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

두괴즐 2011. 7. 12. 16:23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저자
정이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3-09-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내추럴 본 쿨 걸'에게도 나름대로 진정성은 있다고 주장하는 작...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밑줄]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



 차가 없는 남자애는 피곤했다. 우선 폼이 안 났다. 대학교 3학년이나 된 이 나이에 아직도 강남역 뉴욕제과 앞, 압구정동 맥도널드 앞 같은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한다는 건 쪽팔리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의대생이라 해도 차가 없다는 건 심각한 감점 포인트에 해당했다.(···) 정녕 완벽한 남자애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좀 우울해졌다.(···) 민석이었다. 지방 캠퍼스에 다니는 데다 키스 하나 제대로 못하는 어리버리한 민석이를 몇 달째 만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애의 스포츠카 때문이었다.(···) 아파트 입구를 나와, 내가 타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자동차까지 가능한 한 천천히 걸어가 도어를 당길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12-13


 나도 늘 하던 대로 가벼이 제지했다. “이러지 마. 이러는 거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러나 내 말에 아랑곳없이 원피스 등판의 지퍼 쪽으로 널름널름 뻗치는 손가락 힘이 제법 완강했다. 입에서 내뱉는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유리야. 너 때문에 미치겠어. 나 널 너무 사랑하나 봐.”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15-16


 어쨌든 오늘도, 누구에게도, 낡은 팬티를 보여주지 않았다. 자주 쓸 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오럴은 최고의 대안임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닥쳐와도 돌아가거나 피해 가는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참고 기다리며 지키면, 결국은 달콤한 열매를 얻게 된다. 17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 20-21


 “낳을 수는 없겠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냥 그렇다는 거야. 오빠 시험 붙을 때까지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너 그 오빠랑 결혼하려구?” “당연한 거 아니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는 유리컵 속의 얼음 조각을 와드득 깨물었다. 내가 자신들의 순수한 사랑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쿨쩍쿨쩍 콧물을 들이마시면서도 혜미의 음성은 비장하고 결연했다. “어제 오빠가 우리 아가한테 미안하다고 막 울더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면서. 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야. 사랑했으니까.” 나쁜놈. 가랑이를 벌리고 중절 수술을 받을 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이제 겨우 착상된 수정란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 나는 진심으로 혜미가 가여워졌다.

 친구에 대한 나의 뜨거운 연민은,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마자 깨끗이 사라졌다. 혜미가 아무렇게나 어깨에 둘러멘 오리지널 샤넬 백에서 원격 무선 조종기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카페 앞에 세워진 병아리 색 뉴비틀의 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 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24-25


 나에 대한 그의 매혹이 진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 그는 나더라 은방울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인터넷 검색 엔진에 들어가 ‘은방울꽃’을 찾아보았다.(···) 다음날부터 나의 컨셉트는 청순함이었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흰색이나 파스텔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정성껏 드라이하여 어깨쯤에서 찰랑이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 되었다. 스킨십에 있어서도 조신하려고 애썼다. 그렇다.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27


 아무것도 없다! 타월 위에는 한 점의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봐도 순백의 시트 위는 깨끗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고, 심한 운동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트 위에 천천히 커버를 덮는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먹먹하다. “너 되게 뻑뻑하더라.” 33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그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면세점에서 그냥 하나 사놨던 거야.” 높낲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루이뷔통 쇼핑백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았다. 순간, 맹렬한 불안감이 솟구쳤으나 곧 가라앉았다. 집에 가자마자 보증서를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조용히 운전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서, 나는 마음속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33-35



[밑줄]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hwp



[밑줄] 정이현,『낭만적 사랑과 사회』.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