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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전철희,「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_박민규론」

두괴즐 2011. 7. 26. 17:05


* 박민규 읽기: 2차 발제


전철희,「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_박민규론」,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통권 147호), 2010.3, page(s): 2-551.



1. 87년체제의 복권을 위하여


 전철희는 박민규의 작품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으로 평가할 수 없다”(527)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성격을 모두 버무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이런 박민규 소설의 이중성의 기원을 찾기 위”한 작업으로 “그가 어떤 시각으로 작금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지” 살펴보자고 권한다.

 우선 박민규의 “눈은 다수결사회에도 남아 있는 차별을 응시한다.”(528) 전철희는 이러한 응시를 87년 체제와 엮어서 살핀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런 인식의 전환점은 87년 6월이었다. 그전까지의 실질적인 독재사회에서는 모든 억압과 착취를 지배자(치수)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87년체제’의 특성을 고려할 때, 87년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 일어나는 차별은 다수의 동의에 기반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수결사회’에서 다수가 불합리한 차별을 거부한다면 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차별을 거부하지 않는다. (528)


 전철희는 박민규의 작품이 “흘러가버린 독재시대가 아닌, 형식적 민주주의를 얻은 87년체제의 문제를 치밀하게 논증”(529)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 루저의 탄생


 전철희는 박민규의 최근작은『파반느』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박민규에게 현재는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하는 사회이다. 만약 99%의 평범한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를 부정한다면 외모지상주의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천민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외모지상주의와 천민지상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건재하다. 현대인들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들보다 낮은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이런 속물적인 희망 때문에 현대인들은 외모지상주의와 천민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체제는 존속된다.(530)


 전철희는 박민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이 사회의 체제를 폭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자들이 기존의 민중소설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다.


 이렇게 성장한 경쟁체제는 끊임없이 승자와 패자를 재생산한다. 박민규는 이때 생긴 패자들의 입을 빌려 다수결시대로 위장된 무한경쟁 체제를 폭로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년 꼴찌 야구팀의 팬(『삼미』), 인턴사원(「너구리」),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파반느』) 등은 모두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이지만 기존의 민중소설에 나왔던 인물들, 예컨대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 부당하게 학교를 떠나야 했던 전교조 교사, 국가의 결정에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철거민과는 구별된다. 후자가 소수의 지배자들에 의해 억압되고 약탈당한 이들이라면, 전자는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차별의 피해자들이고 피억압 민중이라기 보다는 “세계가 <깜빡>한 인간들”(『핑퐁』219면)이다. (531)


 그리고 이러한 박민규 작품의 성격으로 볼 때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컴퓨터 게임 캐릭터(「너구리」), 만화 히어로(『지구영웅전설』), 프로레슬링 캐릭터(「헤드락」) 등 써브컬처(sub-culture)적 요소들은 의도된 미장쎈”(531)이다. 왜냐하면 “고급예술이 인간 삶의 복합성과 난해함을 드러내려”하는 반면, “써브컬처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과 가장 이상적인 능력”(531)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3. 다수결체제의 역습


 천철희는 박민규가 “차별을 생성해내는 우리의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야박하게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531)고 본다. “그의 ‘헤드락’은 자본주의가 폭력을 전염시키는 과정에 관한 은유다.”(532) 왜냐하면 “숨막히는 경쟁체제에서 헤드락을 당하지 않으려면 남에게 먼저 헤드락을 걸어야 하는 것을 깨닫는 사이, 어느새 “폭력의 대상”이었던 그는 “폭력의 주체”(259면)가 되어버리고”(532)마는 지점을 박민규의 작품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내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우리가 흘리는 피와 땀에 비레하여 자본주의는 성장하고, 인간은 일하는 기계로 전락한다.(···) 현대 자본주의,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파반느』) 이다.(533)


 전철희는 박민규의 작품을 독해함으로써 6월항생을 다시 고민한다.


 우리가 6월항쟁으로 얻은 가시적인 정치적 자유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폭력과 억압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은밀해졌을 뿐이다. 독재자가 사라진 세계에서 돈은 교환의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이는 주먹’이 우리의 삶을 억압했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교묘하게 우리를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87년체제는 현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속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하는 거대한 쳇바퀴이다.

 박민규는 이렇게 87년체제하에서 경쟁이 자기증식하는 끔찍한 과정을 논증해냈다.(533)


 그렇기 때문에 전철희는 박민규가 “지구를 언인스톨하고(『핑퐁』), 한국을 떠나고(『파반느』), 만년 꼴찌 야구팀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드는(『삼미』) 등 무한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삶을 살자고 설득”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4. 계몽주의를 위한 변명


 전철희는 본장에서 박민규의 대중적 글쓰기를 옹호한다. 왜냐하면 박민규는 “‘다수결체제’의 명암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심지어 독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까지 제시해주는 일종의 계몽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한 계몽은 실패에 불과하다. 따라서 계몽주의자는 글을 쉽게 써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친절함을 갖춰야 할 의무가 있다”(535)는 것이다. 따라서 “박민규 소설에 기존의 고급문화의 특징이 없다는 비판은 애초에 번지수가 틀렸다”(536)고 전철희는 지적한다.


