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밑줄] 박민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예담, 2009.
p.15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해서 고스란히 서로가 이해한 서로를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내색 없이, 마음 놓고 그녀가 울 수 있도록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의 눈물 밑에 펼쳐 주었다.
p.39-40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린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1985년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 잠언집의 문구가 떠오른다. 달리는 사람만 가득했을 뿐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을 기다려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던 인간이다. 영혼의 걸음은 생각보다 느리고, 세월은 내가 올라탄 말과도 같은 것임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언젠가는 말을 세우고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에겐 결국 영혼이 필요하고, 영혼은 인디언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나는 말을 세우고 땅 위에 발을 내려선 기분이다. 그리고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보는 인디언처럼 한동안 그 시절을 돌아보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두고 온 한줌의 <영혼>이 있을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문)
p.40-41
1985년엔 어딜 가도 마돈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물론 해마다 그런 일은 있어왔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누군가가 나타나고, 그녀의 존재감이 모두를 장악한다-오일 쇼크가 일어났다던 1979년에도, 세계 대전이나 대공황의 시기에도... 19세기의 영국과 15세기의 중국... 또 로마와 그리스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인간에겐 늘 영광할 만큼의 아름다움이 필요했고 1985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못생긴 여자를 강간하는 법은? 정답!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라는 저질 유머가 역시나 크게 히트한 해였다.(···) 어디서나, 또 어디에나 신문지는 널려 있고... 세계 대전이나 대공황의 시기... 19세기의 영국과 15세기 중국... 또 로마나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세상은 못생긴 여자들로 가득했었다. 인간에겐 늘 멸시할 만큼의 추함이 필요했고, 역시나 그해에도 인류는 무수한 부수의 신문을 발행했다.
p.41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큰돈을 만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부동산이며 증권이며... 비누거품이 일듯 팽창하던 세상의 분위기와, 갑자기 불어난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던 사람들, 그 사실을... 인정하진 않으면서도 다 같이 부러워하던 사람들... 땀 흘려 일하기가 갑자기 서먹하고 무안해진 사람들... 가난이 죄란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사람들과... 나도 하겠다고, 청약통장을 들고 반 세워 줄을 서던 사람들... 큰 차를 타면 대접이 달라짐을 자각한 사람들... 큰 교회를 다니면 큰 구원을 얻으리라 착각한 사람들... 장기와 피조차도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들... 돈 앞에선 부모형제도 없음을 시인해야 했던 사람들... 메이커와 브랜드가 왜 인간을 대변하는지를 피부로 느낀 사람들...(···) 나도 한몫 잡겠다고 서울로 올라오던 사람들... 그들이 떠난 시골을 누비며 미리미리 땅을 사두던 사람들과... 드디어 비디오에, 비주얼에 눈을 뜨던 사람들... 화장과 코디, 패션잡지와... 우후죽순 솟아나던 백화점과... 바오밥처럼 불어나던 신흥 부촌, 신흥 명문, 신흥 신흥 신흥...
p.45
인간의 내면(內面)은 코끼리보다 훨씬 큰 것이고, 인간은 결국 서로의 일부를 더듬는 소경일 뿐이다.
p.47
누가 봐도 이상한 삶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현실을 해결하고, 아버지는 열심히 비현실을 추구하는... 이를테면 영화를 봐야 연기가 는다는 이유로 덜컥, 턱없이 비싼 비디오를 사온다거나... 느닷없이 춤이나 노래를 배우러 다닌다거나... 어쨌거나 어머니가 주는 용돈으로 해결하던 많은 일 중에서 단연 백미는 마사지가 아니었나 싶다.(···) 잡일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동네의 어떤 여자보다 더, 아버지는 깨끗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동네 사람 모두가 어머니를 연상으로 생각했었다. 종종 주변의 아줌마들은 어머니를 시동생과 사는 여편네라고 놀렸었다.
p.49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에 대해 얘기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게도 과연 <아버지만의> 어머니가 있었을까? 아버지에게도 그런 우아한, 혹은 우아했던 어머니가 한 순간이라도 존재했을까?(···)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삼류 배우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였을 것이다. 아마도
p.52
인간의 안목(眼目)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 아, 그것이 사라졌구나. 사라져가는구나... 느낀 후에야 그 텅 빈 공백을 바라보며 비로소 중얼거릴 뿐이다.
