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문학

[밑줄] 박민규,『지구영웅전설』

두괴즐 2011. 8. 3. 14:49

 


지구 영웅전설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3-06-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8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 다소 가볍게 다가오는 만화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밑줄] 박민규,『지구영웅전설』, 문학동네, 2003.



 “나도 슬슬 죽을 때가 되었군.”

슈퍼맨이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소련의 몰락이 현실로 드러난 1991년의 일이었다. 두 귀를 의심하던 내가 결국 눈물을 훔쳐내자, 슈퍼맨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슬퍼하지 말게, 친구. 정말로 죽는 건 아니니까.”

 “정말?”

 “물론.”

 “그럼 왜 그런 얘길 한 거야?”

 “소련이 죽었으니까. 그건 곧 나도 사라지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야. 힘의 대립은 끝이 났다. 이제는 또다른 이름의 정의가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모르겠어.”

 “어려운데.”

 “그럴 거야. 황인종의 머리로는 풀기 힘든 문제지. 오, 미안. 농담이야. 너의 본질이 희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걸. 그치?”(···)


 “그럼 새로운 리더는 누구지?”(···)

 “이젠 내가 나설 차례로군.” 부르스 웨인이 말했다.

 “물론이지 친구.” 슈퍼맨이 대답했다.(···)

 1991년의 일이었다.

 그 교감에 대해, 우리는 ‘워싱턴 콘센서스’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19-21


부르스 웨인은 한 사람의 영웅이기에 앞서 세계 최고의 재벌이었다. 초능력에 의존하는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그는 막대한 자본과 첨단의 장비로 세계의 영웅이 된 인물이다. 지하 이십층 깊은 속으로 수억만 달러의 장비가 매설된 ‘정의의 본부’를 옮긴다는 발상도, 그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의의 본부’는 새로운 정의를 상징하는 국제통화기금본부의 땅속, 백 미터 아래로 옮겨졌다. 기존의 ‘정의의 본부’가 철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1-22


 실제로 그 당시엔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따라하거나 슈퍼맨을 흉내내다 죽은 아이들이 꽤 여럿 있었다. 이미 신문에도 몇 차례나 그런 죽음이 보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황당한 일도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다. 단언컨대, 목에 두른 빨간 보자기를 보는 순간 경찰은 단정지을 것이다. 또 슈퍼맨을 흉내낸 것이로군. 신문기자도 포르노의 더러운 추문 따위는 파고들 겨를이 없을 것이고, 담임도 죽음 앞에선 굳게 입을 다물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나의 자살을, 단지 ‘그럴 수 있는’ 평범한 죽음으로 가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러닝의 가슴팍에 커다란 ‘S’자를 그려넣었다. 비록 빨간색이 아닌 검은색 사인펜이었지만, 이 정도면 알아보겠지, 하며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채점을 죽음보다 싫어했던 나는, 여간해선 빨간색 펜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에도, 지진아와 슈퍼맨 사이에는 그 정도의 극복하기 힘든 핸디캡이 도사리고 있었다. 34-35


 “저런 놈 하나쯤 키워주는 것도 나쁜진 않을 거야.”

 놀랍게도, 선뜻 예스 버튼을 누른 인물은 배트맨이었다. 원더우먼과 로빈조차도 깜짝 놀란 선택이었고, 슈퍼맨의 양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게 한 결정이었다.

“앞으로는 말이야,” 배트맨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런 놈도 필요한 시대가 올 거야.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지. 그러니까, 일종의 샘플로 생각하면 쉬울거야. 베트남을 봐. 그런 샘플이 있었기 때문에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생겨난 거라구.”

 “그래도 원칙을 어길 순 없어.”

