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철학

[밑줄] 안또니오 네그리,『예술과 다중』

두괴즐 2011. 8. 8. 19:23

 


예술과 다중

저자
안또니오 네그리 지음
출판사
갈무리 | 2010-08-1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예술에 대한 아홉 편의 서신『예술과 다중』. 제국과 다중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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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안또니오 네그리,『예술과 다중』



* 역자 서문


 대안세계화운동과 결합된 네그리의 주장은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새로운 사회운동-학생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평화주의운동, 동성애자운동 등-을 특징짓는 정치사회학적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헤게모니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노동계급의 쇠퇴의 인정, 둘째로 사회운동 내에서의 다양성과 개인주의의 가치 고양, 셋째로 자유로운 연합을 강조하는 활동가들의 참여 방식과 특히 반권위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수평주의적인 조직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0쪽.


 1970년대에 안또니오 네그리는 포드주의적인 노동자가 잠재적인 혁명의 역량과 관련해 헤게모니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후에는 “대중노동자” 개념을 청년, 여성, 시급노동자, 불안정 취업자, 가사노동자, 실업자 등과 같은 “사회적노동자”개념으로 대체한다.(···) “대중노동자”는 불안정 취업자나 소외된 자들에 비해 일종의 귀족계급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훨씬 더 사회적이고 덜 경제적인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따르자면 자본주의의 지배는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생활 전체로 확산되게 된다. 그 결과 투쟁은 단지 경제적인 영역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의 선택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투쟁은 공동체의 일상생활의 당양한 영역을 무대로 한다는 것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사회적 노동자”는 코뮤니스트로서 “여기 그리고 지금”을 사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혁명적 폭력은 여전히 해방의 수단으로 남아 있다. 11-12쪽.



* 프롤로그


 자연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이 갇혀 있는 틀이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또한 변형된 자연으로서밖에, 즉 인간 활동의 인공보철로서밖에 자연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면, 게다가 또 예술 그 자체가(인간의 활동의 일부라고 하는 한에서, 그리고 이 인간의 활동과 원래의 모델을 이어 왔던 관계를 나타내는 특권적인 기호라고 하는 한에서) 이 추상적 장치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을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활동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뿐일 것이며 우리들이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인간의 활동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뿐이라는 것, 즉 자연과 역사적 현실을 철저하게 변형시키는 능력으로서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만이라고 해야겠지요. 38쪽.


 왜냐하면 이 내부에서야말로, 즉 이 공포와의 대결, 상품의 압도적 폭력과의 대결에서야말로 예술가의 살아 있는 노동은 때때로 아름다움의 양상을 드러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아름다움의 가능성에 의해 부단히 발명되고 있는 것이라면, 예술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예술이란, 이미 말한 것처럼 노동이며 살아 있는 노동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특이성을 발명하는 것이고 여러 가지 특이한 형상이나 오브제를 발명하는 것이며 언어적 표현이고 여러 가지 기호들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즉 이 첫 번째 운동 속에 행동하는 주체의 잠재력이 있고 세계를 재발명하기에 이르기까지 인식을 깊이 있게 만드는 예술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표현적 행위가 자기를 표현할 때 기호나 언어를 통하여 표현되게 되는데 이 기호나 언어가 공동체를 이룰 경우에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즉 그러한 기호나 언어가 하나의 공동의 기도(企圖)내에 포함될 때뿐인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세계의 구축에 참여하는 각각의 주체로 이루어지는 다양체 내에서 순환하고 공통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특이성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이루어진 상상력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술이란 이런 의미에서 다중입니다. 39-40쪽.



* 편지(들)


 예술이 추상적인 것이 된 이래로 나는 예술을 사랑해 왔습니다. 추상화(抽象化)에 의해 예술이 존재의 새로운 질을, 다시 말해서 노동의 각 특이성이 그야말로 추상적인 유일한 집합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예술을 사랑해 왔지요.

