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콩 (2005)
King Kong
8.7글쓴이 평점
<킹콩>
- 킹콩과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넘사벽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본 킹콩)
피터잭슨 감독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감독이고 그 역량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까야겠다. 그는 본 영화를 찍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고 밝혔다. 피터잭슨이 작은 소년이었을 때 보았던 살벌한 <킹콩>은 그의 손에 의해 사랑스러운 <킹콩>으로 재탄생했다. 본작은 상당히 성공적인 리메이크작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가 어린 시절 영화를 향한 꿈을 키워줬던 작품에 대한 헌사로서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문제제기 되었던 요소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여전히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백인 외 인종에 대한 비현실적 그림이다. 또 오리엔탈리즘1) 타령이냐고,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아이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감각하게 되풀이되는 풍경이야 말로 폭력을 지속시킨다. <반지의 제왕>시리즈는 판타지의 놀라운 장을 제시했고, 원작의 세계관을 훌륭하게 영화화해 냈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잭슨의 차기작인 <킹콩> 역시 그 혐의를 똑같이 물고 있다. 물론 잭슨은 ‘애당초 원작이 백인 우월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데, 나보고 어쩌라고’라며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애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고, 나 역시 침묵함으로서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학창시절 때 아메리칸 드림과 관련된 학습만화를 본 적이 있다. 학원에 수업시간보다 일찍 가게 돼서(세상에! 무슨 생각으로!)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는데, 인디언 사냥에 대한 내용이었다. 만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용감한 탐험가이자 개척자인 미국인들이었고, 명백한 적은 인육을 먹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괴물인 인디언들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 만화 속에서 미국인이 인디언을 죽일 때 기뻤고, 인디언에 의해 미국인이 죽을 때 슬펐다. 결국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무찌르고 아메리카를 개척했을 때 나 역시도 얼마나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던가!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명백한 사기였다. 아메리카 드림은 자신들의 침략과 수탈, 인디언 말살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 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의 기록은『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인디언은 결코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로부터 침략해온 괴물(미국인)로 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전통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한 인간이었다.
피터잭슨의 <킹콩>에서 주인공 일행들이 해골섬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개척자인가, 침략자인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살육자인가,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는 방어자인가? 그리고 애당초 눈깔을 뒤집고 미친 짓거리만을 일삼는 그들 자체가 존재 가능한가? 오리엔탈리즘에 빠지는 함정이 바로 몰이해에 있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소통의 불능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로지 병신으로만 취급되는 원주민은 서구의 우월적 태도에서 잉태된 허상에 불과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찰을 가하고 마빈 해리스가 문화 인류학적인 통찰2)로 상대적 문화의 이해를 돕고, 헬레나가 진정한 ‘미래’적 성취는 무엇에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도3), 여전히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킹콩조차도 좀 그렇다. 물론 나라도 그 정도라면 혹하겠지만, 킹콩은 원래 재물을 받으면 해골이 널 부러진 곳으로 가서 재물의 사지를 찢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여주인공은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그런지 킹콩은 그녀에게 그냥 훅 간다. 원주민의 해골이 널 부러진 바위 위에서 킹콩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자연히 백인의 미적 우월을 드러낸다. 결국 킹콩은 다른 백인의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될 그녀를 위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그냥 훅 간다. 물론 그 과정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하지만, 백인이 아닌 존재가 백인의 아름다움에 천착할 때는 그 힘의 압도적 강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락으로 귀결됨을 명백히 드러낸다. 사실상 킹콩과 그녀 사이에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그 넘사벽 때문에 감동을 자아내지만 현실은 그저 냉혹하다.
사실 이 영화를 이렇게 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봤고, 너무 짠했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슨은 나에게 “헐~ 너는 그렇게 재밌게 봐놓고, 이제 와서 이러기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사소한 딴지(따니)에 ‘열폭쩐다’고 규정한 사랑하는 친구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물론 그 친구 말대로 나의 글은 그저 한 유색인종의 ‘열폭(열등감 폭발)’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지엽적인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발언하지 않음으로서 작동하는 ‘암묵적 동의’ 역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암묵적 동의’야 말로 폭력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정당화 기제가 아니던가. <킹콩> 영화에 흑인 1명이 주요한 역을 수행했다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지 않나? 피터잭슨의 팬으로서 그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한 넘어서기가 가능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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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존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양의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동양문화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이르렀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스트"란 말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과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를 이르는 전통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논쟁적인 책 『오리엔탈리즘』을 내놓으면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이 저서에서 오리엔탈리즘을 18~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적 태도로 형성된 동양에 대한 적대적이고 우월적인 시각의 서양 예술과 학술 및 사조를 이를 때 이 용어를 썼다. 즉, 그에게 있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문화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왜곡된 서구의 해석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이드의 이러한 통찰은 서구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죄악을 어떻게 정당화시키는지를 고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은 지속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다.
2) 마빈 해리스는 외부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는 민족조차도 실상 그들의 역사와 생활상을 살펴보면 정당한 이유가 있고, 오히려 그 전통에 의해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한다고 분석한바 있다. 대표적으로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굶어 죽어도 소를 먹지 않는 힌두교 전통의 인도를 문화 인류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3)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그녀의 저서『오래된 미래』에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설적인 성찰을 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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