p.53
노련한 조련사처럼 이모는 끊임없이 울고, 손을 쓸어주며 마치 노래를 부르듯 길고 긴 얘기를 늘어놓았다. 립서비스처럼 느껴지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그러나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
p.71
떠오르는 달과 별이 주먹이 주는 선물임을... 그리고 어떤, 방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특히 눈을 맞으면 그랬다. 말하자면 눈을 통해,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의 어머니도 그런 상태였을 거라 나는 짐작해 보았다. 알겠니? 아버지는 얘기했다. 절대 단련할 수 없는 급소가 몇 군데 있어. 그중 하나가 눈이야! 그중 하나가(···) 눈이라고, 음악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한 시합이다. 첫눈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첫인상으로 대부분의 시합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외모에 관한 한, 그리고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수 없다. 선빵을 날리는 인간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인간에겐 기회가 없다. 어떤 비겁한 싸움보다도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p.75
돌이켜보면 세상의 시소도 이미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좋은 것>이 <옳은 것>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였고, 좋은 것이어야만 옳은 것이 되는 시절이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학력에서, 경제력에서... 또 외모에서... 한눈에, 또 첫눈에 대부분의 승부가 판가름 나는 세상이었다.
p.76
아르바이트는 당시로선 상당히 낯선 개념의 일자리였다. 한 직장에 뼈를 묻거나, 누구나 변절자가 되는 기분으로 겨우 이직을 결심하던 시대였다. 천직까지는 아니어도 말하자면 모두가 정규직으로 세상을 살던 시절이었고, 또 그만큼 <사람>이란 명분이 남아 있던 세상이었다.
p.87
그 사이 요한을 통해 자질구레한 일의 노하우를 배울 수도 있었다. 통로나 코너에 차 세우는 놈들 있지? 절대로 여기 대시면 안 됩니다, 라고 얘기하지 마. 고객님, 이 자리에 대시면 차를 빼실 때 굉장히 불편하실지 모릅니다. 대시면, 빼실 때, 불편하실지... 무조건 <시>자를 넣어주면서 제가 좋은 자리로 <특별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 생각하거든. 그래도 차를 안 뺀다! 손님 이 자리는 코너가 좁아 다른 차가 긁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저쪽 <안전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해. 자기가 손해 보는 건 죽어도 못 참는 인간들이니까. 그래도 안 뺀다! 손님 이곳은 일반고객들이 대는 곳입니다. 저쪽 <VIP> 코너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무식한 인간일수록 명예에 약한 거니까.
p.91
여름정리 세일이 끝나면 곧 가을맞이 신상품 세일이 시작돼. 그리고 바로 한가위 고향 앞으로 세일... 아듀 가을 세일... 첫눈맞이 겨울 세일... 크리스마스 감동 세일... 연말 총정리 大바겐세일... 새해 큰 절 큰 감동 바겐세일... 이런 식으로 이어지지. 그게 백화점의 공식이야.(···) 이 세계엔... 세일즈와 세일밖에 없어. 그게 바로 자본주의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365일 세일을 하지, 싶겠지만 그게 또 이유가 있거든. 나는 더 싸게 샀다, 내가 더 이익을 봤다는 느낌이 인간에겐 필요하기 때문이야.
p.100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한이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거니까, 너나 나도 돈을 벌려고 이 짓을 하는 거잖아. 나는 여잔데 젊고 키가 커, 다행히 얼굴도 화장하면 괜찮아, 그래서 하는 일이야... 그런데 이렇게 하래, 일본 백화점 비디오를 틀어주며 보고 배우래, 이게 생생한 고객 서비스의 현장이다, 배워라... 그러니 뭐, 하는 수밖에 없는 거지. 실제로 저기 오른쪽 애는 평상시 목소리가 겁나게 허스키해. 그래도 그 목소릴 내야 하는 거야. 일할 땐 콧속에 솜이라도 뭉쳐두는지 모를 일이지.(···)
익숙해져야 할 거라며, 요한은 말을 이었다. 서비스 시대의 시작이니까... 너나 나나 이제 저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몰라. 즉 서비스형(型)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돈을 가진 인간들이 늘어났어. 그들은 서비스를 원해. 회사든 개인이든 이제 서비스를 할 줄 알아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거야.
