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이택광,『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제1장 마르크스를 죽여? 살려?
알랭 바디우나 지젝은 오늘날 철 지난 것처럼 보이는 ‘공산주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 공산주의 또는 현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상이었다.
(···)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순수 의식’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근대화 이후의 ‘한국성’과 유교는 거의 관계가 없음에도, 대개 한국 사람들은 한국은 유교적인 국가라고 생각한다.(···) 이 무관한 관계를 매끄럽게 이어놓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고, 이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출하는 방식이 이데올로기의 판타지이다. 31-32쪽. (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비밀은 ‘가치형식’의 전도라고 할 ‘화폐형식’에 있었다. 마르크스가 말한 “바로 선 헤겔 변증법”은 화폐형식의 내면이라는 것이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경제학의 원칙을 허문다. 마르크스의 손을 거쳐 이제 정치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폭로당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불가피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상품이 거짓’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물질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치형식과 화폐형식이 어떻게 그 상품 자체의 가치로 둔갑할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34-35쪽.
『자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상품의 무가치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이르러 상품의 가치가 일괄적으로 화폐형식을 통해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사물관계를 물신화한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선행 봉건적 인관관계의 물신화를 해체한다. 물론 이 해체의 결과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사회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재편이 모종의 은폐를 전제로 한 것임을 밝힌다. 겉으로는 노동자가 예전의 농노처럼 고용인에게 고용되어서 정당한 임금을 받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런 관계는 ‘무산자’와 ‘자본가’의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여기에서 거래되는 것은 바로 ‘노동력’이라는 전혀 새로운 범주의 상품이다. 마르크스가 폭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실, 죽었다 깨어나도 노동자는 영원히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는 근본적 불평등 관계이다. 노동자는 굶어죽을 자유까지도 보장받은 자유인으로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사회의 본질이다. 36쪽.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문제 삼는 것은 이처럼 지배계급의 관념이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재현’된다는 점이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정치 팸플릿에서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기계적으로 정치경제적인 조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차원에서 물질적인 토대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런 토대의 결정성에 대해 다소간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말하자면 상부구조에 속하는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토대의 법칙을 위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56쪽.
그람시는 지배계급이 단순하게 힘으로 통치력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지적이고 도덕적인 리더십을 통해서 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낸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지배체제가 성공하기 위해선 권력, 경제,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장악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들이 작동하는데 필요한 조직이 바로 정부, 가족, 학교, 교회, 법정, 노동조합 등으로, 정치 조직과 시민사회를 통해 체제가 작동한다는 것이 그람시의 견해이기도 하다. 이 말은 결국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발적인 동의와 더불어 강제적인 국가 권력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요약하면, 그람시는 이데올로기를 민중을 통합시키는 관념, 믿음, 재현, 실천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는 헤게모니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게모니는 계급이나 정치집단 등 사회정치 단위 사이에서 발생하는 알력 같은 것인데, 이 개념은 개인들이 단순하게 정치를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만들어내고 자신들을 위치 짓는 조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계급으로 통합되어 나타나는 게 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일상적인 것이고, 민담처럼 민중의 생활방식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담론’이다. 57-60쪽.
알튀세르는 두 가지 주요 개념을 합쳐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개념을 창안했다. 첫째는 민중을 자율적 주체가 아닌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개체로 봤고, 둘째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을 엄밀하게 구분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심리의 산물이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규정하는 유사 물질적 조건으로 보았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기보다 외부에서 그것을 주입시키는 거푸집 같은 것이다. 이를 그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라 불렀는데, 가령 교회, 학교, 노동조합 등을 가리킨다.(···)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으로 개인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 현실과 맺는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사회에서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지속하는 한 영구적으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알튀세르가 정의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개념은 이데올로기를 과학과는 다른 것으로 본다.(···)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본다면, 방법이나 이론의 타당성은 그저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과학의 진리와 관계없다. 61-63쪽.
마르크스는 페티시즘에 대해 “인간의 두뇌의 산물이, 독자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그들 간에 또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진술한다. 한마디로 자립적이지 않은데, 혼자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품화가 만들어내는 효과인 셈이다.(···) 물화는 말 그대로 “사물로 만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물은 ‘객관’을 의미한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바로 물화 현상의 표본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사용가치나 가치를 규정하는 요소들의 성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상품의 가치는 바로 하나의 상품을 다른 상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그 관계에서 발생한다. 69-70쪽.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이 상품과 욕망의 관계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소유자는 누구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에 대해서만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려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은 상품이고, 욕망이다. 72쪽.