 슈퍼맨이 단호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아니, 이제 곧 변화가 올 거야. 힘은 물론 언제라도 필요한 것이지만, 또다른 형태의 대비도 필요하다는 말이지.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시대를 준비해왔어.(···) 더군다나 저 꼬마는 자네 흉내를 내며 건물에서 뛰어내린 소년이 아닌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런 무모한 적격자는 일부러 찾기도 힘들다는 생각이야.(···) 이참에 아예 흑인 히어로도 한 놈쯤 만들어놓는 게 어떨까? 49-50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선 수많은 시련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한시도 바나나맨이 되기 위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배트맨의 조언에 따라 ‘신체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신체개발에 힘썼고, 슈퍼맨의 조언에 따라 남미의 ‘Scool of America’1)에 입학,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닥터 윌슨으로부터 영웅이 반드시 알아야 할 철학과 과학의 사고체계를 습득하고, DC 코믹스의 크리에이터들이 지시하는 바나나맨으로서의 일거수일투족을 섬세하게 마스터했다. 그 모든 과정을 끝냈을 때 슈퍼맨은 나에게 영웅의 칭호와 함께 정식 시민권을 수여해주었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52-53


 얘야, 물론 슈퍼맨에겐 충분한 힘이 있단다. 빨갱이들뿐 아니라 이 지구를 통째로 없애버릴 만한 힘이! 하지만 생각해보렴. 만약 전쟁도 없이 그들을 쓸어버린다면 우리나라의 경제는 어떻게 되겠니. 이 땅의 군수산업은, 또 군수산업과 연결된 모든 기간산업들은 말이다. 또 우리의 경제가 흔들리면 그 밑에 딸려 있는 자유세계의 경제도 보통 문제가 되는 게 아니란다. 슈퍼맨은 그 모든 것들을 아울러 판단해, 이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란다.(···)

 아아,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적과의 싸움에 임하면서도 조국과 자유세계의 경제를 걱정하는 당신의 뒷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그런 배려에 힘입어 우리의 아메리카는 눈부신 번영을 더해갔고, 덩달아 자유세계의 국가들도 분에 넘치는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지요. 이는 모두, 귀찮아도 전쟁을 해주신 당신의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66


 “(···)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우리의 손익(損益)과 본분에 관한 것이란다.”

 “손익이라구요?”

 “그래, 두고두고 사과를 하나씩 꺼내먹어야 하니까. 만약 상당수가 썩어버린다면, 우리 대신 누가 그걸 먹겠니? 바로 벌레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먹을 걸 빼앗기는 게 되는 거란다. 사과야 어떻게 된다 쳐도, 그걸 빼앗긴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지구 위에 어떤 나라가 생긴다면, 일단은 그 나라를 ‘정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야. 만약 그렇지 못하면, 썩어버리거나 나쁜 무리들의 먹이가 될 게 뻔하니까.”

 “빨갱이요?”

 “그래, 빨갱이! 그래서 그 모든 나라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거야. 그건 우리의 사과를 상자에 담는 일이고, 그 사과를 썩지 않게 보관하는 일이란다. 알겠니? 그리고 이 지구를 위해서도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란다.”

 “지구를 위해서요?”

 “물론이지. 이를테면 석유를 생각해보렴. 또 그 외의 모든 자원들을 말이다. 만약 소련이 어떤 나라를 차지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니? 그 나라의 자원은 모두 나쁜 일을 하는 데 쓰여 고갈되고 말겠지? ‘정의’를 위해 쓰여야 할 자원이 나쁜 일을 하는데 쓰인다는 건 보통 아까운 게 아니지. 또 그건 이 지구의 환경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기도 하고.”

 “아아, ‘정의’를 지키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한 것이군요.”

 “물론 그래서 힘이 필요한 것이란다.”(···)

 “그래, 힘! 힘은 곧 ‘정의’와 같은 것이란다. 소련의 가장 나쁜 점이 무엇인지 아니? 더럽고 추잡한 빨갱이들의 사상? 아니, 그건 두 번째에 불과해. 뭐니뭐니해도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건 나와 맞먹는 힘을 가지려 드는 것이란다.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지.”

 “서로 의논을 해보는 건 어떤가요?”

 “절대 안 돼. 그건 타협의 문제가 아니란다. 왜? 내가 가진 힘을 한번 생각해보렴. 그건 이 지구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나 외의 존재가 그런 힘을 가져서는 안 되는 거야. 나라면 안심할 수 있지. 왜? 내가 곧 이 세계의 ‘정의’니까.”