p.104-106
아저씨는 그저 이쁜이가 좋았을 뿐인 거잖아. 누구나 그런 거라고. 너도 나도... 세상의 모든 아미고들은 이쁜이들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졌다고.(···) 그런거라니까, 지구 반대편의 여배우에 빠져 팬레터를 쓰는 게 아미고들의 운명이야. 이쁜 언니들 앞에선 어쩔 수 없다니까. 티브이에 나온 언니를 쫓아다니고, 함성을 지르지만 뭐 그 언니는 사랑해요 여러분... 하겠지만, 그 언니가 사랑할까?(···)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몰랐어? 모두 바보란 걸?(···) 아미고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실은 가질 수 없는 거거든. 가질 수 없으니까 열광하는 거야. 세상의 걸들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하녀라 해도, 어쨌거나 신데렐라가 왕궁에 가는 이유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한 거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고 꿈이 깨진다 해도 그 전까진 꿈을 꾸는 게 인간인 거야. 그래서 걸들도 열광을 하는 거야. 비명을 지르고 기절할 정도로 오빠를 외치고... 물론 오빠들도 고마워요, 또 여러분 사랑해요... 하겠지만 오빠들이 과연 걸들을 사랑할까? 마찬가지지. 실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나... 이런 아미고들과 걸들은 말이야... 그래서 좆밥이야. 세상의 좆밥들이지. 정말로 그런 오빠를 얻을 수 있는 언니들은 말이야, 또 그런 언니를 만날 수 있는 왕자들은 말이야... 서로에게 열광하지 않아. 왠지 알아? 시시하기 때문이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시시한 거니까. 뭐, 그래도 좋은 거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인간들이 널린 게 사실이고, 윙크 한 번 날려주면 페이를 지불할 인간들도 널린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바로 아미고들과... 걸들이지. 가질 수 없는데도 허구한 날 히죽대는 거야, 만날 수 없어도 허구한 날 박수를 치고 와와 하는 거지. 어머 왜들 이러실까 소릴 들어도... 하는 거야, 해서 저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지.(···) 아미고인 너에게 차가 생겼다면 저들은 대체 얼마를 벌었을지... 걸인 네가 이 정도로 예뻐졌다면 저들은 대체 또 얼마나 예뻐졌을지... 그러니 내버려두라고, 설령 마법을 만든 게 저들이라 해도 그 마법을 유지하는 건 다 같은 좆밥들이야.
p.108
요한은 또 느닷없이 신데렐라의 진짜 엔딩에 대해 열변을 토했었다.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그건 엔딩이 아니야. 삶은 말이야, 그보다 훨씬 긴 거라구. 잔혹할 정도로 지루한 거지. 실은 그리고 왕자는 곧 싫증을 느껴. 신데렐라가 애를 하나 낳긴 했지만, 왕자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엉덩이였던 거지. 게다가 왕자는... 실은 그전부터 유부남이었어. 결국 그런 거야. 해피엔딩은
p.121
여자에게 말이야... 무정(無情)보다 더 비참한 게 뭔지 아니? 동정이야. 동정하는 거라구. 확신하건대 <동정은 금물>이란 말은 분명 여자를 동정해 본 남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말이야. 모든 훌륭한 명언이 그렇듯이 경험담인 셈이지.
p.122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 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여자는 말이야. 다른 모든 창들을 녹여 그것을 하나의 창으로 만들고 싶어해. 단순하고 강렬한 하나의 창으로... 즉 <사랑>이란 창이지. 만약 그것이 다른 이름의 창임을 알게 되면 그 상처를 견디지 못하는 게 여자야. 그리고 넌 여전히 그 순간에도 포크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인 거지. 이유도 모른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어쩌지도 못하는 손인 거야.(···)
뿔이 여러 개일수록 여자는 불안한 거야. 복잡해지거든. 그걸 알아야 해. 바람둥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여러 개의 창을 절대로 디밀지 않아. 오직 하나의 창, 사랑이란 이름의... 창이지.
p.144
공부 공부... 그러다 죽는 거잖아. 1등 1등... 그러다 죽어야 하고... 돈 돈... 그러다 죽는 거잖아. 그렇죠,(···) 불쌍해,(···) 그거... 말고는 없는 걸까?
