시장 안에서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와 문화적 창의성이 발휘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 필요한 공공재를 산출하는 그러한 제3부문이 일종의 경제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자본제 경제 자체에 대한 완충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우석훈의 생각입니다. 실제로 유럽 각국에서 제3부문이 경제생산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이러한 경제 생태계 속에서 사회적 약자인 젊은이들이 학비와 주거비 걱정을 덜고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계획하고 실현시킬 기회를 얼마든지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

 사실 88만원 세대담론은, 그리고 그 선두에 있는 우석훈은 은연 중에 기존 진보정치의 거대담론을 생활정치의 구체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요구들(우석훈 표현대로라면 ‘당사자 운동’)로 변모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정치적 유혹이 이미 탈정치적 제스처의 맹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생활정치에서 이뤄지는 요구들이 지닌 의제들이 제아무리 급진적이고 단호하게 요구된다고 해도 실질적인 연대경험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소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는 구호들도 그러한 요구가 제기되는 연대의 지평과 함께 사유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그러한 요구의 주체들이 대중들 자신이 실질적으로 ‘급진화’되지 않는다면, 집단적 결정에 기반한 연대의 경험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제들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연대의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생활수준에서 경험하는 세대모순을 새로운 정치적 틀 속에서 재정식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가난하다’는 게 문제라면 오히려 자본가들과 관료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부모들에게 과감하게 ‘가난해져도 좋다’고 외치는 게 급선무이며, 그것이 더 타격이 클 것입니다.(···)우리가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앞으로 달라질 우리 사회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러한 파이를 거부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회적 연대의 토양을 확립하기 위해 지금 당장의 자격증과 높은 자리를 포기할 수 있는 우리 세대만의 고유한 ‘유토피아적’ 욕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412-4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