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황정은,『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두괴즐 2011. 8. 20. 19:28

 


백의 그림자

저자
황정은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10-06-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랑을 말하는 독특한 연애소설!일곱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미지 출처: http://hwangjh.egloos.com/5374658


[밑줄] 황정은,『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다.

개연이요?

필연이라고 해도 좋고요.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17-18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해 보세요, 가마.

가마.

가마.

가마.

가마.

이상하네요.

가마.

가마, 라고 말할수록 이 가마가 그 가마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죠. 가마.

가마.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37-38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39


(···)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95


당장 철거되는 것은 다섯 개의 건물 중 가동 하나뿐인데도, 기사 제목이 일률적으로 전자상가 철거로 마치 상가 전체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듯 구성된 것을 두고는, 그런 식으로 미리 상권을 죽여서 이후의 일을 쉽게 도무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죽어 가고 있는 놈더러 자꾸 죽어라, 죽어라, 한다며 여 씨 아저씨는 입맛을 잃은 듯한 얼굴이었다. 108-109


가동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는 나는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넓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앉아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작네요, 라고 멍하게 말하자 무재 씨가 빈 우유갑을 반으로 접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다 어디로 갔을까요. 111-112


은교 씨는 슬럼이 무슨 뜻인지 아나요?

······가난하다는 뜻인가요?

나는 사전을 찾아봤어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 하며 무재 씨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

슬럼?

좀 이상하죠.

이상해요.

슬럼.

슬럼.

하며 앉아 있다가 내가 말했다.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라고 무재 씨가 자세를 조금 바꿔 앉으며 말했다. 112-113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114-115


더도 말고 지금만 한 장소를 찾아내기도 어렵다고나 할까, 막상 거길 나와 부근에 다른 장소를 얻으려니 두 평 세 평일 뿐인 본래의 공간이 아쉬울 뿐이라고나 할까. 공방에서 하는 일이 쇳덩이를 받고 보내는 일이라서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없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요?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

······

어디로 갈까.

······

······

······

조용하네요.

네.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라며 무재 씨는 물끄러미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116-117


녹지 공원에서는 매주 축제가 벌어졌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이면 아침부터 철제 빔이나 조명 기구 등을 잔뜩 실은 트럭이 도착했고,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정오쯤이면 잔디밭 위에 무대가 완성되었다.(···) 정오가 조금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스피커가 울고 난 뒤에 음악이 이어졌고, 축제 진행자가 마이크에 대고 외치는 소리,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 여러 사람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 등이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나동에서도 공원 쪽으로 바짝 면한 수리실에서는 창을 닫아도 들려오는 소음을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어서,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며 행사가 마무리되길 기다려야 했다.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여 씨 아저씨는 씨발 씨발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며 당구장으로 내려갔다.(···)

그런 방식으로, 축제가 벌어지면 나동 북쪽 위벽과 정면 진입로엔 장막이 걸렸고, 그 뒤쪽엔 아무것도 신경 쓸 것이 없다는 듯 고성과 방가가 이어졌다. 장막 저편이 시끌벅적해질수록 나동은 없는 듯 어두워지고 적막해졌다. 나동의 남쪽 외벽과 엘리베이터 곁엔 사십 년 된 나동이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십 년은 더 장사를 할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현수막과 알림 쪽지가, 어째선지 몹시 더럽혀진 채로 붙어 있었다. 127-128


나동에 관한 협상은 더디게 진행되는 듯했다. 가동의 사정과는 다르게 나동은 워낙 잘게 쪼개진 상태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유되고 있기 때문에 협상이 수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공기업에서 쳐준다는 값이 마땅치 않아 소유주들이 망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와중에 나동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서 앞쪽의 몇 구역과 공기업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나머지를 민간에 맡긴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민간이라면,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요?

민간이라면 돈이지.

돈인가요?

돈이야.

돈이라 무서운 거야, 라면서 여 씨 아저씨는 정부가 첫 삽을 보란 듯이 뜨고 난 뒤에 삽자루를 슬쩍 넘긴 셈이라며 어떻게든 그런 식이라고 씨발 씨발, 하고 말했다. 128-129


우리가 사는 집의 뒤쪽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박스를 줍는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동네에서 거기까지 박스를 주우러 온 할아버지를 맞닥뜨려서, 다툼이 일어난 거예요. 뭔가 시끄러워서 나가 보니 대낮에 길 복판에서 박스와 넝마 몇 가지를 두고 고래고래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어요. 나로선 듣도 보도 못한 욕설이 오가고 두 노인이 서로 격렬하게 저주하며 상대방의 손수레에서 넝마를 끄집어내 던지다가 할아버지는 가고 할머니가 남았거든요. 할머니가 분하고 원통하다고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거든요.(···) 한낮에 그걸 보고 나도 집으로 들어갔는데 해 질 무렵에 나와 보니 그대로 수레가 남아 있어서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는 말았는데 이날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였어요.(···) 자식들이 찾아와서 장례를 치르고 난 뒤로도 그녀의 손수레는 며칠이고 모퉁이에 남아 있었어요. 실린 것도 몇 가지 없이 박스 몇 개하고 스티로폼 조각하고 비닐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142-143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예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4


하늘이 굉장하네요.

네.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별이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고.

······무재 씨,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도시일까요?

하며 무재 씨가 웃었다.

아무튼 이런 광경은 인간하고는 너무도 먼 듯해서, 위로가 되네요.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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