p.152
인간은 과연 실패작일까, 인간은 과연... 성공작일까?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인간은 과연 달의 이면을 볼 수 있을까? 인간은 과연... 스스로의 이면을 볼 수 있을까.(···) 달 위를 걸어다닌 인간조차도, 그러나 스스로의 내면에는 발을 내리지 못한 채 삶을 마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실패작과 성공작을 떠나, 다만 <작품>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형은 작품이에요... 그리고 나도 작품이에요. 인간은... 작품이에요. 못 다 쓴 메모를 적듯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p.155-156
어머 도대체 얼마를 이익 본 거야? 몰려들던 여자들의 물결을 잊을 수 없다. 분명, 이익을 본 것은 누구였을까. 말하자면
할인 자체가 눈가림이란 얘기네요? 몰랐어?(···) 결국 이 세상은 눈가림이야. 눈만 가려주면... 또 눈만 만족시켜 주면 지옥 끝까지라도 달려갈 바보들이지. 세상을 망치는 게 독재자들인 줄 알아? 아냐, 바로 저 넘쳐나는 바보들이야. 독재를 하건 누굴 죽였건... 여당이 돼야 이곳이 삽니다, 제가 나서야 집값이 오릅니다 하면 찍어주는 바보들 때문이지. 세상은 잘 살겠다고, 더 잘 살겠다고 하는 놈들 때문에 망하는 거야.(···)
이상하네요? 아니, 당연한 거야.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 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57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다.
p.159
짐을 지고, 이고, 들고, 안고... 가던 주부 하나가 맨 꼭대기의 짐을 내 발 앞에 떨어뜨렸다. 줍기 위해 몸을 굽혔는데 그만 멈칫 하던 주부의 팔이 닿으면서 와르르 짐이 쏟아졌었다. 한 이십 분 난리가 났었다. 새빨개진 중년의 얼굴과, 튀어나오던 욕설들을 잊을 수 없다. 다짜고짜 빰을 한 대 맞았는데... 다시 빰을 치려는 손목을 잡아버린 탓에 그만 일이 커지고 만 것이다.(···) 결국 달려온 주임의 굽신굽신이 있은 후에야 들소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발길을 돌렸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조금 슬펐다. 이게 얼마짜린지 아냐는 고함과, 물어줄 돈이나 있냐... 경찰을 부르라던 외침을 듣다 보면 누구라도 자아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했었다. 올라가서 좀 쉬라는 주임의 말에 어쨌거나 세수를 하고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물건이라도 가지러 들어온 듯 들어서던 그녀와... 괜찮아요? 묻던 목소리가 생각난다. 괜찮아요, 라고 말했는데도 울먹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말 괜찮아요.
p.161
아, 예. 우산 없어요? 아니... 실은 없어졌어요. 없어졌다구요? 네, 분명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요. 사은품 우산이라도 하나 들고 오지 그랬어요. 괜찮... 아요.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p.162
누구한테라도 좀 빌리지 그랬어요.
아뇨, 이게 더 편해요. 그리고 저... 이런 일에 익숙해요.
익숙하다뇨?
그러니까... 누가 쉽게 내 우산을 집어간다거나, 그런 거요.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여기고... 그런거... 누구의 도움을 바란다거나 그런 문제에 대해 그냥 포기하는 거... 그리고 정말이지... 이게 더 편해요.
하지만 맞을 만한 비는 아니라고 보는데...
비를 상대하는 게... 사람을 상대하는 거보단 쉬워요.
p.164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리를 해선 안 되는 거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하동문이라고
p.171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쉽고, 간편한 세계였다. 이뻐와 착해, 그리고 돈 있어로 모든 것이 해결되던 세계였으니까.
p.172
그래서 내가 접한 새로운 세계의 첫 페이지였다. 이뻐와 착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 페이지를, 그러나 실은 누구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인간도 돈 있어, 만으로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여자도 오빠, 나 오늘 이뻐?로 평생을 버틸 수 없다.
p.173
인간은 말이야...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 동물이야. 비슷해 보이는 여섯 조각이지만 모양이든 크기든, 어쨌거나 이중에서도 제일 맘에 드는 걸 고르지. 그렇게 다 먹을 것처럼 덤비다가도, 또 조금이라도 배가 부르면 치즈 자체를 망각하는 게 인간이야.