예술은 가치창출의 모든 결정들을 늘 예비해왔어요. 그래서 예술이 추상적이 된 것은 하나의 현실적인 전개를 샅샅이 답파함으로써 또 추상화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입니다. 존재론적 경험이 되기 위해서 예술은 어떤 구체적 존재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추상이 발명됨과 동시에 자연과 세계는 예술로 완전하게 대체되었지요. 근대라는 것은 그러한 추상화이고 하나 하나의 특유성이 행하는 노동의 참여이며 그 상호교환성이죠. 즉 하나의 추상적인 공동체입니다. 44-45쪽.


내가 포스트모던을 옹호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의 경험을 추상의 진리로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포스트모던을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경험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추상적 사건이나 새로운 의미 결정, 그리고 새롭고 특이한 공동체의 형상 등이 축적되는 과정은 이미 완성되어 있어요.(···) 우리들이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의미 내용이든, 모든 것은 이 새로운 세계의 내부에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즉 만들어진 것의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46-47쪽.


 풍경은 여기저기서 색채와 변화를 부여 받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동시에 또한 풍경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였고 우리의 상상력을 제약하였죠. 이제 자유는 전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난함이 우리의 자유와 비슷한 크기가 되었기 때문이고 우리의 상상력이 공허가 가지는 무한의 가능성에 대면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관조의 대상은 “자연 상태”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비자연적인 상태, 포스트 자연적인 상태, 포스트 인간적인 상태, 비인간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자연적 결정론이라든지 역사적 흔적이라든지, 혹은 합목적성이라든지 완성이라든지 하는 것이 직관의 대상이 되는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추상적인 것만이 우리의 자연인 것이고, 또한 추상적인 것만이 우리의 성질입니다. 55-56쪽.


 우리가 구축한 근대성은, 그 공허의 막대한 양으로 우리를 무력하게 합니다. 근대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무분별하지만 일상적이며 연속적인 사건들을 통해서이고, 또 그러한 사건들의 끔찍한 영향에 의해 우리는 무력해집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불쾌한 자각에 의해 우리 안에 상상력이라는 잠재력이 해방되기도 합니다.(···) 상상력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숭고라는 감정의 실천적 본능을 상상력이 인정하는 한에서이니까요. 숭고의 감정이란, 상상력처럼 이성과 감성의 교차점,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간의 교차점인 것입니다. 73-74


숭고의 경험이란 이론적인 것으로부터 실천적인 것으로의 도약이고 부정의 진실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파괴됨으로써 상상력이 구축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시장, 그리고 혐오스러운 것에 대한 현기증 등은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내가 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에 의거하고 존재를 변형시키는, 그리고 존재를 생산하고 존재를 재생산하는 실천입니다.(···) 상상력과 실천이라는 두 표현은 거의 동의어이고, 서로 다른 기능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공간, 즉 행위의 공간, 특히 시적 행위의 공간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76-77


 해방은 이제 더 이상 번개의 순간(Blitzzeit)일 수 없고, 의미의 봉기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이 그것들로부터 사라져 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오히려 정반대로 해방은 깊은 곳에서 존재론이 생산하는 저 잠재력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82


 존재의 의미가 공허하다는 건 거짓부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잠재력이야말로 존재의 개념이라 할 수 있죠. 그것은 존재의 상상력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상상하고 창조하기 때문이지요. 84


 추상화(抽象化)란 존재, 공허, 잠재력에 의해 언제나 되풀이되는 술래자기의 우화인 것입니다.(···) 공허는 한계 따위가 아니라 하나의 통로입니다. 85


예술이란 잠재력의 상형문자입니다. 이 상형문자적 존재는 예술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예술의 존재론적 특이성을 최대한으로 고양시킵니다. 왜냐하면 만약 존재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한에서 예술이 상상력의 최상위의 행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어디까지나 응축적이고 강력한 방법에 의해서, 즉 특이한 방법에 의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5


축적된 인간노동의 총체가 가치-초과-를 결정합니다. 예술은 이 가치들 가운데 가장 잘 구축되고 가장 보편적이며 또 동시에 가장 특이한 가치입니다. 이 가치는 만인, 다시 말해 활동 중에 있는 다중이 향유할 수 있지요. 예술은 천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술은 만인이 천사라고 하는 단언이며 또 이는 매 순간 재발견되어야 하는 사실이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110