제2장 보수적인 리비스주의 비판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론 논쟁이란 대체로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력’을 겨루는 일에 불과하다. 엄밀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 결국은 외국어 능력 테스트로 끝나버리는 논쟁의 양상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현실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할 순간에 텍스트로 도망가서 상대방의 ‘학습 수준’을 거론하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론은 이렇게 위급할 때 위기를 모면하는 대피소가 아니라, 전장을 함께 누벼야 하는 무기다.(···) 무기는 같을지 모르나, 내 손에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나만의 무기로 다시 태어나야 제대로 이론을 다룰 줄 안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이다. 86-87쪽.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이론에 대한 반성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실천의 문제다. 이 문제는 이론의 제도화와 상품화를 전제한다. 후기자본주의는 이론을 대학 담론으로 전락시키고 이론 자체를 고급한 지적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 문제는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재정위하는 것이다. 이론을 이론에 머물게 하는 자기 지시적 수용 방식에서 이론은 무기력증을 키워왔다. 문제는 이론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론을 수용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이론은 수용 자체에서 문제의식을 새롭게 생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93-94쪽.
제3장 무언가를 교란하는 정치적 기획의 탄생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주의와 헤겔주의를 결합하고자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체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생산해냈다. 처음에 폭압적으로 복종을 강요받던 주체가 나중에 자발적으로 복속을 자청하는 경우를 마르쿠제는 지적하고 있다. 이른바 협력과 동화의 과정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사회는 복속을 재생산해낸다. 105쪽.
민주화 이후의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생명정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라캉주의적 기획과 조우할 수 있다. ‘자발적 복종’의 극복이라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급진화에서 중요한 사안인데. 무의식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정동affect1)와 주이상스2)는 끊임없는 권위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묻기’에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도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라캉주의적 정치기획이 제시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을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윤리학”이다. 윤리학으로 변주되는 주이상스의 문제야말로 라캉주의 정치기획에서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라캉주의 정치학의 지향점은 권력과 권력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주이상스의 변증법을 재정향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이며, 이런 개입의 시도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정체성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독특하게’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108-109쪽.
제4장 벤야민, 프로이트와 손잡다
제임슨은「이론의 징후들 또는 이론을 위한 징후들?」에서 이론과 철학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시도하며 “이론은 철학의 보완으로 시작됐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완은 철학에게 전혀 의심의 대상이지 않았던 ‘언어’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또 여기에서 언어비판이라는 함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다. “오늘날 비판이라는 것은 언어와 그 형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임슨의 진술은 이론과 철학의 구분이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지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17쪽.
괴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은 폐허이고 토르소torso이다. 예술작품이 폐허라는 말은 언제나 역사의 개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완전한 형식이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119쪽.
벤야민은 이런 관점에서 ‘아름다움’이란 진리내용이나 물질내용 중 어느 한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내용과 물질내용 그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 자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비평은 주석이나 비판이라기보다, 이 긴장 자체를 에누리 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이데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이데아를 발굴해내기 위해 형식을 해체해버리는 순간 아름다움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근대 예술의 딜레마이지만, 동시에 근대 예술미의 조건이기도 하다. 122쪽.
지멜의 주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갖지 않는 “무차별적 법칙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법칙성은 인간의 주관을 통해 형성되는 가치와 의미에 판단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이 통합되는 그 지점, 주관이 객관을 가치화하고, 객관이 주관을 판단하는 이 지점에서 ‘문화Kultur'가 발생한다. 125-126쪽.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적 계급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이 혁명적 계급이 꿈속에 잠겨 있는 한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적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속성이 아니라 이 속성이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벤야민에게 중요한 것은 무의식 상태라기보다 ‘아직 의식되지 못한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 가질 수 있는 의식성이다.(···) 벤야민에게 변증법은 이렇게 사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충격의 순간이다.(···) 역사의 정치화는 꿈의 심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꿈의 신화를 재구성하고 독해하는 것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게 벤야민의 주장이다. 신화와 신비주의를 벗겨내기 위해 꿈은 해석되어야 한다. 127-130쪽.