(···) 그러니... 어쨌거나 너가 좋았다면 그걸로 된 거라구. 지금은 그걸로 오케이야. 문제는 앞으로의 삶이지. 이 세상은 뭐든 가질 수 있다, 뭐든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심어줘. 그래야만 끝없이 부러워하고, 끝없이 일하는 99%의 인간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p.185
인간의 영혼은 저 필라멘트와 같다는 사실을.(···)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을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도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엔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경우도 많지. 교만해지는 거야. 그것이 스스로의 빛인 줄 알고 착각에 빠지는 거지.(···)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결국은 개인일 뿐이야. 자신의 삶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미인도 불 꺼진 전구와 같은 거지. 불을 밝힌 평범한 여자보다도 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거야.
p.192-193
인생에 주어진 사랑의 시간은 왜 그토록 짧기만 한 것인가. 왜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왜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개나 고양이만큼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왜 인간은 지금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는 것일까.(···)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200
두 시간을 기다려 5분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마도, 하고 나는 얘기했었다. 그런 걸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꼭 타고 가야지, 그런 심리가 되는 거지. 두 시간 줄서서 5분 열차, 두 시간 줄서서 5분 회전바퀴, 두 시간 줄서서 5분 바이킹... 우와, 거의 하루인 걸.(···)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p.214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鬪病)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217
그녀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상하죠? 실은 내가 어떻게 생각했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어떤 대답을 해도 그녀 스스로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거니까... 진실을 말해도 상처가 되고 거짓말을 해도 상처가 되는 문제라면, 도대체 어떤 말로 그 상처를 대해야 할까... 그리고 답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혼란스러워요. 결국 같이 아파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도, 정말이지 나 자신은 그렇게 아프지가 않거든요.
p.219
즉, 이제 비로소 세상과 맞설 만한 작은 힘이 그녀에게 생겼다는 얘기야. 열쇠를 쥔 것은 너나 그녀가 아니야. 바로 세상이지.
p.220
너는 부끄럽지 않았다는 말은 네가 부끄럽지 않다는 말, 너만 부끄럽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이 극복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단지 열등감이 없다는 얘기니까. 이를테면 모두가 열망하는 파티에 집에서 입던 카디건을 걸치고 불쑥 갈 수 있는 인간은 진짜 부자거나, 모두가 존경하는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야.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은 아예 가지 않아. 자신을 받쳐줄 만한 옷이 없다면 말이야. 파티가 끝나고 누구든 옷이 좀 그랬다는 둥, 그 화장을 보고 토가 쏠렸다는 둥 서로를 까는 것도 결국 비슷한 무리들의 몫이지.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그래서 와와(···) 하는 거야.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하는 거지. 역시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야.(···)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 이 세계의 비극은 그거야. 그렇게 서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결국 보잘것없는 인간들은(···) 보잘것없는 인간들과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지.
p224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꿈같은 일이란 실은 별다른 일이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꿈같은 일이란 실은 별다른 일이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p.226-227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말하자면 죠다쉬를 입은 고등학생의 <멋있어>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이를테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 상상이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 태양이 돌잖아? 해도 와와 하지 않고,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거야.
p.228
신은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거야.(···) 바로, 사랑이지.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p.231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난 후의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의 경제활동으로 변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임을, 그것이 보편적인 인생의 길임을 그 순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p. 244
책상 위에는 유서라고 하기엔 너무 간단한 한 줄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한다.
세상은 거대한 고아원이다
p.296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 = 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랑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영어나 불어의 문법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왜, 정작 모두가 듣고 살아야 할 말의 예절에는 소홀한 것인가. 왜 협력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는가. 말하자면 왜, 비교평가를 하는 것이며 너는 몇 점이냐 너는 몇 등이냐를 외치게 하는 것인가. 왜, 너는 무엇을 입었고 너는 어디를 나왔고 너는 어디를 다니고 있는가를 그토록 추궁하는가.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왜 그토록 못을 박는가. 그토록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왜이며, 그 조항들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냥 모두를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냥 모두가 그 뒤를 쫓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러워할수록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누구이며, 보이지 않는 선두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p.299-300
열심히 산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삶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무료, 해도...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고 나는 믿었다. 무료하므로 돈을 모으는 것이다... 무료해서 쇼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것이다... 큰소리치는 인간도... 결국 독재를 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도... 실은 그래서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잘 살아보자고 모두들 노래하던 시절이었지만, 그 역시 삶이 아니라 생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잠깐의 삶을 살다가(···) 이제 생활을 하는 인간이 되어(···) 나는 그 속에 섞여 있었다.