(···)

 “이제 ‘정의’의 실현이 어떤 것인지 좀 알겠니? 그건 결국 지구 전체를 주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란다. 즉, 썩은 사과가 하나도 없는 거대한 사과상자를 가지는 것이지.” 67-69


 이곳은(···) 최악입니다. IMF의 위기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실은 꾸역꾸역 살아야 할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물론 저는 예외입니다.(···) 저에겐 ‘잉글리쉬’가 있으니까요.(···) 이곳은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또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들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만 오면 미국을 다녀오겠다고, 여건만 되면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그런 세계화를 향한, 거대한 열기와 에너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는 어린이들과, 모든 문화의 흐름, 또 안보의 체계랄까 그런 문제들과, 나스닥에 틀림없이 연동하는 주식시장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랜드 에리어의 한복판에 내가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은, 비로소 이 세계를,

 당신의 손에 맡긴 듯하다고 말입니다. 70-71


이상하게도, 저는 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여객기의 모습에서 언뜻 당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물론 그 엄청난 폭발력도 당신의 힘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 불과하겠지만, 뭐랄까 그래서 저는 그 무모함의 근원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남아 있는 ‘나쁜 무리’들은 분명 당신을 닮아가고 있으며, 또 일종의 내성(耐性)마저 생기는 게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평범한 인간인 그들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심어준 것일까요. 잘은 몰라도, 저는 그것이, 당신이 너무 ‘슈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73


 “‘마운틴’은 일종의 통치행위야. 원래는 침팬지들의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지.(···)”(···) 결국, 그 ‘마운틴’을 나도 보게 되었다. 국제무역기구(WTO) 창설을 위한 막후회담이 정의의 본부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94년의 일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실질적인 의장이나 다름없는 부르스 웨인이 단상에 올라섰다. 반듯하게 연설문을 내려놓은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홀을 한 번 둘러본 후 손가락으로 로빈을 지목했다.(···) 즉각 로빈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엎드렸다. ‘마운틴’이 시작되었다.

 퍽 퍽 퍽 퍽.

 그것은 대단한 소리였다. 한 손으론 연설문을 넘기며, 또 한손으론 로빈의 허리를 잡은 채 웨인은 ‘마운틴’에 몰입했다. 물론 입으로는, 쉴새없이 연설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대표들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연설은 끝이났다.

 짝 짝 짝 짝.

회담의 참석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기 때문에, 진행요원으로 서 있던 나마저도 엉겁결에 박수를 쳤다. 뭐랄까, 웨인의 ‘마운틴’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었다. 79-80


 그래, 모두가 ‘마운틴’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마운틴’ 말이다.(···)

 모든 건 놈의 머릿속에서 나왔어. 국제통화기금(IMF)도, 곧 창설될 국제무역기구(WTO)도 모두 놈이 만들어낸 시나리오지. 결국, 놈이 원하는 건 이 세계를 ‘마운틴’하는 거야.(···) “그게 가능할까?”

 “바보, 이미 끝장이 났다니까.”(···)

 “놈은 절대로 싸우거나 하지 않아.(···) 놈이 그럴 수 있는 건 다 슈퍼맨이 있기 때문이지. 일종의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우선 슈퍼맨이 나서서 우리의 뜻을 거스르는 무리들을 싹 쓸어 버리는 거야.(···) 그리고 싸움으로 궁핍해진 그 나라에 당분간 주둔하며,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거야. 왜? 우리는 ‘정의’의 사자니까. 그러고 나면 놈이 나서는 거지. 한 무더기의 돈을 들고.”(···)

 “그러니까, 돈으로 ‘마운틴’을 한다고?”

 “물론이지. 그게 가장 간편한 방법이거든.(···) 그 ‘관계’만 정립해놓으면 언제든 자기 맘대로 ‘마운틴’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자유세계는 대부분 그 관계가 정립된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지.(···)” 83-84