벤야민은 도시라는 공간에서 탄생한 근대적 주체, 만보자에 주목한다.(···) 만보자는 근대를 통해 출현한 무신론적 과학적 주체를 의미한다. 이들은 세계를 관찰 또는 구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존재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추구를 찬양한다. 이런 근대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만보자이다.(···) 벤야민은 만보자의 한가한 눈길과 발길을 붙잡은 것으로서 아케이드를 지목한다.(···) 근대 예술가의 존재 방식이 변화해음을 보여주는 ‘형식’이 바로 만보자인 것이다.(···) 벤야민에게 만보자는 ‘시인’이라기보다 ‘수집가collector’에 가까운 존재이다.(···) 거리는 “수집을 위해 거주하는 장소”이다.(···) 벤야민은 만보자를 새로운 지식 생산자로 보고 있다.(···) 벤야민의 지식은 정확하게 말해서 “번개처럼 오는 것”이고 이 지식이 교직하는 “텍스트는 번개로 이루어진 긴 두루마리”이다. 이런 지식을 만들어내는 힘은 바로 충격shock이고, 파국의 체험Erlebnis이다.(···) 벤야민은 만보자를 끊임없이 도시로 이끄는 것을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충동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벤야민은 “진리는 의도성의 죽음Die Wahrheit ist der Intention”이라고 주장한다. 즉 진리는 주체의 바깥에서 개입하며, 그렇기에 경험적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무엇이다. 오히려 역으로 경험적 현실이 진리를 향한 힘을 통해 결정된다.(···) 이 만보자는 듣고 본 것을 다른 이에게 ‘입’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꾼이다.(···) 벤야민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경험이야말로 모든 이야기꾼들이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진술이 염두에 두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예술 실천이라는 사실이다.
(···) 벤야민에게 만보자는 새로운 지식 생산자이자 동시에 작가이다. 이 작가는 “삶의 구성이 확신보다는 사실에 더 연관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비극적 주인공이다. 이 주인공은 현실로부터 ‘비평’을 확보함으로써 정체성을 획득한다.(···) 만보자는 이런 가상에 현혹당해 일렁이는 가상에 도취되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다.(···)
만보자가 수집한 것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실내Interior’다.(···) 이 실내라는 고요한 사적인 공간은 언제나 외부의 거리와 군중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다. 거리와 주거의 상호 침투.(···) 아케이드는 실내의 외부이면서 동시에 외부로 드러난 실내이기도 하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이런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도시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라기보다 만보자의 독해를 기다리고 있는 텍스트이다.(···) 벤야민에게 만보자는 도시라는 텍스트를 읽는 ‘독자’이다. 132-139쪽.
제5장 헤겔, 라캉과 사르트르의 숨어 있는 1인치
정신분석 이론과 대립하는 의식철학의 핵심은 시각 중심주의에 있다.(···) 한스 요나스는 이런 시각 중심주의야말로 서구 철학사를 지배해온 특징이며 “그리스 철학부터 시각은 감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칭송받았다”고 진술한다. 요나스에 따르면, 시각은 “일반적으로 인식에 대한 모델이며 다른 감각기관에 대해 척도를 제공”한다.(···) 요나스는 시각 이미지에 우월성을 부여해온 서구 철학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꼽는데, 첫째 다양성의 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동시성, 둘째 감각의 연쇄 작용을 규정하는 인과성의 중립화, 마지막으로 공간적이고 심리적인 감각의 거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요나스의 지적은 결국 인식작용과 시각의 관계가 가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감각 중에서 시각에 우위를 두는 것은 자기 충족적이지 않은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을 절대시하는 ‘거짓 믿음’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시각은 “다른 감각과 기능의 보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145-146쪽.
라캉은 이런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독특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에게 시각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는 틈vein에 불과하다. 이 틈에 따라서 “욕망의 장으로 시선의 영역이 통합”된다.(···) 라캉에게 ‘이미지’는 욕망과 관련된 것이고, 실재의 귀환을 차단하는 무엇이다.(···) 라캉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상징계라는 비가시적 영역과 상상계라는 가시적 영역의 변증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반시각 중심주의anti-ocularcentrism라고 할 수 있다. 146-147쪽.