p.306
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남자들은(···) 마치 킹콩과 같은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시키지 않아도 엠파이어스테이트를 오르고, 가질 수 없어도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 자신의 동공에 새겨진 한 사람의 미녀를 찾아 쿵쾅대며 온 도시를 뛰어다닌다. 어떤 악의(惡意)도 없지만 그 발길에 무수한, 평범한 여자들이 상처를 입거나 밟혀 죽는다.(···) 빌딩을 오르고 떨어져 죽는다 한들, 미녀가 어깨를 기대는 남자는 따로 정해져 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세상이다. 전기와, 전파와, 원자력을 사용하는... 게다가 민주주의라는... 인간의 세상인 것이다.
p.307-308
어쨌거나 사무실은 정말이지 그럴 듯한 곳이 되어갔다. 뭐랄까, 순식간에 반 평균이 쑤욱 올라간 느낌이었고... 쇼핑... 쇼핑... 쇼핑... 이 정도는 걸쳐야, 이 정도는 발라야, 그리고 결국... 이 정도는 고쳐야-로 스펙의 평균도 상승해 버린 것이었다.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중산층>이란 단어가 한창 사회의 이슈가 되던 무렵이었고... 이 정도는 몰아야... 이 정도는 벌어야... 결국 이 정도는 살아야-사는 구나, 소리를 듣는 세상이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p.310-311
세상의 평균은 그렇게 또 한 치 높아진다. 세상은 과연 발전한 것인가, 나는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대학을 나와야 하고, 예뻐지기까지 해야 한다. 차를 사야 하고, 집을 사야 한다. 이런 내가, 대학을 가는 순간 세상의 평균은 또 한 치 높아진다. 이런 내가 차를 사는 순간에도... 하물며 집을 사게 된다면 세상의 평균은 또 그만큼 올라갈 것이다. 왜 몰랐을까,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이 순간 세상의 평균은 올라간다. 누군가를 뒤쫓는 순간에도 세상의 평균은 그만큼 올라간다. 나는 생각했었다. 누군가(···)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사는 게 별건가 하는 순간 삶은 사라지는 것이고, 다들 이렇게 살잖아 하는 순간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할 세상이 펼쳐진다. 노예란 누구인가? 무언가에 붙들려 평생을 일하고 일해야 하는 인간이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한다. 잘 좀 살아, 피리를 불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멋지게... 피리를 불어주세요, 더 예쁘게... 쫓고 쫓기는 경쟁은 그 뒤에서 시작된다. 서로를 밀고 서로를 짓밟는 경쟁도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멜른의 어떤 쥐들도 피리 부는 자를 앞서 뛰진 못했지
p.319
그런데 그렇게 생활이 돼? 월급만으로 말이야, 주제 넘는 질문을 던질 때도 있었다. 무릴 해서라도 사는 거야. 그건 투자니까... 즉 자신을 위한 투자지. 투자... 라고? 그럼, 대우가 얼마나 달라지는데. 몰라?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란 거. 즉 어느 정도 레벨이 있어야 그 레벨의 남자들도 눈길을 주거나 하는 거라구. 내 처지가 이렇다고 투잘 하지 않으면 결국 평생 그 레벨로 사는 거니까... 집값 오르는 거 봐. 무릴 해서라도 사두면 절반이 빚이라도 프리미엄이 붙게 되잖아. 그럼 되팔고 더 큰 집을 살 수 있는 거랑 비슷한 거지. 빚도 재산이란 말 몰라?
