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철학

[밑줄] 알랭 바디우,『사랑 예찬』

두괴즐 2011. 6. 8. 22:38

 

[밑줄] 알랭 바디우,『사랑 예찬』.hwp

 


사랑예찬

저자
알랭 바디우 지음
출판사
길(박우정) | 2010-11-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왜곡된 우리 시대 ‘사랑’의 자화상과 바디우의 ‘사랑’ 철학남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밑줄] 알랭 바디우,『사랑 예찬』

 

 

  누구나가 갖고 있는 공통된 취향이 사랑이며, 사랑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저들의 삶에 그 밀도와 의미마저 부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제 입장에서 볼 때, 위험이 부재하는 체제에서 존재에 부여하는 이런 '증여'는 결코 사랑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7)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다는 확신이 매우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에 대한 하나의 반증(反證)일 것입니다. 서로의 이익만을 챙길 단순한 교환처럼 인식되지 않으며, 미리 수익성을 기대하고 진행되는 투자처럼 장기간 계산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27)

 

   사랑은 이러한 시도들 가운데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예컨대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되어 세계를 경험하게 될 때,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동일성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고, 체험된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또는 아이의 탄생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타의 것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2)

 

   사랑은 항상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저는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만남에 하나의 사건, 다시 말해서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속하지 않는 무엇에 사회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가장 강력한 이원성과 가장 극단적인 분리를 경유하여 사랑의 대각선처럼 교차되는 측면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두 가지 차이들의 만남은 하나의 사건, 우발적이고도 놀라운 어떤 것, “사랑의 놀라움들”, 심지어 연극이기조차 합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출발하여 사랑은 시작되고 도입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서 아주 근본적이라 할 첫 번째 지점입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전적으로 세계에 대한 경험인 하나의 과정을 연동시켜버립니다.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40-41)

 

   사랑의 낭만적인 개념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며, 다소간 이 개념은 만남에다 사랑을 소진시켜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만남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바로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이렇게 전개될 때 우리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입니다.(···) 낭만적 신화 속에는 이러한 융합의 지점이 빈번히 죽음으로 귀결된바 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남의 예외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그 순간 속에 사랑을 소진해버린 나머지, 그 이후 관계의 외부에 남아 있는 세계로는 더 이상 진입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급진적이고 낭만적인 사랑 개념이며, 저는 이 개념이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는 놀라운 예술적 매력이 존재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개념은 심각한 실존적 위험을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사랑은 만남으로도 환원될 수는 없는데, 이는 사랑이 구축이기 때문입니다. (41-43)

 

   사랑에 관한 사유에서 불가사의한 것은 바로, 사랑을 완수할 그 기간에 관한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시작되는 그 순간의 황홀감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43)

 

   저는 사랑이, 예컨대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제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컫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단순히 말해서 이 진리는 둘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시련을 받아들이고, 지속될 것을 약속하며,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의 경험을 수용해나가는 모든 사랑은 자기고유의 방식으로 차이에 관한 새로운 진리 하나를 생산해냅니다.(···)

 이 사랑 이야기들이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는 사랑에 보편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보편적인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랑이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것과 연관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51-52)

 

   사건의 구조 안에 등재하는 것이 바로 선언을 통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연은 어떤 주어진 한순간에 고정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우연이 지속성을 촉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핏 무의미해 보이지만, 한편 소소한 삶의 근본적인 사건은 끈질기게 지속됨으로써 보편적인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53-54)

 

   사랑을 선언하는 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더 이상 처음 시작되던 때처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닌, 실제로 하나의 필연처럼 등장하는 세계의 경험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연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며, 일종의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랑의 선언은 필연적으로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고 산만하며, 혼동스럽고 복잡하며, 선언되고 또다시 선언되며, 그런 후에조차 여전히 다시 선언되도록 예정된 무엇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55)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56)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지속성의 고안 속에서, 한 세계의 탄생 속에서, 나날 이후의 나날로 인해 극복된 만남의 우연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57)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59)

 

   하나의 지점이란(···) 하나의 진리를 구축하는 과정들이 당신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선언했던 최초의 순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근본적인 선택을 갑작스레 다시 취할 수밖에 없게끔 당신을 강제하는 그런 순간을 말합니다.(···) 사랑의 경우, 빈번하게 그리고 급박하게, 사랑의 선언을 다시 해야만 합니다. 지점을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 아이를 갖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탄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이는 사랑에서 하나의 지점이라는 형태로 사랑의 과정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아이는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둘을 아이 주위로 재편성해야만 할 것입니다.(···)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이기도 한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61-62)

 

   사랑에서는 두 사람이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치에서는 다수로, 게다가 대중 속에서 우리가 평등을 창조해낼 수 있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66)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 (71)

 

   사랑이라는 주제를 정치적 열정과 뒤섞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는 증오를 통제하는 문제이지 사랑의 문제는 아닙니다. 증오는 거의 필연적으로 적에 대한 물음을 촉발하는 열정입니다.

 따라서 적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는 정치에서 우리는,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이건 간에, 조직의 역할들 가운데 하나가 증오에서 파생되는 모든 효과를 통제하고 취소하는 데 놓여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79-80)

 

   사랑은 진리의 절차가 모두 그러하듯이,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떠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가치는 오로지 그 자신 속에 머무르며, 이러한 가치는 사랑과 결부되어 있는 두 개인의 즉각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81)

 

   오직 예술만이 사건들의 강렬한 힘을 완벽하게 복원하고 또 복원하고자 시도할 뿐입니다. 오직 예술만이 어떤 만남, 어떤 봉기, 어떤 소요인 것을 감지하는 그런 차원을 복원해냅니다.

예술은 제 모든 형식 속에 사건 그 자체를 담아내는 위대한 사유입니다. (88)

 

   기적적인 만남의 순간은 사랑의 영원성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저는 덜 기적적이면서 훨씬 더 ‘힘들여 노력하는’ 영원성의 개념, 다시 말해 단계별로 집요하고 끈덕지게 이루어진 시간적 영원성의 구축, 둘의 경험의 구축을 제안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단지 기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는 주된 업무도 있는 것입니다. 늘 활동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며, 주의해야 하고, 저 자신이나 타자와 함께 결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형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힘들여 노력한 일의 내재적 보상으로서 바로 행복이 존재하게 됩니다. (90)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며(···)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러한 폭력을 경험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몸을 복종하게 만들고 거대한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입니다. (95)

 

[밑줄] 알랭 바디우,『사랑 예찬』.hwp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