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철학

[밑줄]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두괴즐 2011. 6. 25. 10:34

[밑줄긋기]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제 1장 60년대 안보투쟁과 전공투운동


 그러나 메이지 이래 일본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국가나 네이션은 명확히 능동적인 주체로서 존재합니다. 사실 일본에서 자본주의경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일본제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국가에 의해 시작되어, 이후 민영화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험에서 보면, 국가나 네이션을 그저 표상이나 상부구조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환상이나 표상이라면, 계몽에 의해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나 네이션은 단순히 환상이나 표상이 아니며, 그 자체(경제적인)의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이 상품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p.31-32(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또 그때까지는 계급투쟁이 중시되어 젠더나 마이너리티와 같은 문제는 2차적·부차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68년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부정되었습니다. 또 국가와 같은 매크로의 정치나 권력이 중시되고 있었음에도, 마이크로한 권력 또는 micro politics라는 영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것은 68년 이후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전환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매크로한 차원, 국가나 네이션이라는 차원을 간단히 정리하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한 명이 푸코이지요.(···)

 이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투쟁의 역점이 계급문제에서 페미니즘·게이, 그 밖에 마이너리티의 문제로 이행했을 때, 이런 관점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국가에 관한 견해를 왜곡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람시도 그렇지만,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성립한 것은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계속적으로 지배함으로써입니다. 공동체가 확대되어 국가로 바뀌거나, 그 내부에서 계급대립이 발생하여 국가가 생기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한 권력에 대해 푸코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이크로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며, 매크로한 권력인 국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내부로부터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면 국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즉 일국이 어떤 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것은 바깥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서로 그렇습니다.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으면, 국가의 의지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네그리와 같은 사람들, 말하자면 ‘68년’타입에는 국가론이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국가를 내부에서만 보게 됩니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부정하는 것도 간단해 보입니다.(···)

 나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이 아니라, 양쪽의 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p.33-36


제 2장 사상가로서의 길


 자본주의 경제는, 말하자면 상품교환이라는 하부구조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상부구조로서 존재합니다.(···) 어떤 상품이 실제로 팔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서는 다음 생산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팔렸다고 생각하고 일을 진행합니다. 그때 어음이 사용됩니다. 이것이 신용입니다.

신용에 의해 교환이 증대되고 확대됩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신용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수한 신용강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일단 터진 곳이 생기면 덜컹거리게 됩니다. 그것이 ‘위기’(공황)입니다. 신용에 기초하는 버추얼한 세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 자본주의가 붕괴할 리는 없습니다. 불황이 될 뿐입니다. 그 사이에 불량기업이 도태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호황으로 향합니다. 자본주의에는 그런 ‘경기순환’이 불가피하게 존재합니다. p.46-47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는 공황은 자본주의의 붕괴, 사회주의의 도래를 가져온다고 생각했지만, 우노 고조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본론』에 씌어져 있는 것은 공황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의 필연성이나 사회주의의 필연성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상품’이라는 특수한 상품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공황이나 불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노는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주의는 윤리적인 문제이다, 즉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가 실천적(윤리적)인 문제라는 우노의 사고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p.48


지금처럼 공황이 일어나면, 갑자기 당황하여 자본주의가 끝나느니 하며 허둥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자본주의가 자동적으로 끝날 리는 없습니다. 국가와 자본은 어떻게든 계속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p.49-50


‘부정의 부정’을 계속 해간다고 해도 어떤 이념이 없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말하는 마르크스에게 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억지로 실현하는 것과 같은 설계적인 이념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칸트에게서 배웠습니다.

 (···) 구성적 이념은 현실화되어야 하는 이념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실현될 수 없지만 지표로서 존재하고, 그것을 향해 서서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가 부정한 것은 구성적 이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헤겔의 체계는 이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고 있기 때문에 구성적 이념과 같습니다. 이런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고 앞으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공산주의를 놓습니다. 이것이 통속적 마르크스입니다.(···) 소련의 사회주의를 보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성의 구성적 사용’이자 이성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과 ‘규제적 이념’까지 부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성적 이념을 휘두르다 스스로 좌절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이념 일반에 대한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그러한 것입니다. p.71-72 


이성에서 생겨나는 이성 고유의 가상이 있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나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흄이 말한 것처럼, 동일한 ‘자기’따위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와 같은 가상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통합실조증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가상은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합니다. 칸트는 이와 같은 가상을 특별히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념도 초월론적 가상입니다.(···)