p.323
나... 이쁘지 않아?(···) 예뻐, 하고 나는 간단하게 답해 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아니 그냥... 확인해 보고 싶어서. 인간은 과연 이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끝없이 비교하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다함께 피리소리를 쫓아가면서도 난 저렇게는 살지 않아, 스스로를 믿고 있다.(···) 밟고 밀치고 앞서고 따돌리고... 쥐를 죽이는 건 함께 뛰는 쥐들이고, 피리를 부는 자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살찐 쥐도 앞선 쥐도 재빠른 쥐도... 피리를 부는 자에겐 언제나 다 같은 쥐들일 뿐이니까. 결국 아무리 서로를 비교한다 해도, 다 이 뛰는 쥐들은 다 같은 쥐들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리고 이 삶을 <다수결>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삶은...(···) 뭐하는 짓일까?
p.325
쥐를 죽이는 건 함께 뛰는 쥐들이고, 피리를 부는 자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살찐 쥐도 앞선 쥐도 재빠른 쥐도... 피리를 부는 자에겐 언제나 다 같은 쥐들일 뿐이니까. 결국 아무리 서로를 비교한다 해도, 다 이 뛰는 쥐들은 다 같은 쥐들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리고 이 삶을 <다수결>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삶은...(···) 뭐하는 짓일까?
p.325-326
난 말이야...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 뭐가? 내가 볼 땐 그래, 그래서 경제력이 좋은 남자를 만난다거나 그런 일들... 그러니까 일단은 그래서 눈에 들어온다는 얘기지. 직업을 본다거나 집안을 따진다거나... 말하자면 그런 배경이 있어야 오우, 케이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에 맞는 결혼을 한다거나 그에 따른 윤택한 출발을 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영리활동(營利活動)이란 얘기지. 그것이 좋고 나쁘고의 얘기가 아니라... 뭐랄까, 그런 활동을 통해 어쨌거나 그만큼의 이익을 얻은 거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거나, 생일인데도 그냥 넘어갔다거나... 말했듯이 그 언니가 몸이 아픈데도 바쁘다며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야. 그런 건 그야말로 욕심인 셈이지. 즉 이윤을 추구해 놓고(···) 자기최면이라도 하듯 이건 연애야, 그래서 우린 결혼한 거야 라고 다들 믿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고는 사랑이 식었다는 둥, 환상이 깨졌다는 둥... 애당초 동기가 된 영리활동에 대해선 끝까지 부정하면서 말이야.(···) 즉 투명하게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결혼생활에 사랑이 없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어. 그러니까 정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도 실은 지극히 희귀하다는 얘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착각하고 포장을 일삼는 이유도 마찬가지지. 실은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거야. 사랑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거라구.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영리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는 기분, 사랑을 받는 기분... 같은 걸 느끼고도 싶은 거야.
p.328
인간은 기대를 걸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포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신의 기대대로 살 순 없다 해도, 그래서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말이다.
p. 355
천사들은 대개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상처를 지닌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미모와 권력을 쥔 자들이 아니라 상처, 투성이의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p.361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p.374-375
한국을 떠나온 것에 후회도 없고...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곳에서 여자가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살아야 했던 게 아닌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아닌 매우 이상한 그 어떤 것... 상처받고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쨌거나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선 그냥 <여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일 거예요. 그냥 여자... 성형을 받거나 굳이 예뻐야 하거나 하이힐을 신지 않아도 되는(···) 물론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한다 해도 자신의 시각으로 남을 비하할 수 없다는 게 상식인 사회란 거죠. 사회의 가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동등한 기회를 얻고, 그 대가를 바랄 수 있는... 그리고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저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떤 생각을 하실진 몰라도
그런 면에서 제가 한국에서 겪은 일들은 매우 야만적인 것이었어요. 야만이죠. 아름답지 않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선 외출하기가 두려운 사회란 건요.
p.408
그리고 저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평범한 얼굴에 속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런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사이 제가 예뻐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세월이 흐르고... 노인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얼굴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p. 416 (작가의 말)
권력과 부가 남성에게 부과된 힘이었다면, 미모는 소수의 여성만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여성은 아름다워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류가 설정한 진화의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는 <힘>을 얻기 위해 진화해 왔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이 세계에서 유리해지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와 아름다움은 우리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으론 <시시해>.(···)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하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 들려진 유일한 열쇠는 <사랑>입니다. 어떤 독재자보다도, 권력을 쥔 그 누구보다도...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 대책 없이 강한 존재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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