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영화감상] 레지던트 이블

두괴즐 2011. 6. 6. 23:04



레지던트 이블 (2002)

Resident Evil 
8.9
감독
폴 W.S. 앤더슨
출연
밀라 요보비치, 에릭 매비우스, 미셸 로드리게즈, 제임스 퓨어포이, 마틴 크루즈
정보
액션, 공포 | 독일, 프랑스, 영국 | 100 분 | 2002-06-13
글쓴이 평점  


<레지던트 이블> [2002]

- 좀비의 이빨을 피했다고 안도하는 당신. 정말 피했을까?



 바야흐로 자본의 전지구적 포섭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무적의 검을 든 맘몬신(물질/돈의 신)은 21세기 푸른별 지구를 난도질 한다. 광물을 캐고, 나무를 베고, 인간을 쥐어짜 잉여를 생산하더니 이제는 인간의 생체적 설계를 조작해 혁신을 이야기 한다. 맘몬은 윤리의 망토를 기만적으로 걸치고서 새하얀 허벅지를 내어 놓고 자극한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 맘몬의 실험장이다.


 영화의 배경은 이렇다. 21세기 초 엄브렐러라는 제약회사(the Umbrellr Corporrtion)는 미국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발전한다. 엄브렐러는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컴퓨터 의약 보건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공기업으로 거듭나고 고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막대한 자금은 무기기술(Military Technology), 유전실험(Genetic Experimentation), 생체병기(Viral Weaponry) 등으로 개발되어진다.(네이버 영화 참조)


 지하의 거대한 유전자 연구소 ‘하이브’에서 어느 날 치명적인 바이러스(T바이러스)가 유출된다. 연구소를 통제하는 슈퍼컴퓨터 ‘레드퀸’은 연구소를 완전히 봉쇄하여 모든 직원들을 죽이고 인간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레드퀸’은 이 혁신적 바이러스의 유출을 막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유기체적 개조(유전자 조작/변형)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인간을 좀비로 만들게 하는 바이러스다.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바이러스 따위가 왜 필요한가 싶겠지만, 당연히 완전 끌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일단 바이러스는 당연히 백신을 요구하게 되고, 이 백신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는 돈방석에 올라선다.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록 백신이 더 돈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우라사와 나오키의 위대한 작품 <20세기 소년>에서는 심지어 바이러스와 백신의 놀음으로 ‘친구’에서 ‘신’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과학적 혁신은 항상 군사적 혁신의 도구가 된다. 당신은 좀비와 전쟁을 하고 싶은가? 뭐? 화끈하게 지르고 싶다고? 자네, 너무 게임을 많이 한 것이 아닌가? 실전은 동전을 넣는다고 목숨이 늘어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뭘 모르나 본데 문제는 더 심각하다. 왜 당신은 좀비를 사냥하는 헌터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상정하는가? 바로 당신이 총알받이의 좀비일 수도 있다. 좀비도 원래는 인간이었다.


 이 영화는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좀비가 된 인간들과 그에 둘러싸인 특공대들의 미션 수행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좀비’일까? 철학자 지젝은 인간은 모두 두 번 죽는다고 말한바 있다. 실제적 죽음과 신체적 죽음. 이것을 변주해서 말해본다면 우리는 두 번의 좀비화가 수행된다. 실제적 좀비화와 신체적 좀비화.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바이러스에 노출되거나 혹은 좀비에게 뜯겨서 좀비화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좀비화는 노골적으로 극단화된 신체적 노출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실제적 좀비화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에 있어서 이미 노예다. “다들 그렇잖아, 사회가 이미 그런 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저 생각 없이 노동력을 팔고 상품을 소비하는 맹목적 욕망의 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피부가 떨어지고 해골이 살 위로 들어날 수록 더욱 좀비스러운 것처럼, 값비싼 장신구(악세사리)와 명품으로 몸을 치장할수록 더욱 좀비화되는 것은 아닐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세계의 수많은 석학들이 전지구적 양극화 앞에서 다시 윤리를 호출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가 이외수는 “인간다움이란 윤리관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모두 마스터 한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니깐, 다들 다 까먹으셨겠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라던가 사람답게 사는 삶, 자연과의 조화 따위의 것들은 이미 우리가 다 배운 것들이다. 하지만 현실에 찌들린 어른이 되면서 이를 다 잊고 만다. 마음이 가난한 부자, 가난하기 때문에 윤리가 흔들리는 빈자. 우리는 그 사이에서 맘몬의 그늘 안에 꿇어 있다.


 <20세기 소년>에서 바이러스를 만들던 과학자는 사회의 악이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연구에 몰두하던 천재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있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수많은 사람이 죽고) 깨닫고 후회했다. 맘몬은 원래 숭고한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숭고한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숭고하지 않은 것이 숭고해 진 것일 뿐이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되고 중요시되는 것이 정상적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녕 정합적이고 놀라운 철학적 통찰에서 기반 되는 윤리인가? 그렇지 않다.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의 복권 그것이면 된다. 문제는 실천이고 어떻게 해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좀비의 이빨을 피하지 못했다. 이미 좀비가 되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다. 기업의 이윤추구에서 비롯된 유전자 변형식품을 내가 먹지 않으면 다 괜찮은 것인가? 그 식품들을 폐기해버리면 우리의 기업이 돈을 못 벌어들이니 우리의 국익에 혹은 나에게 손해가 될까봐 두려운가? 그래서 제3세계 사람들에게 먹이고서 안도하는가?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악마의 실험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3세계를 거대한 실험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나?


 카이스트의 안철수 박사는 사회의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를 감수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면서 사회의 공공성의 회복을 역설한바 있다. 즉 나무에 달린 달콤한 열매를 딴 사람은 함께 경쟁하고 달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자양분 위에서 맺힌 열매를 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개인이 독점적인 소유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독점하려고 할 때 함께 달려갔던 사람은 굶주리게 되고 결국 맘몬의 손아귀에서 모든 인간은 나약해진다.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존재하는 것이고, 물질적 소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고통이 맘몬의 건강을 책임진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맘몬의 질주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극단은 결국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맘몬에게 자신을 의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의 불법적 실험(돈이 되는)을 묵묵히 실천하던 최고의 연구자들은 가장 빠르게 좀비가 되었다. 신체적 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안심하지 마라. 맘몬 앞에 꿇어있다면 이미 실제적으로 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맹목적으로 죽이는(무한경쟁) 일은 그만두자. 그리고 이제는 똑바로 쳐다보자.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싸우게 만드는지를. 정말 나의 적이 너인가? 너의 적이 나인가? 아니다. 우리의 적은 ‘맘몬’이다. 맘몬을 우리가 꿇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맹목적 살인을 결코 중단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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