 (···) 선진국의 인텔리는 이념을 이야기(가상)라 하여 시니컬하게 비웃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로 다른 이념(가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념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전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념이 끝났다고 냉소하는 인텔리는 결국은 냉소당하거나 망각됩니다. p.72-73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코뮤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가 불가결했던 것입니다. p.74


나는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윤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는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일까요? 경제적 성장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로 충분하지요. 실제 빨리 풍요롭게 되고 싶다면 그쪽이 낫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도덕(윤리)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자발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서로 타인을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득이합니다.그러나 타인을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상대를 목적(자유로운 존재)으로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p.75-76


 1990년대에 일본에서는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체제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비평공간』을 하고 있는 동안, 그것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무력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비평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운동을 개시하려고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p.85


노동자와 소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노동자가 소비라는 장에 설 때에 소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그들이 가장 약한 입장인 생산지점만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의 입장에서 싸워야 합니다. 거기서 내가 생각한 것은 노동자/소비자의 운동을 창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운동과 소비운동을 결부시키는 것그것이 하나입니다.

둘째로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데, 소비자=노동자로서 국가나 자본에 대항함과 동시에, 그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지내는 경제적 어소시에이션(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지역통화·신용체계)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래 국가권력을 잡아 실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가능합니다. 물론 부분적·지역적인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결국 국가에 의존하는 사회민주주의가 될 뿐입니다. p.93-94


 그러나 9·11에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은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문제입니다.

아나키스트도 마르크스도 국가를 그 내부만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사회로부터 국가가 생겨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네그리나 하트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사회의 공공적 합의하에 두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사회를 따르는 일은 없으며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회 내부로부터가 아니라 다른 사회 또는 국가에 대하여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내부에서 정리를 하더라도 바깥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약점은 오히려 그가 아나키스트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가의 본질과 기원으로 말하자면, 국가는 처음부터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국가와 무관하게 일국만의 국가 지양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칸트의 ‘영구평화’쪽이 국가 지양이라는 과제에 육박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p.97-99


 초기 마르크스는 헤겔의『법철학강의』비판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경우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구조를 하부구조로 삼고, 네이션과 국가를 상부구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부구조에서 모순을 해소하면, 자본제 경제를 폐기하면, 네이션이나 국가도 폐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나 네이션이 항상 마르크스주의의 걸림돌이 되어왔습니다. 네이션과 국가는 상품교환과는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p.100-101


제 3장 현상분석


 파시즘이라고 하면, 대중을 탄압하는 억압적 체제라는 관점이 취해집니다만, 그것은 후진국의 독재체제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파시즘은 오히려 대중의 압도적 지지에 의해 실현된 것입니다.

 또 파시즘이라고 하면, 반유대주의나 군국주의 또는 침략주의와 결부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원조 파시즘인 이탈리아는 반유대주의도 침략전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시즘을 사회주의에 대한 ‘대항-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주의와는 다른 형태로 계급적 대립을 해소하는 혁명입니다. 그것은 네이션에 의한 혁명입니다. p.110-11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경제적 반복성이 아니라, 국가 자체에도 반복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국가를 자본과 마찬가지로 능동적 주체로서 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반복강박적 구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와 반복이라고 말할 때, 국가에 고유한 반복성과 자본에 고유한 반복성을 동시에 고찰해야 합니다. 국가와 자본은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p.119


자본주의는 끝났다, 한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은 M-C-M'라는 운동에 의해 자기증식을 하는 한, 자본입니다. 자기증식을 위해서는 차이(잉여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자본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국가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종언은커녕, 앞으로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린(환경)산업과 같은 것으로 만성불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방법은 전쟁과 같은 것이 됩니다. p.130-131


 물론 네그리와 하트는 아메리카가 제국이란 견해를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에서 ‘제국’이란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의 제국’이라는 것입니다. ‘제국’이란 ‘세계시장’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본에 관해서도 국가에 관해서도 이것은 매우 단순한 관점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자본, 하나의 국가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 간의 경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국(一國) 안에서만 보고 있으면 국가를 알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 자본은 다른 자본과 경쟁하고 있으며, 국가 또한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합니다. 그것은 복수의 국가를 포함한 ‘세계=제국’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제국 바깥에는 다른 세계=제국이 존재합니다.(···) 세계=제국이라는 것은 하나의 경제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의 세계시장은 그와 같은 세계=제국의 연속입니다.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세계시장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수의 자본, 다수의 국가나 제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의 ‘제국’과 같은 것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고아라시: 네그리와 하트의 관점은 1848년『공산당선언』의 인식과 닮아 있지 않나요? 세계시장의 ‘보편적 교통’하에서 민족과 국가의 차이는 무화될 것이다. 그 가운데 자본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란이 시작된다. 그것은 세계동시혁명이다. 다만 네그리 등의 경우, 프롤레타리아트 대신에 multitude(다중)의 반란이지만요.