하이데거의 생각에 따르면, 존재가 열려야 그 속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다. 밝게 트인 존재의 공간이 우선이다. 빛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의 빛이 아니라 존재의 열림이다. 이처럼 존재와 사유가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리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가려져 있던 것을 드러나게 만드는 사유 자체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진리이다. 이것은 곧 망각에서 벗어나서 근원적 존재에 대한 사유를 상기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를 하이데거는 “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149쪽.
제6장 ‘무의식의 자식들’과 과학 쟁탈전
무의식에 대한 과학으로 정신분석학은 정상과학과 달리 존재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다. 176쪽.
칸트의 윤리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윤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병리적 쾌락의 대상, 말하자면 주이상스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이상스가 제거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상징적 거세”에 해당되는 법 앞에 평등한 주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주이상스는 민주주의적 윤리를 위해 억제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러나 라캉의 분석에 따르면 칸트의 윤리학은 근대 주체의 탄생에서 중요한 주이상스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칸트가 몰랐던 것은 주이상스야말로 주체에게 윤리를 성립시키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라캉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는 어디에서 판명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179-181쪽.
역사가 이데올로기적 오류 인식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밝혔다면 프로이트는 그 역사의 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개인이 기실은 텅 빈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의 이론을 전유해서 독특한 이데올로기론을 창안한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이념이나 신념 체계,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재현들의 체계”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구조다. 여기서 구조란 언어 체계를 의미한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존재의 진짜 조건과 주체의 상상적 관계다. 상상적 관계란 이데올로기라는 큰 주체에 작은 주체들이 귀속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튀세르는 ‘호명’이라고 정의하는데, 그가 말하는 큰 주체란 특정한 존재가 아닌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 즉 상징적 법이자 주인-기표와 유사한 것이다. 185-186쪽.
제7장 지젝이 부풀린 유물론이라는 빵
라캉은 1956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진행된 세미나에서 판타지를 외상적 에피소드가 출몰하는 것을 막아주는 “이미지의 정치”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서 거세 공포를 방어하기 위해 자아가 만들어낸 고정된 이미지가 판타지이다. 라캉은 판타지가 개별 주체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파악한다. 즉 개별적 판타지를 넘어선 근본적 판타지야말로 방어 기제와 주이상스의 관계를 수정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다. 이렇게 판타지를 분석하는 일은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대답 없는 물음을 끊임없이 해석할 수밖에 없는 주체와 큰 타자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208-209쪽.
알튀세르가 전제한 큰 주체가 너무 매끈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 지젝의 불만이었다. 지젝은 판타지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원용해서 큰 타자란 사실 작은 주체들이 날조해낸 것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큰 주체가 작은 주체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주체가 큰 주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지젝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판타지라는 개념은 단순하게 이데올로기+판타지가 아니다. 이것은 주체의 구성에 필연적 기원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 부재의 자리, 근본적 결여가 바로 주체를 불러내는 무엇이다.(···) 지젝은 이것을 실재라고 보았다. 210쪽.
제8장 유령이 되어 귀환한 데리다
데리다는「차이」에서 차이와 힘의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를 참조하면서 데리다는 차이를 “제각기 노는 활동적인 불협화음의 힘에게 부여해야 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 이 힘은 바로 곳곳에서 “문화, 철학, 과학을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문법의 체계”에 대항하는 범주다. 체계에 대해서 데리다가 강조하는 힘은 체계의 한계를 넘어가고, 그것의 강제를 해체하는 원동력이다. 229쪽.
데리다는 알튀세르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통해 볼 때, “단일한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유형, 리듬, 기입의 양식을 가진 역사들”이 있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입장에서 본다면, 텍스트 외부에 순수하게 존재하는 역사의 물질성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는 레닌의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외부에 있는 무엇을 밝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텍스트에 과잉결정된 기입의 구조(또는 주체의 관계 맺기)를 추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33-234쪽.
