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2 (2004)
Spider-Man 2
9
[영화감상] 스파이더맨2
- 우연한 사태의 발발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갱신.
어떠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그것이 사후적으로 주체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온다면, 사태의 전적인 우연성은 필연성으로 둔갑한다. 바디유는 사랑을 예로 들어 이러한 둔갑을 설명한다. 사랑은 자유롭게 떠돌던 각각의 남녀가 전적으로 우연한 만남의 계기로 발생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연인은 자유롭게 서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 만남으로 둔갑된다. 그래서 서로의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선택의 자유는 소실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이 전적인 우연에 의해, 그리고 서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 진 것임을 스스로 잊어버린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들의 사랑을 운명이라고 여겨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의 시절인연이 끝나는 날이 오면, 자유에의 욕망은 다시 복권된다.
스파이더맨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탄생했다. 소심하고 심지어는 왕따 학생이었던 피터 파커는 실험실에서 짝사랑을 쳐다보고 있다가 거미에게 손등을 물렸다. 그리고 그는 스파이더맨이 됐다. 스파이더맨이 된 그는 자신의 영웅적 사명을 가지고 도시의 평화를 위해 한 몸 바친다. 그러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의 마지막 순간에서부터 2년 동안 주구장창 영웅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그의 삶은 도시가 얻게 된 평화와는 상반된 길을 걸어왔다. 도시 안에서의 사건·사고에 신경을 쓰느라 아르바이트에서는 번번이 쫓겨나고, 학교 수업도 제때 맞춰가기 힘들다. 그 뿐이랴, 사랑하는 여자의 공연에도 가질 못하는 지경이다.
그러다보니 영웅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다. 그는 거미옷을 쓰레기통에 쳐 넣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손목은 더 이상 거미줄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피폐해진 그의 삶을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지 못했다. 그는 결국 다시 거미옷을 집어 든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보한 그의 손목은 거미줄을 다시 생성해 낸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영웅만의 특별한 고뇌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소명과 신념을 갖는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삶의 짐이 그러한 소명과 신념을 끊임없이 회의의 유혹으로 이끈다.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이 시대의 속도감에 속수무책이 되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 같은 나의 삶’이 굴러가게 된다. 피터 파커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 일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순간, 거미의 능력을 되찾고 날아오르게 되었다.
<스파이더맨2>의 적은 피터 파커가 존경하는 과학자였다. 옥토퍼스 박사는 원래 악이 아니었다. 그는 존경 받을 만한 훌륭한 과학자였다.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고 비범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과학적 성취를 맹신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었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지속하기 위해 악에게 항복하고 괴물이 되었다. 피터 파커는 자신이 특별히 존경했던 사람을 적으로 삼아야만 했고, 싸워야만 했다. 통제되지 못한 인간의 욕망은 존경의 대상에서 괴물로 순식간에 전이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천재 물리학자이자 낭만적인 가장인 옥토퍼스는 역시 천재성을 갖춘 과학도이자 헌신적인 연인인 피터 파커와 겹쳐진다. 우연에 의해 영웅이 된 피터 파커와 우연에 의해 아내를 잃은 옥토퍼스는 명백한 선과 악의 극단에서 싸움을 벌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자신의 가능성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피터 파커와의 싸움 끝에 옥토퍼스는 결국 참회에 이르게 된다. 옥토퍼스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탄생시킨 거대한 인류 진보의 가능성이자 오판의 결정체였던 에너지와 구조물을 끌어안고 스스로 수장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맹신에서 비롯된 심각한 오판을 인정하고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났을 때, 따뜻한 감성과 비범한 지성의 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2>에서 정체성의 재구현을 시행하는 대상은 피터 파커와 옥토퍼스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옥토퍼스와 피터 파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 시민들이 그 대상이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다가 혼절한 스파이더맨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가만히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 거미 영웅이 자신들의 아들, 딸보다도 어리고, 평범한 소년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영웅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던 자신들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하고 미안함을 가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웅의 일에 전적으로 끼어들 수는 없다. 그들의 손목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은 영웅의 영웅적 활약을 폭력적으로 부추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민들은 영웅의 소명과 신념에 동력을 준다. 그리고 그 동력은 이해를 통한 지속가능성의 갱신이다.
바디유는 우연에서 비롯된 사태의 발발이 제공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사랑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는 우연의 상황에서 주체의 자유적 선택이 사건을 의미화하며 정체성의 갱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파이더맨2>에서도 이러한 우연과 정체성의 혼란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혼란의 끝에 갱신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삶에서 우연은 계속적으로 발생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우연적 사태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도 계속된다. 결국 자신의 소명과 신념에의 의지가 자유로운 선택의 척도가 되어 갱신을 유도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과 신념 또한 재구축된다.
<스파이더맨2>가 정체성의 매끈한 정립을 구현하며 끝나는 듯 보이지만, <스파이더맨3>에서 더욱 천착되는 분열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삶의 지속과 정체성의 흔들림은 함께 가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도 되돌아보면 끊임없이 변화해오고 갱신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소명과 신념의 폐기는 손목에서 더 이상 거미줄이 생성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파괴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소명과 신념의 폐기는 정체성의 재구축을 실패로 만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우연한 사태로 인한 정체성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똑바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서 재구축이 시작된다. 피터 파커와 옥토퍼스는 그렇게 재구축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껏 그렇게 재구축되어 왔다. “더 이상 변하기 싫지만, 머물 수가 없어”(아이들의 눈으로)라고 서태지는 노래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소명과 신념(변하기 싫은 가치관)을 간직한 채, 어떻게 변화(갱신)해 나갈 것인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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