 “(···) 너 지금까지 내가 유엔총회에서 몇 번이나 ‘마운틴’을 당했는지 모르지? 세계 각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맙소사 불쌍하게 엉덩이를 내밀고 그 짓을 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건 내가 잉글랜드에서 왔기 때문이지.(···) 내 존재 자체가 놈들에겐 콤플렉스의 대상이거든. 그런 만큼 정복왕 윌리엄과 사자왕 리처드, 그리고 퀸 엘리자베스와 빅토리아 왕가의 피가 흐르는 이 몸이야 말로 ‘마운틴’의 위상을 높이기에 최고의 재료지.(···)”(···)“(···) 이제 놈은 더 높이 날아오르겠지? IMF와 WTO 두 개의 날개를 활짝 펴고······(···)” “ 이 바보야. 그런 게 아냐! 예전엔 모든 게 내 것이었단 말이야!(···)” 90-92


 “(···) 원더우먼만의 힘, 영웅들은 그것을 ‘부드러운 힘(Soft Power)’이라고 불렀지.”(···)

 “(···) 슈퍼맨이 나쁜 무리를 무찔러 자유세계의 영역을 넓히고, 배트맨이 나서서 ‘마운틴’의 체계를 세운다는 얘기는 귀가 닳도록 들었겠지? 그 다름이 바로 그녀의 차례인 거야. 그녀의 임무는 ‘정의’의 정착이니까.”(···)

 “즉 그녀는, 평상시의 자유세계를 유지하는 평화의 여신이란 말씀이지. 무엇보다 그녀의 임무는 전쟁에너지를 낮추고, 섹스 에너지를 높이는 것이니까.” 111-112


 “복제야. 아쿠아맨의 복제인간들이지.”(···)

 “바다가 넓기 때문이야.(···) 아쿠아맨은 자유경제의 무역과 협상을 통제하는 바다의 왕자거든. 실지로 WTO의 체계를 정비하고 그 윤곽을 잡아나가는 건 아쿠아맨이야. 물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배트맨이지만 IMF에 전력을 쏟고 있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지.(···)” 119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마블(Marvel) 쪽의 영웅을 내세워야겠군.”

 “마블이라구요?”

 “그래, 마블! 민주당이 승리했으니까 말이야.”

 “그게 정권과 관계가 있나요?”

 “몰랐니? 우리DC 코믹스는 공화당을, 마블은 민주당을 오래 전부터 후원해왔어.(···)” 122


 “문제는 EU(유럽공동체) 놈들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이 년을 넘게 끌어온 우루과이라운드의 최대 과제라 일컬어지던 농업보조금의 감축문제가 그 자리에서 타결되었다.

 별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쿠아맨이 준비한 우리측의 협상문서 속에는 마블 코믹스『헐크』가 한 권씩 들어 있었고, 그것을 꼼꼼히 읽은 EU의 대표들에게 일일이 브루스 배너 박사가 악수를 청한 것이 전부라면 전부였다. 그것은 어딜 보더라도 신사적이고, 정중하고, 겸손하고, 간절한 호소였다.

 “제발 부탁이에요. 절 화나게 하지 마세요.”(···)

 그것이 시작이었다. 우리는 아쿠아맨의 해마(海馬)호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각국의 만(灣)과 항구와 운하를 돌며 자유무역의 강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어딜 가나 그 지역을 관장하는 아쿠아맨들이 있었으므로 체류와 숙박의 문제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125-126


 아쿠아맨은 왕성한 정력가였다. 중요한 협상이 있는 전날 밤에도 보란 듯이 여자들을 불러들였고, 1:2나 1:3의 요란한 섹스를 즐기곤 했다. 주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라든지, 모델이라든 하는 여자들이 그를 찾아왔고, 뭐랄까 확실히 그 지역을 대표해 밤새 자신들의 몸을 활짝 개방하곤 했다.(···) 왜 개방을 거부하지? 좋아, 벌려! 블록(BLock)이라고? 옳거니, 내가 뚫어주지! 127


 여긴 멕시코야, 오늘은 1월9일이고.(···) 귓속말로 캐나다에서 왔다고 해! 절대로! 알겠지? 라고 속삭였다.(···) 멕시코 치아파스의 인디언 부락, 한 농가의 침침한 움막 속에, 물론 예전엔 평범한 농가였으나 지금은 사파티스타2) 반군(叛軍) 거점의 중심이 되어 있는 그곳에, 더구나 1월1일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반란의 중심에······ 조난을 당한 캐나다인으로 누워 있었던 거다.