예술이 잉여가치와 구별되는 것은 예술 노동이 해방된 노동이기 때문이고 또 결과적으로 생산된 가치가 자유롭게 생산된 존재의 초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111


 맑스는 예술 노동이 초과적인 존재, 해방된 노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의 지표라고 결론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해방된 노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착취, 사용자 곁에서의 소외, 예속 등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노동이지요.(···) 해방된 노동은 존재 초과의 집단적 본질인 언어활동인 것입니다. 112


예술은 구성하는 권력(pouvoir constrituant), 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잠재력입니다. 인간해방의 집단적인 잠재력은 예술을 통해 그 운명을 예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 전위-즉 아름다움의 생산자들인 다중-의 예시적 행위 밖에서 코뮤니즘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129


예술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 대중의 노동을 가치화하고자 하는 활동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노동력의 해방을 통해 존재의 잉여를 구축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136-137


시적인 활동은 전위적인 행위의 원형이자 근간입니다. 시적인 활동은 미래를 활동 중인 상상력으로 해석하고 있죠. 그것은 지성과 감성의 잠재력, 구성하는 권력이며, 바로 여기서 기적이 발생합니다.(···) 예술가는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의미화를 구축하는 집단적 행동과, 이 새로운 말을 존재 구축의 논리 안에서 고정시키는 작업인 해방이라는 사건 사이에 놓이는 중재자인 것입니다. 142-143


예술은 이제 모든 실천 속에 존재합니다. 각 신체 안에서 예술이 비로소 여러 가지 새로운 변신적 합성을 시도하는 것이지요.(···) 예술은 삶이기도 하고 합체이기도 하고 노동이기도 하고······. 예술은 더 이상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전제입니다. 기쁨이 없이는, 시심이 없이는 더 이상 혁명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술이 혁명을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164



* 에필로그


 예술 작품은 항시 자본주의 시대의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분리불가능한 두 사물, 즉 상품이자 활동인 것입니다. 209


 예술의욕은 실현될 때 시간과 공간적인 고유한 결정을 전혀 상실하지 않는 지향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시대를 혁신시키는 지향성입니다. 지향성은 노동을 생명 존재를 “형성시키는 형식”으로 현시하면서 이제 인지적인 방식으로 이 혁신을 수행합니다. 기술적인 수단은 정신적, 다시 말해서 인지적이 됩니다. 역으로 지성은 기술과 노동이 됩니다. 211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창조한다는 사실은 자연과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편견들을 버린다면 그것은 숭고화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조한다는 것은 오히려 무절제, 초과, 생산성의 과잉을 발견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해 노동력이 인지적일 경우, 예술적인 표현욕망은 도처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대중노동자가 독특한 노동자 다중으로 변화할 경우 예술적 실천은 생활 형식들에 투자되고 이 생활 형식들은 세계의 살이 됩니다. 215


예술은, 주체들이 지속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생산을 한다는 “진리의 비밀”을 명확히 현시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 비밀을 폭로한다는 것입니다. 216


 우리는 더 이상 포스트모던을 향해 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미 모든 포스트(post-)를 초극하였고 우리는 동시대성 속에 있습니다. 이 동시대성은 차후에 노동의 변형을 심화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비물질적이고 인지적이며 정동적이던 노동은 삶(bios)으로, 즉 삶정치적 노동으로, 삶형식들의 재생산 활동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이제 새로운 직능들을 갖게 됩니다. 결론을 짓기 위해 이 직능들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노동은 이제 하나의 사건, 다시 말해 초과, 삶의 과도함으로 등장합니다. 사건은 생활의 일상적 지평의 연속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만 이 지평에 내재하고 또 이 지평의 중심을 표상합니다.(···)

 둘째로 삶정치적 노동은 다중의 사건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지적인 노동은 다중의 초과로서 부여되는 것입니다. 217-218


 예술은 자기 안에 생산과 동시에 존재론적인 차원, 즉 사건과 공통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의 복잡한 결절점들에 이제는 아마도 윤리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혹은 더 간단히 말해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공통된 존재인 한에서의 타자를 위한 존재가 승리하게 되는 다양한 범례를 우리가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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