데리다가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마르크스 읽기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규정하는 것이 존재론이 아닌 위상학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정치철학은 존재론과 무관하다. 그에게 존재론은 “현재의 존재”에 집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것은(···) “미치게 만드는 것이고, 현전도 부재도 아닌 것”이다.(···) 데리다의 마르크스 읽기는 마르크스의 유령이라는 대체보충, 다시 말해서 도래할 것에 대한 약속으로서 현전하면서도 부재하는 정치를 불러내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존재론적이라기보다 다분히 ‘윤리적’이다. 데리다의 마르크스 읽기는 정치경제학적인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오류는, 일반적인 약속을 내포한 해방의 종말론을 특정한 약속의 성취를 전제한 정신적 신앙으로 전도시켜버렸다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도래할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으로서 데리다의 정치학은 “긍정의 힘”으로, 현전도 부재도 아닌 흔적으로 남는 효과를 묘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데리다가 평생을 추구한 해체의 다른 이름이다. 237-238쪽.
데리다는 존재론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유령론을 내세운다. 유령론은 서구 철학의 토대를 제공한 존재론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데리다의 유령론은 현재 존재하는 것, 말하자면 현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던 존재론에 의해 쫓겨난 것들을 철학적 주제로 삼는다. 존재론은 현전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은폐해버리는 행위야말로 유령이라는 사태를 촉발하는 계기라고 본다. 이런 까닭에 유령이라는 사태는 존재적이라기보다 존재하지만 현전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러나 유령은 망령처럼 결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이루는 근원이다. 유령은 스펙터클이다. 이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살과 피로 현전하지 않을 때 비로소 유령성은 가시화된다. 즉 존재가 현전하는 순간 유령의 사태가 발생한다. 환영은 유령의 현상성이다. 241-242쪽.
『공산주의 선언』의 첫 문장을 장식하는 유령은 데리다로 인해 세가지 가능성으로 읽힐 수 있다. 이 유령은 자본주의 체제가 은폐하고 있는 것들이 출몰할 가능성이자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이후를 예비할 새로운 체제의 윤리적 가능성이다. 이런 유령의 가능성들은 해방적 경험의 보편적 구조, 다시 말해서 메시아주의를 벗어난 메시아적인 것을 기반으로 지금 도래하고 있는 타자와 약혹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타자의 도래에 대한 기대야말로 메시아적인 것으로, 데리다는 이를 “보편적 구조”라고 본다. 그리고 이 구조 위에서 유령의 가능성은 미래의 자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43-244쪽.
제9장 먹기 힘든 네그리의 비빔밥
네그리는 정치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존재론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예술가는 “해방을 향한 물질적 욕망에 내재한 구성적힘”의 화신이다. 예술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해 전투를 감행한다. 이런 예술가를 지칭해서 네그리는 ‘급진적 정치학의 주체’라고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다중인데, 다중이라는 존재는 “공산주의를 향한 경향이자 실천적 활력론의 현재적 경험”이다. 253쪽.
네그리는 예술을 일컬어 ‘노동에 잠재하고 있는 창조성을 구현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하는데, 여기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결국 그는 노동에 내재하는 가치화되는 활동의 일환으로 예술을 규정하며, 예술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하고 있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만을 생산할 뿐”이라면, 네그리가 주장하는 예술의 창조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다중이라는 개념은 “정치적이기만 한 정치, 다시 말해 평등의 특질이 지닌 비일관성과 그것의 유효한 사례들의 우연적 구축 말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기초하지 않는 정치에 대한 혐오증”을 내포하고 있다. 259-260쪽.
가장 큰 논란거리는 정치를 ‘상상의 형이상학’으로 보고, 해방적인 예술의 창조력을 체현하는 주체로 다중을 파악하는 네그리의 공식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현실적인 것’에 대한 긍정에 있다. 여기서 네그리가 지칭하는 현실적인 것은 후기자본주의의 ‘현실성’자체이다. 말하자면 네그리에게 정치적인 것은 생산의 사회화 과정에서 인간의 현실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네그리는 노동의 긍정은 삶(생명) 자체에 대한 긍정이라고 주장한다.(···) 네그리는 다중을 지칭해서 자본주의를 초과하는 잠재성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정의는 사물의 현재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으로서 계급을 정의했던 청년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다르다. 정치적인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행위에 속하는 게 아니고,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부르주아 사회가 고스란히 몰락하는 것도 아님을 마르크스는 잘 알고 있었다. (···) 네그리는 ‘순수하게 창조적인 물질성’으로서 설정한 헐벗은 생명의 형식 없는 삶을 최고의 창조력으로 판단하고, 잠재성은 현실성의 변화뿐만 아니라 현실성 자체에서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 모순의 과정들을 다중이라는 존재론적 결론, 다시 말해서 역사의 한순간에서 도래할 잠재성의 발현과 동일시해버리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한마디로 다중만 출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 지점에서 현실정치적인 존재로 보였던 다중이 종말론적 메시아로 돌변한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에 과부하를 걸어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린다는 발상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에 개입하는 ‘의지’의 실현인 ‘주체’의 문제를 방기하는 또다른 형이상학일지도 모른다. 261-263쪽.