 “왜 반란을 일으킨 거죠?

 “미국의 자유무역정책에 반대해서야.”

 “누가요?”

 “이곳의 농부들이······”

 “‘정의’를 모르는 무리들인가보죠?”

 “모르거나, 알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비록 ‘정의’를 모르는 나쁜 무리이긴 해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나를 치료해주었다.(···) 회복을 위해 그 전부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나는 결코 경계의 끝을 늦추지 않았다. 어쨌거나, ‘정의’를 모르는 나쁜 무리들인 것이다. 135-136


 나쁜 무리들은 마치 이웃을 대하듯 우리의 차도를 확인한 후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가곤 했다.(···) 대화는 주로 마르코스란 인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무기만 없다면 찢어지게 가난할 뿐인 이 인디언 농부들이, 나 참 지구라도 정복할 생각인가?(···) “이봐, 농사나 짓지 반란은 왜 하는 거야?” 큰 눈을 끔벅이며, 놀란 소 같은 표정으로 마르코스가 말했다. “우리가 총을 든 건 농사를 짓고 싶어서야.” 137-138


 너무 많이 살아서 그렇다, 좁은 땅에.

 그렇게 이해하고자, 나는 노력한다. 언제나 노력한다. 노력이 필요한 땅이다.(···) 서른을 넘긴 한국인에게 정확한 R발음을 가르친다는 건······· 사실 바다를 가르는 것보다 힘들다.(···) 힘들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이토록 영어를 배우려 애쓰시죠?” 뜬금없는 질문에 뭐라 대답은 하지 않고, 다들 웃었다. 157-158


 슈퍼의 몰골에 비해 제법 최근에 설치된 듯한 자판기였다. 그곳에서 나는 고급커피를 뽑을까 특수커피를 뽑을까 고민하다 두 잔의 율무차를 뽑아왔다.

 "이게 뭐야?“

 “우리 민족 고유의 율무차야. 이뇨화과가 뛰어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지. 피부미용에도 좋고 사마귀를 제거하며, 기미와 주근깨에도 효과가 있어. 그뿐만 아니지. 각종 영양소도 풍부해서 체력을 튼튼하게 해주고 머리가 좋아지게 하는 효능까지 있어. 게다가 피로회복, 자양강장에도 도움을 주는, 선조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전전후 건강식품이지.”

 “너나 마셔.” 160


 “포즈는 나의 삶 그 자체야.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어?”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어.”

 “어떤 놈들인데?”

 “‘제3세계 민족주의’라는 놈들이야.”

 “‘제3세계 민족주의’? 맙소사, 1세계도 아니고 2세계도 아니고 제3세계라고? 벌써 이름부터가 공산당만큼이나 나쁜 놈들일 것 같네.”

 “그렇지?”

 “응.”

 “딴 건 필요 없고, 열심히 응원이나 해. 포즈나 확실히 잡아주고 말이야.”

 “물론, 나의 삶 그 자체니까.” 161



* 작가 인터뷰


 “글쓰는 일은 격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홍수환씨가 어느 경기의 해설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예전의 복서들은 맨 먼저 파괴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의 복서들은 승리만 생각한다.’ 파이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인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권투가 재미없어진다고 불평합니다. 제가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파이팅-격투가들의 대부분이 몸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에요.(···) 어떤 근육이 가볍지 않으면 다른 어떤 근육에 힘을 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체형을 갖춘 작가란, 글쎄요. 전 파이팅이 아니라 헬스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파이팅이에요. 계속 쓸 생각입니다. 욕을 먹을 때도 있고 질 수도 있겠죠. 전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에 힘을 쓰고 몰두하려고 합니다.” 179


 낡은 연립주택에서 피라미드 주택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제가 쓰는 소설의 주제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입니다. 잘살자는 것이죠. 183




1) 중남미 지역의 통제를 위해 미국이 설립한 군사학교. 이곳 출신의 군부세력들이 중남미 각국의 군사정권 쿠데타와 군사독재의 주역이 되었다.


2) 사파티스타 반란: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반발, 원주민의 권리와 민주주의 보장, 자유와 정의를 요구하며 1994년 1월 1일 봉기한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의 대규모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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