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동막골 (2005)
Welcome To Dongmakgol
9.3
<웰컴 투 동막골>
-망언이라는 장희민의 발언과 평화의 가능성
EBS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장희민 강사가 한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떤 말이었는지 보자. “남자들은 군대갔다왔다고 좋아하죠. (···)자기가 군대 갔다 왔다고 뭐해달라고 만날 여자한테 떼쓰잖아요? 근데 그걸 알아야죠. 군대 가서 뭐 배웁니까? 죽이는 거 배워오죠. 여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낳으면 걔네 죽이는 거 배워오잖아요. 그럼 뭘 잘했다는 거죠? 도대체가 뭘 지키겠다는 거죠? 죽이는 거 배워오면서. 걔네 처음부터 그거 안 배웠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요.”1)
특유의 어투로 군대와 남자를 조롱하는 그녀의 발언은 예비군 4년차인 나를 정말 빡치게 했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속에 남·여를 구겨 넣는 비약 역시 너무나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군대에서 배우는 일이 사람 죽이는 것이라는 발언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물론 평화를 위한 폭력의 강구이기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군인의 역할은 적을 죽이는 일이고 군대는 그런 군인을 양성하여 실제 전쟁에 동원시키는 제도적 장치이다. 사실 군인들이 자신의 임무 배우기를 정지할 때,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 물론 그러한 평화는 전 지구적으로, 모든 국가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위한다면서 군을 해산할 때, 북한도 ‘그래. 진정한 평화가 와야지.’라고 하면서 군을 해산한다면 평화가 온다(전 지구적으로도 마찬가지). 하지만 무장해제하는 우리를 보고 ‘아싸, 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하면서 남침해 오면 우리만 개털린다. 그러니깐, 이상적인 차원에서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평화의 방향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수한 이상의 지향이 오히려 현실의 폭력을 외면하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게 된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과연 적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로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던 남북한의 군인들은 동막골 이라는 마을에 흘러 들어간다. 그곳은 ‘아이들처럼 막살자’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그리고 동막골은 남북한의 군인들 뿐 아니라 연합군인 스미스 대위도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깐 전쟁의 참정 대상자들이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지만, ‘아이들처럼 막살’고자 하는 마을사람들의 영향 탓인지 서서히 신뢰를 가져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은 친구가 되었고, 이 마을이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힘을 합쳐 이에 대항한다. 철천지 원수였던 이들은 “우리 이렇게 말고 다른 곳에서 다르게 만났더라면 참 재밌었을 텐데, 안 그래요?”라는 말을 남기고 폭격의 희생자가 된다.
‘적이란 정녕 누구였던가?’ 전쟁은 외부의 적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싸울 대상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 동원되는 이들은 그 이유도, 그 전쟁의 가치도 사유할 수 없다. 그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에 압도되어 닥치는 대로 해나갈 수밖엔 없다. 또한 나의 등 뒤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적을 무찔러야 하는 너무나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너무나 명백한 건 어쩌면 ‘나의 적’, ‘우리의 적’이 누군지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똑같은 전쟁의 메커니즘의 희생자라는 생각을 한다면 전쟁의 실행은 불안정해진다. ‘총을 들고 내려오는 저 군인들이 적인가?, 아니면 나에게 총을 쥐어주고 저들을 죽여라고 한 우리의 국가가-저들의 국가가 적인가?’ 동막골 마을을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막기 위해 힘을 합친 동막골에 흘러들어온 남과 북, 그리고 미국 군인은 자신들에게 되묻는다. “우리도 연합군 아닙네까?”
‘적’을 규정하는 것은 군인이 아니다. 바로 국가다. 군인은 그런 국가에 의해 동원당할 뿐이다. 그리고 국가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끔 유도 당한다. 더 없이 부드럽고 그럴듯한 정당성들에 의해서. 전쟁은 늙은이(어쩌면 국가)들이 벌이고 젊은이들, 그리고 민간인들의 피를 먹으며 지속된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저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아들들은 그런 어머니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총질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우리의 가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저들을 미워하게 되고 원수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정녕 그들이 적인 것일까?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총을 쥐어주고 싸우라고 한 그들. 어쩌면 그들이 적이 아닐까? 그래서 철학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국가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과연 적이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적’이라는 것이 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인은 ‘적’을 규정할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가 나의 친구라 하더라도 국가가 ‘적’으로 규정하면 우리는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한다. 우리는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누구나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일이다. 국가의 호명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간파해야만 하고, 군인들의 자발적 임부 방기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동 될 수많은 폭력을 비폭력으로 견뎌야 한다. 즉, 너무나 이상적이고 이상적인 일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가 사상의 완성자라는 평을 받는 한비자는 이러한 측면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군주론을 주장했다. 절대군주가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평화의 수행자로 자청하는 국가가 ‘미국’이다. 절대적 힘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평화를 수호하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지구상의 모든 지구적 전투들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화라는 이름, 화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총을, 아니 그 이상을 쏘고 있다.
우리의 평화에 대한 비전은 전지구적 무장해제를 통한 전쟁의 자연사라는 이상과 절대적 힘에 기반하는-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더 큰 폭력적 힘을 키우는 현실적 방식 사이에 놓여있다. 전자의 방법론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만 존재해 왔고, 여전히 후자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어 지고 있다. 하지만 후자는 진정한 평화라기보다는 억누르고, 강제되고 있는 평화이다. 힘의 역학은 절대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변하기 마련이다. 이렇기 때문에 한 전쟁학자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이 인류를 종식시키는 일이다.”라고 극단적으로 선언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국가라는 경계를 지우고 세계시민권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낸다면 전쟁은 극복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국가라는 경계를 지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전체주의의 위험성 역시 조심해야만 한다. 물론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들이 지구로 쳐들어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구인들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동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의 이름이 ‘아마겟돈’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동막골’에 갈 수 있을까? ‘동막골’은 ‘웰컴’이라고 하지만 사실 ‘아이처럼 막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보고 싶다.
* 이미지 출처는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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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영상 주소: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LK8h0QUVU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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