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바이 : Good&Bye
Good & Bye
8.9글쓴이 평점
<굿바이>
- 남겨진 자들을 위한 납관사의 ‘닦기’
2010년의 첫 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죽음은 항상 우리의 일상에 있다고들 하지만 막상 다가오는 순간에는 너무나 급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상실보다는 아버지를 잃고 눈물 흘리는 엄마 때문에 울었다. 만약 엄마와 아빠가 나를 떠나 세상을 등진다면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우리 집안의 죽음관은 매우 명쾌하고 간단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기에 죽음은 곧 영원한 생명, 곧 천국을 향한 문을 여는 것으로 간주된다. 올 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도 한평생 하나님을 섬긴 목사님이었다. 하지만 함께 공간과 시간을 공유했던 소중한 존재가 상실되는 건 종교의 힘에 의지하더라도 쉽게 극복되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천국의 문을 열었다고 믿음에도, 축하의 박수대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다는 핑계의 눈물은 남겨진 자들의 치유수단이 된다. 수많은 의문을 낳는 죽음 후의 세계지만, 남겨진 자들의 아픔만큼은 확실하다.
타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는 염쟁이가 된 한 남자(다이고)의 이야기이다. 실수를 빙자한 고의의 낚시질에 낚여버렸다고 밖에 해명할 수 없는 운명으로 첼로리스트가 꿈이었던 남자는 졸지에 염쟁이가 된다. 시체를 닦고 예쁘게 치장하여 죽은 자를 보내는 납관사라는 직업은 ‘염쟁이’로 조롱받는 직업이다. 그렇기에 그의 아내인 미카는 납관사가 된 남편에게 실망해 친정으로 가버리고, 그의 오랜 고향친구에게서도 당장 그만두라는 냉정한 충고만 받을 뿐이다.
다이고가 납관사를 그만두기 위해 자신을 낚은 이쿠에이에게 간다. 이쿠에이는 그런 그에게 점심으로 요리된 민물문어를 내주며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것도 시체지. 생물은 생물을 먹고 살 수밖에 없어. 죽기 싫으면 먹을 수밖에 없지. 먹는다면 맛있는 편이 좋고.” 우리는 화분이 아니기에 시체를 먹고 살아간다. 죽기 싫으면 시체를 먹어야 하고, 먹는다면 맛있는 편이 당연히 좋다. 사람들은 납관사가 시체를 만지는 직업이기에 ‘더럽다’(심지어 그의 아내조차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보내기 위해서는 납관사의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작업을 통해 죽음의 문을 열게 된 죽은 자의 시체가 예뻐진다면 그 편이 당연히 좋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남겨진 자는 이별을 준비할 수 있게 되고, 더 없이 사랑스런 모습을 보면서 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체(음식으로 조리된)를 맛있게 먹는 이유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처럼, 납관사 역시 남겨진 자가 살아갈 수 있게 위로의 시간을 제공한다. 삶과 죽음의 부득이한 연속성과 일상 속에 만연한 죽음이라는 비극은 그렇게 극복되어 진다.
사람들이 납관사를 혐오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도피욕망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직시하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집의 우물물을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초상을 맞은 가족들이 납관사를 처음 맞을 때는 대게 불쾌한 듯이 군다. 왜냐하면 납관사는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을 요청하고 떠나보내는 길을 마련하는 동안 가족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납관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를 비난했던 고향친구도 어머니를 잃고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납관사를 하게 된 친구를 이해하게 된다. 그의 아내 역시 죽음 앞에서 길을 닦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진정으로 그를 품에 안는다.
영화는 극복할 수 없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던 다이고와 아버지의 화해를 끝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그 화해는 죽음 앞에서야 이루어진다. 자신이 6살 때, 애인과 바람이 나 집을 떠난 아버지를 위해 그는 납관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미처 할 수 없었던 말들을 추억이 담긴 작은 돌을 통해 듣는다. 죽음을 통해 다음 문을 여는 아버지의 곁에서 다이고는 미카의 배속에서 호흡을 내뱉는 자신의 아기를 느낀다. 그렇게 죽음과 삶은 일상 속에서 어우러져 산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어느덧 섣달이 흘렀고, 엄마의 붉던 눈은 이제 하늘에 반사되는 빛을 그릴만큼 건강해졌다. 종교는 인간의 내세에 대한 지독한 미련에서 비롯되는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고 무신론자들은 비판한다. 사실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 내세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종교는 내세의 유혹에 의해 유지된다. 하지만 그 미련은 사람을 희망하게 하고, 소중했던 시간들과 공간들에게 다시 호흡을 갖게 해준다. 그리고 그 희망은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존재한다. 죽음의 이야기인 이 영화의 영제가 <Good & Bye>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Good’과 ‘Bye’가 만날 수 있게 한 ‘&’가 바로 염쟁이라고 조롱받던 납관사였다는 사실이다. 납관사는 시신을 닦는 더러운 자가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길을 닦는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눈물을 닦는 화해(和解)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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