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박민규,『핑퐁』

두괴즐 2011. 7. 16. 12:25

 


핑퐁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창비 | 2006-09-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계가 '깜빡'한 왕따들, 인류의 운명을 걸고 탁구를 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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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박민규,『핑퐁』



세계는 다수결(多數決)이다.(···) 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결정이다. 참고, 따라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수인 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28-29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조용하고 착한 애였어요. 믿기지 않아요. 왜 좀더 잘해주지 못했나 후회가 돼요. 끝끝내 버튼을 누르지 않은 까닭은-치수 때문도, 혹시 남아 있을 내 삶의 희망 때문도 아니었다. 눈물을 닦으며 다시 수업에 열중할 마흔한명의 <다수인 척> 때문이었다. 스스로는 단 한번도 나를 괴롭힌 적이 없다 믿고 있는, 그러니까 인류의, 대표의, 과반수. 조용하고 착한, 인류의 과반수. 실은, 더 잘해주고 싶었을, 인류의 대다수. 30


 쎅스를 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수인 척 쎅스를 하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 나는 누군가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가 싫었다. 정말이지, 그렇다. 차라리 마리가 양이라면, 나는 즐거이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싫다. 인간이라면, 그러니까 나는 누구와도 관계하고 싶지 않고, 누구와도 관계되고 싶지 않다. 제발이다. 제발, 그런데 왜, 그런데, 왜-날 내버려두지 않는 거지? (····) 꿈이 있다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 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시점에 면허를 따고, 어느날 들이닥친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건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34


(···) 퐁. 핑 퐁. 세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우리의 랠리가 시작되면서였다. 처음엔 말없이, 그러다 한참 동작에 익숙해지자 어느 순간부턴가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체험이었다. 공을 받는 순간 말이 나오고, 공이 네트를 넘는 순간 말은 끝이 난다. 한 소절 한 소절 정확한 템포로, 그래서 마치 노래를 주고 받는 기분이었다. 긴 말을 하기 위해선 또다시 한 박자를 기다려야 했다. 신체의 동작에 따라 뱉는 것인데다, 상대의 동의 없이는 절로 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공평한 느낌이었다. 아, 이것이 대화(對話)구나. 60


 난 말이야··· 기본적으로 토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의견을 제대로 낼 수 없다면 서로 곤란한 게 아닐까? 시민사회야말로 토론을 토대로 발전해온 건데.(···) 어떤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계는-전체적으로 대화를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어. 비록 점진적(漸進的)이긴 해도 언젠가 그 사실을 니들도 알게 될걸. 전체적으로? 전체적으로. 다수가? 물론 다수가.(···) 토론···말이야? 토론··· 같은 거. 토론으로 이기지 못할걸. 누구를? 인류가, 인류를. 76-77


 디디티가 검출된 에스키모와 펭귄 이야기 아니? 디디티? 뭐. 아황산가스와 비슷한 거라 여기면 돼. 그러니까 미국의 클리어랜드란 곳에 모기를 없애려 뿌린 디디티가 생체농축과 먹이연쇄를 통해 극지까지 갔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대단한데. 즉 에스키모처럼 동떨어진 인간에게도 인류의 결과가 집약될 수 있다는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실은 그래서 인류의 모든 걸 지녔다고 말할 수 있지. 디디티를 살포하던 인간이 그 결과를 알았을까? 에스키모는, 자신이 지닌 결과의 원인을 알 수 있을까? 즉 인간이란 누구나 인류의 원인이자 결과란 얘기지. 그리고 서로를 모르는 거야. 말이 돼? 86


 올해 쌍둥이를 이 학교에 보냈거든. 그런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지 뭐냐. 아이들 때문에 상담을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교장을 만났는데 난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글쎄 우리 애들이 조류의 뇌를 가지거나 파충류의 뇌를 가졌다지 뭐냐. 그래서 그 문제로 교장과 심한 설전을 벌이고 오는 길이다. 그건 좀··· 심란하셨겠어요. 심란하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건 아버지인 내가 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그래서 내 말은 파충류는 아니지 않느냐, 그건 뭔가 검사에 문제가 있다, 교장에게 어필을 한 거란다. 교장은 뭐래요? 교장의 말은 쥐나 파충류나 뭐가 다르냐는 거지, 어차피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 쥐하고 파충류가··· 얼마나 다른데! 110-111


 너무 많은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어쩌자고 이렇게 갈수록 늘어나는 걸까. 나는 불안했다. 세끄라탱도, 따지고 보면 모아이도, 뭐 치수 같은 변태는 말할 것도 없고, 실은 나 역시도··· 바보다, 맛이 간 인간들이다. 알 수 없다, 이렇게 교육을 많이 받는데도 자꾸만 늘어난다. 가만히, 어느정도 멀쩡해 보이다가- 이상한 망상을 하고, 불을 지르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누군가를 찌르고, 한다. 알 수 없다. 나는 지치고 문득 슬펐다. 115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 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동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이 듀스포인트야. 117-118