제10장 모든 지식은 감각이라는 DNA를 남긴다
랑시에르는 ‘보편 이론의 정립’을 주장하는 알튀세르에 맞서 이론적 수준에서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싸움을 위한 이론적 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음을 긍정했다. 270쪽.
혼란의 체제, 다시 말해서 “어떤 정치체제, 동일성에 대한 불확정, 말의 위치들에 대한 불인정, 공간과 시간의 분할들에 대한 무규정의 체제”가 곧 미학적 정치체제이고,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를 의미한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 체제를 ‘극장의 체제’라고 부른다. 275쪽.
미학적 차원이라는 혼동의 공간은 공통감각을 재배치할 수 있는 갈등의 분출을 보장해준다. 랑시에르는 갈등 이후 찾아오는 재배치의 문제보다, 어떻게 이런 갈등 자체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정치와 구분해서 ‘정치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276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정부주의적인 미학의 차원이 공동체의 의미로 ‘기입’되는 순간, 이 차원에서 얻어진 감각은 더 이상 미학적이기를 멈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앎으로 체계화되는데, 체계화라는 말은 랑시에르에게 ‘체제화’이기도 하다. 체제화는 윤리라는 공동체의 상식을 구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과잉을 기입하는 일종의 체제인데, 이 기입의 형태에 따라 인식과 사유의 방식이 결정된다. 이것을 일컬어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성원은 나눔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공동체로부터 ‘물려받은 감각’에서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출몰한다. 그리고 이 감각이야말로 미학적인 차원으로, 이것이 공동체의 몫을 주장할 때 정치적인 것이 발생한다. 이런 주장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랑시에르에게 정치의 방식보다 선행하는 것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에 대한 식별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정치가 오기 때문이다. 276-277쪽.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차원은 공동체의 윤리와 대립하는 것이다. 그에게 민주주의라는 절차적 제도는 공동체의 윤리를 체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민주주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개연성의 토대를 갖고 있지 않은 원칙”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이 원칙을 합의제에 기초한 정당정치라는 재현이 틀에 묶어두려 한다.
이러한 정당정치라는 제도로 수렴할 수 없는 과잉의 기입을 랑시에르는 데모스라 부르는 것이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윤리를 통해 분할당한 차이와 위계를 무화시키고 중성화하는 ‘차원’을 뜻한다. 이것을 랑시에르는 ‘미학적 차원’이라 부르는데,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이 차원은 부분집합의 재현이자 각 부분집합의 원소들을 고정시켜주는 국가로 수렴할 수 없는 공백의 출현이기도 하다. 284쪽.
몫 없는 자들이 전체로 전환되면서 공동체의 부분들을 셈하는 새로운 구도가 재구성되고, 이 새로운 감각적인 나눔의 체제가 출현하는 순간, 부화 탁월함이라는 소수의 자질은 값어치를 잃는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바로 이 전환의 틈새에서 언제나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285쪽.
랑시에르는 미학과 예술(행위)을 손쉽게 대립시키는 ‘반미학’에 대항해서 예술이야말로 미학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을 미학 담론으로부터 분리해내길 바라는 것, 그것은 내가 보기에 그저 예술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적절성의 논리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이며, 이런 맥락에서 미학은 결코 정서적인 게 아닌 인식적인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예술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체제”를 뜻한다. 290쪽.
