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읽기: 2차 발제
나병철,「환상소설의 전개와 성장소설의 새로운 양상」, 현대소설연구 제31호 (2006. 9) pp.287-314.
0. 요약
나병철은 대서사 이후에 발발한 모더니즘의 환상과 이후의 포스트모던의 환상을 성장소설을 중심으로 비교하며 조망한다. “모더니즘의 동화적 환상은 ‘퇴행’을 통해 ‘현실과의 화해’라는 ‘성숙’된 소망을 표현한다.”(295) 하지만 “모더니즘의 환상에는(···) 화해를 거부하고 환상을 현실의 음화로 만드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298) 반면 “상징계의 빈자리를 메우는 판타지가 상상적 과잉표상들을 매개로 현실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 상징계적 현실개념이 해체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후기자본주의적 환상이 출현한다. 이제 환상은 합리적 상징(상징계)과 공존하는 파편화된 불길한 악몽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대신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299)
그런데 “박민규는 권력을 가진 자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판타지 서사를 성장소설 주인공의 타자의 위치에서 분열시킨다.”(304) 박민규는 “상징계 내의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304) “박민규의 소설에서는 판타지와 성장소설의 혼성성 속으로 풍자, 해악, 현실비판이 끼어드는 또 다른 잡종성이 연출”(304)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민규의 성장소설에서는 환상성과 리얼리즘이 접합되는 특이한 양상이 벌어진다. 즉, 판타지 서사가 점령해버린 현실의 공간 속으로 잃어버린 대서사가 귀환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305)
나병철은 “후기자본주의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상징계의 균열을 은폐하고 있는 이 시대”에 박민규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문제를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문화의 공간에서 공연되는 시뮬라르크들 속에 이미 미시적으로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305)으로 본다.
나병철은『지구영웅전설』에서 제3세계인인 ‘나’의 ‘응시’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시선’에 의해 공연되는 ‘아메리칸 히어로’들의 판타지가 폭로되지만, 결국 그 ‘나’는 미국식 이데올로기적 판타지에 순응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창조적 판타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 하세요 페리컨>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언급한다.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의 판타지는 앞서 살핀 후기자본주의 판타지와는 구분”(307)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린>의 경우에도 “더 이상 산수가 불가능해진” 상황으로의 이탈, 즉 “상징계(세계)의 외부에 아버지와 ‘나’ 사이의 상호주체적인 공동의 공간”(310)을 만드는 것은 창조적 판타지이다.
상처를 가리며 공연되는 무관심한 기린의 환상은, ‘이름을 잃은 아버지’와 ‘나’ 사이에 형성된 대화적 공간에 소통과 사랑의 소망을 감추고 있으며, 그 세상 밖에서의 사랑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한 ‘억압 없는 대서사’의 소망을 숨기고 있다.
억압 없는 대서사란 억압적인 노예의 산수(그리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해방된 탈오이디푸스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기획을 말한다. (310)
나병철은 “박민규 ‘성장’소설의 환상은, 상호주체적인 공간 속에 소통과 사랑의 소망을 숨기고 있으며, 억압 없는 탈오이디푸스적 욕망(사랑)이 생성될 수 있는 지점을 암시한다”(311)고 하면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 나의 생각
박민규의 작품이 일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과 무엇이 다른지를 잘 분석한 비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병철은 “박민규의 성장소설에서는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 상호주체적인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탈오이디푸스적 욕망의 생성을 암시한다. 탈오이디푸스적 욕망이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과 화해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 점에서 박민규의 성장소설은 환상의 또 다른 의미를 암시”(288)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여기까지 나아가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작품 분석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병철의 주장과는 달리 <<지구영웅전설>>이 또 다른 대항적 영웅상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신랄하고 효과적인 풍자가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대항적 영웅상의 등장은 또 다른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의 도래 일 수도 있다. 나는 “제국주의적인 ‘아메리칸 히어로’의 판타지”가 아닌, 또 다른 판타지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굳이 “햄버거 대신 율뮤차를 먹고 대립”하는 “또 다른 슈퍼맨”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사랑과 화해를 추구하는 또 다른 슈퍼맨”이 예수(신)라면 또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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