결국엔 폼(form)을 완성하는 거야. 끝없이 계속 가다듬는 거지. 실은 공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쪽의 다듬은 폼을, 제세를 보내는 거야.(···) 탁구에서 졌다는 말은, 결국 상대의 폼이 나의 폼보다 그 순간 더 완성되었다는 뜻이야.(···) 라켓에 닿은 공은 순식간에 일주일의 폼에서 삼십년의 폼으로 성질이 변해버리지. 그건 이동이야, 공간과 차원의 이동. 오래전 탁구가 와프와프라 불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지. 즉 한쪽의 폼을 다른 쪽에 전이하는 수단이었던 거야. 그게 탁구의 정체야. 저편의 완성된 폼을 리씨브하면서, 또 스매시하면서 이쪽의 폼을 완성해갈 수 있는 거니까. 우주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의 폼을 전달해왔어. 141


 그런데 공이 지금처럼 네트에 걸리며 떨어진 거야. 사십오억년의 폼으로도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지. 이럴 땐 모아이가 나에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어. 그게 뭐지?(···) 럭키!(···) 그렇지, 바로 이 순간 자신의 득점에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외쳐주는 거야. 탁구의 중요한 예절이지. 인류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거야. 인류의 폼이 반격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순간 이런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지. 그래서 실은, 인류는 다 함께 <럭키>라고 외쳐야만 해. 공이 왔던 곳을 향해, 자신들의 자세를 받아주는 곳을 향해서 말이야. 142


 핑퐁 핑퐁, 우리는 교대로 로봇의 공을 받는 연습을 했다. 세끄라탱을 상대로 스매시를 할 때와는 달리, 참으로 생각없고 반사적인 랠리가 이어졌다. 다르지? 달라요. 조건반사만으로도 탁구를 치는 건 가능하단다. 조건반사만으로도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하듯이, 그래서 실은 비둘기도 탁구를 칠 수 있는 거란다.(···) <스키너 박스>라는 실험공간을 고안해낸 거야. 조작된 조건 속에서, 이를테면 쥐가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떨어지고 그걸 먹을 수 있게 하는 거야.(···) 탁구를 치는 비둘기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걸작이었단다.(···) 그 시합이 내 탁구인생에 있어 전한점이 된 사실이란다. 아, 이젠 못 당하겠구나. 먹고살고자 하는 이 조건반사를··· 내가 당해내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 비둘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어떻게 되긴,(···) 그렇게 살다 죽었지. 150-151


 서서히, 그도 이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부족했지. 이유는 생활, 바로 생활 때문이었어. 마침 이웃의 월터씨가 지붕 손질을 부탁하기도 했고, 비서실의 마거릿이 함께 술 한잔 하는 건 어떠냐고 전화로 물어왔기 때문이야. 게다가 일요일엔 추수 감사절을 준비하는 대규모 예배가 있었지. 예배를 마치고 나니 또 어지간히 피곤이 몰려왔어. 부족한 잠을 자느라 또 지구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렸지.(···)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게 되었지. 그후의 세계는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거든. 175-176


인간의 해악(害惡)은 9볼트 정도의 전류와 같은 거야. 그것이 모여 누군가를 죽이기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거지. 그래서 다들 다수인 척하는 거야. 이탈하려 하지 않고, 평형으로, 병렬로 늘어서는 거지. 그건 길게, 오래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야. 전쟁이나 학살은 그 에너지가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만 볼트의 파괴자가 남아 있을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수천 볼트의 괴물들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남는 건 모두 미미한 인간들이야. 독재자도 전범도, 모두가 실은 9볼트 정도의 인간들이란 거지. 요는 인간에게 그 배치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이기(利己)가 있다는 거야. 인간은 그래서 위험해. 고작 마흔한명이 직렬해도 우리 정도는 감전사(感電死)할 수 있는 거니까. 180-181


 그 순간 그가 세계를 <깜박>한 게 아니라 세계가 그를 <깜박>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모아이, 그러고 보니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듯해. 나 여태 그걸 <깜박>하고 있었어. 잘 들어 못, 여기 온 후로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해왔어.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즉 핑퐁이란 건, 내 생각에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간의 전쟁인 셈이야. 219  


 듀스스코어의 역사를-인류가 창안한 문명과 문화를, 철학과 예술, 과학과 종교를, 지식과 진화를, 또 거의 같은 분량의 전쟁과 학살, 침략과 정복, 지배와 핍박, 편견과 오만, 범죄와 폭력, 무지와 야만을 경험하게 될 거야. 221


 이들은, 스키너 박스에서 길러진 쥐와 새입니다.(···) 먹이를 주는 조건반사로 평생을 테스트당하고 길러진 존재들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먹기 위해 공을 쳤습니다. 그것도 정확히, 원하는 조건을 달성해야만 먹이가 주어져왔습니다. 휴식시간엔 교양과목으로 티브이를 시청했습니다. 231-232


 축하···라니요?(···) 쎄트 스코어는 3:0, 그리고 4쎄트 역시 8:1로 뒤진 시합이었어. 결과는 그래.(···) 거기서··· 끝이 났나요? 그래, 쥐와 새의 죽음으로··· 쥐와··· 새가 죽었다구요? 죽었어, 그래서 중지된 거지. 왜, 왜 죽은 거죠?(···) 과로사(過勞死)였어. 224




[밑줄] 박민규,『핑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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