랑시에르는 미학을 “취미판단과 관련된 사회 현실을 은폐하거나, 철학적 사변을 위해서 예술적 실천[예술 행위]을 왜곡하는 기생적 담론”으로 만들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폐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평과 예술행위가 뒤섞이는 그 지점에서 미학은 대상들과 경험 방식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사유 형태들을 식별할 만한 근거들을 제공한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예술 행위를 식별하게 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예술은 그 자체로 정의되는 자율적 실천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예술의 이름으로 미학의 월권을 고발할 수 있을, 그런 것도 아니다.”(···) 예술은(···) “예술이나 문학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하며, 어떻게 우리가 보아야 하며, 어떻게 우리가 읽어야 하며 그리고 무엇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지를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해방을 안겨준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무관심”은 노동자의 시선을 강제적인 노동과 지배의 자리로 결합시키는 ‘치안의 경제’를 전복시키는 ‘해체’를 유발한다.
이런 미학적 과정을 통해 노동자는 “기존의 자리들, 직무들 그리고 느끼는 방식들의 나눔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낸다. 이 신체는 바로 ‘감성적(미학적) 단절’을 뜻하며, 이 지점에서 미학은 정치적인 것과 결합한다. 따라서 이런 결합의 조건은 새로운 예술작품의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의 형식이다. 작품들이 목적이나 위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형식을 알아볼 수 있는 시선의 형식이 곧 새로운 신체의 자질을 위한 조건이다. 이를 랑시에르는 세 가지 예술의 식별 체제와 다른 의미에서 “아무나 가진 능력”으로서 미학을 정의한다.(···) 랑시에르는 이 보충에 대한 요청이야말로 아무나 가진 능력, ‘실력 없는/무능력한 자들’의 능력을 현실화하는 정치의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295-300쪽.
랑시에르에게 미학이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라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게 만드는 앎(지식)을 뜻한다. 이런 앎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분리시키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의미한다. 감각적인 것은 감각하는 행위 주체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감각할 수 있는 대상에 더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런 맥락에서 랑시에르는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의 과학성이 아니라 바로 미학성이라고 주장한다. 302쪽.
제11장 존재의 사건을 쫓는 철학적 수사관
바디우는 탈근대적 철학 이론을 ‘철학의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로 본다는 점에서 제임슨과 유사한 입장에 선다. 제임슨이철학적 위기의 원인을 총제화의 불가능성에서 찾는다면, 바디우는 보편주의에 대한 폐기에서 발견한다. 310쪽.
철학은 지식에 대한 허구와 예술에 대한 허구를 서로 겹쳐서 구성하는 행위인데, 두 허구성의 사이에서 진리를 움켜쥐는 것이 철학이다. 이런 까닭에 철학은 시스템의 종언과 무관하다.(···) 바디우의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은 언제나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건은 언제나 철학을 생산하게 마련이다. 그 철학의 조건은 모든 합의된 것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철학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논리다.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네 가지 진리적 절차인데, 이들을 서로 배제적인 게 아닌 공존 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바디우의 생각은 독창적이다. 314-315쪽.
공가능성은 ‘공통적인 것의 가능성’이다. 즉 다양한 사건, 가령 시, 수학, 정치, 사랑이라는 네 가지 ‘조건’에서 발생하는 진리의 절차에서 드러나는 보편성이다. 철학은 곧 공가능성에 대한 개입이고 명명이다. 철학은 공가능적인 진리의 조건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실천적 행위다. 지금까지 철학은 다양한 진리의 절차들을 평등하게 파악하지 않고 그중 하나를 위계적인 관점에서 우월한 지위에 놓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런 식으로 진리 생산의 공가능성을 부정했을 때 ‘봉합’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로인해 철학은 개입과 명명의 지점을 상실하고 다른 기능의 대표자를 자임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319-320쪽.
철학에 대한 바디우의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봉합을 해체하고 진리 생산의 절차에 내재한 공가능성을 철학이 수용하는 것이다.(···) 진리가 있기에 철학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란 일자적인 총제성이나 보편성을 말하지 않는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언제나 ‘진리들’이다. 그것은 편재하는 것이고, 순간적으로 출몰한다.(···) 진리가 출몰하려면 사건이 있어야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이고, 만일 이 영역들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개입과 명명을 통한 ‘조사’에서 철학은 사건에서 드러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구분해내야 한다.(···) 바디우 철학의 핵심은 바로 ‘새로운 것’을 밝혀내는 데에 있다.(···) 바디우는 현재, 다시 말해서 새로운 것이 영원히 과거와 상호교직하면서 그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과거의 반복이라 볼 수 없고, 새로운 것을 이미 존재하거나 존재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그리고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건과 존재의 관계다 320-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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