 박민규가 새로운(그러나 친숙한) 소재로 사람들에게 흥미를 부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쉽게 그리고 명료하게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의 문학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때문에 박민규는 문학의 미덕을 포기한 비겁한 소설가라기보다는, 계몽을 실행하기 위해서 콧대 높은 문학인으로서의 자세를 버린 소설가로 봐야 한다. (536)


 전철희는 “박민규가 자신의 생각에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자기 소설을 진화”(537)시켜왔다고 본다.



5. ‘사랑’의 함정


 박민규가 제안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전철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박민규가 꿈꾸는 대안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쓰지 않으며 모두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평범한 삶”(『삼미』126면)이다. 평범한 삶은 “할 만큼의 일을 하고, 먹을 만큼의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자”(『삼미』272면)는 삶을 의미한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끔찍한 경쟁체제는 이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삼미』에서는 ‘나’와 조성훈의 연대가,『핑퐁』에서는 못과 모아이의 연대가,『파반느』에서는 ‘나’와 요한의 연대가 있었기에 그들은 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삶을 상상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의 최근작『파반느』에서는 ‘연대’의 한 형태인 사랑이 경쟁체제의 구체적인 대안으로 제시된다.(537)


 하지만 전철희는 박민규의 대안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경쟁체제의 메커니즘을 냉철하게 비판하는 눈을 보여주었던 그가 최종 대안으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내놓는 것은 식상함의 문제를 넘어서 뜬금없다”(538)고 말한다. 그리고 “연대와 사랑만으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 이 체제의 압력을 이겨내고 자신의 이상을 좇는 삶을 살 수 있을까?”(538)하고 되묻는다.


 경쟁체제는 사람들에게 꿈꿀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이런 생활 속에서 대체 어느 틈에 경쟁체제를 거부하는 사랑과 연대라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539)


 전철희는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뀐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하면서 박민규 식의 “경쟁체제의 헤게모니가 개인의 의식적 각성만으로 변화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전무하다”(539)고 주장한다. 특히 “문학의 진중함을 어느정도 포기하면서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고 한 계몽주의 작가로서 박민규는 자신이 내놓은 추상적이고 낙관적인 결론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539)고 쏘아 붙인다. 전철희는 “혁명적인 혹은 정치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된 그에게 남은 대안은 없었다.”(540)라고 말하고 있다.



6. 다시,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전철희는 박민규가 “문학의 힘을 빌려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상에 감춰진 경쟁체제의 이면을 언어로써 그려내는 작업에 성공”했다고 보면서 “그의 소설은 87년체제에 대한 문학적 증명이자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대한 고발장으로 부족함이 없다”(541)고 호평한다.

 하지만 그 역시 “87년체제가 보여주는 가시적인 ‘자유’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면서 한계를 지적한다. 그의 소설이 “의식적 각성으로 사회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아포리즘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541)던 이유가 바로 그 ‘자유’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철희는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박민규의 작품이 “87년체제의 어두운 단면뿐 아니라 가해자 혹은 루저가 되어버린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 중요하다면서, 훗날 그의 소설을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라 명명해야 할지도 모른다”(541)고 하면서 글을 마친다.



※ 나의 생각


 전철희의 거침없는 비평이 제게 좋은 자극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끝이 너무 허망하게 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민규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지적해 준 것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너머’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박민규가 내 놓고 있는 대안이 ‘그렇게 무기력 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의 변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철희는『파반느』의 대중적 서술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파반느』는 그의 어느 소설보다도 대중에게 편하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파반느』가 여타의 소설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이전 작품들처럼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행갈이를 했다. ②글자에 색깔을 넣어서(···) 따음표를 생략한 채 인물들의 대화를 표현했다. ③책의 뒷면에는 소설의 BGM(Background music)까지 동봉했다. ④『파반느』는 사회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페르쏘나인 ‘요한’의 입을 통해 외모지상주의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 특징들은 박민규의 소설에서 문학 고유의 함축성이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에서 살펴본『파반느』의 특징들은 블로그의 포스팅에나 어울릴 만한 것들이다.(353)


 물론 전철희는 이러한 서술 후 박민규를 “계몽주의자”로 명명하면서 그의 ‘가벼운 글쓰기’를 옹호합니다. 그런데 “계몽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벼운 글쓰기’가 괜찮다고 한다면, 계몽주의자가 아닌데도 가벼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되나요? 저는 ‘묵직한 글쓰기’가 성취할 수 있는 경지가 있는 것처럼 ‘가벼운 글쓰기’가 성취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프로페셔널한 작가도 중요하지만, 다중의 나름의 글쓰기들도 많이 도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전철희,「87년체제의 문학적 돌파_박민규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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