가라타니: 그렇지요. 그들이 혁명주체로서 다중을 들고 오는 것은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보다 의미가 넓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중은 어중이떠중이이기 때문에 누구든 들어갑니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하다면 왜 그들은 알카에다나 그에 상당하는 이슬람운동을 다중의 반란으로 간주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을 말하면, 그냥 다 정리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말하는 쪽이 더 낫습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p.132-134


 네그리 등이『공산당선언』(1848)의 인식과 닮아 있는 것은 그들이 68년 사상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68년은 1848년에서 보아 정확히 120년 후가 됩니다. 예를 들어, 월러스틴은 1968년의 혁명을 1848년의 혁명에 필적하는 세계혁명으로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68년의 세계혁명은 정치적 권력 획득을 노리기보다도 좀더 근본적인 반시스템운동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그점에서는 1848년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권력이라는 의미로는 패배했지만, 그 결과로서 각국에서 보통선거·노동조합의 합법화·복지정책이 진행되었습니다. 1968년의 혁명에서는 1848년 혁명 시기에 존재했던, 그러나 그후에는 억압된 초기 마르크스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주의·유토피아주의가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1848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1848년의 혁명은 민족이나 국가의 무화는커녕, 프랑스(보나파르트)나 프로이센(비스마르크)에서 국가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초래했습니다. 1871년의 보불전쟁이 48년 혁명에 대한 답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서 생겨난 파리코뮌은 48년 혁명의 마지막에 불타오른 불꽃과 같습니다.

 1968년 후도 마찬가지입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 공공연히 신자유주의=제국주의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하여 네그리와 하트는 다시 68년을, 하고 있지요. 세계동시혁명이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글로벌리제이션하에서 네이션=스테이트(국민국가)라는 틀은 이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국의 다중이 동시에 반란을 일으킬만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표적을 빗나간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확실히 제국주의 시대에는 네이션의 계기가 내버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은 자국의 노동자를 버리고 타국으로 향합니다. 복지를 삭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를 해소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바로 국가와 자본이 다른 국가나 자본과 경합하기 위해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유럽연합(EU)처럼 국가가 주권을 제한하여 연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약체화가 아닙니다. 근대의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실은 소수의 대국에만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나라는 다른 국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고래로 국가는 존속하기 위해서라면 연합이나 종속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유럽연합]은 세계자본주의(세계시장)의 압력 하에서 국가들이 결속하여 ‘광역국가’를 형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p.134-136


 제1차 대전에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결국 전쟁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습니다. 그에 대해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혁명으로’를 주창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로서, 국가가 파탄이 난 상태에서 권력을 잡는 혁명보다 국가가 전쟁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반전운동 쪽이 훨씬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입니다.(···)

국가의 전쟁을 저지하는 것은 국가를 지양하는 것과 거의 같습니다. 세계동시혁명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전쟁을 저지하고 군사적 주권을 제한해가는 국제연방을 형성하는 것은 점진적인 세계동시혁명입니다. 물론 국가에 맡긴다면, 이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가를 꼼짝 못하게 하는 데에는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가 강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p.147


만성불황에서 국가에 의한 원조나 개입을 바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입니다. 그것은 타국을 생각하지 않는 보호주의가 됩니다.(···)

그에 대항하여 나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은, 또 자본주의적인 경쟁에서 벗어난 곳에서 어소시에이션의 경제를 만들 것을 주창했습니다.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 workers collective(노동자조합)과 같은 기업, 그리고 지역통화와 금융입니다. p.149


 현재의 일본은 국가관료와 자본에 의해 완전히 컨트롤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럼 전제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마디로 말해,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입니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두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의회선거가 있기 때문에 데모로 정국을 바꾸는 것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의제만으로는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데모와 같은 행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p.158-160


어소시에이션의 전통이 있는 곳에서 인터넷은 그것을 조장하도록 기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 데모가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어소시에이션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것. 일본에서는 이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단독자)은 그 안에서 단련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좀더 ‘사회’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p.161-163


제 4장 문학이야기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말한 것은 특별히 ‘문학의 종언’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특수한 문학, 그보다는 특수한 의미를 부여받은 문학의 종언입니다. 문학을 특별히 중시하는 시대의 종언입니다. 그것은 문학비평의 종언이기도 하지요. 문학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무언가가 가능했던 시대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예술영역에서도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대에는 예술에 특별한 가치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국민국가에 불가결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보호할 것입니다. p.168-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