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읽기: 2차 발제
권유리야,「지구촌 실향민 - 박민규론」, 오늘의 문예비평 2009 봄 통권 72호, 2009.2, page(s): 12-361.
0. 요약
권유리야는 “박민규 소설만큼 ‘저항이 곧 타협’이라는 공식에 충실한 소설은 없다.”(352)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볼 때 “박민규의 미학적 쇄신이 단순히 해방을 열망하고 시대를 타개하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351) 따라서 그녀는 박민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박민규 소설에 따르면 실체가 없는 자본의 징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마음을 단단히 잡”숫고 “후기산업사회”(「야쿠르트 아줌마」, 170쪽)의 징후를 견디는 것이 최선이다. 이 지점에서 박민규는 어떤 난관에 빠진다. 박민규가 그 후기자본주의의 치부를 정면으로 공격한다 해도, 온갖 대중문화적 코드를 적당히 버무리는 유머의 방식은 후기자본주의의 또 다른 병통임을 박민규 자신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353)
권유리야는 박민규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서 ‘세계화’를 들먹이지만, “세계화에 대한 고발은 있되, 고민은 실종되고 없다.”(355)고 주장한다. “‘냉소’는 있지만, ‘반성적 의지’는 ‘실종’되어 있다.”(355) 그녀는 박민규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한 마디 말로 이 시대 ‘무장해제 당한 자의 체념’을 정당화하고 있”(355)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가 어느 정도 헤드락을 묵인하거나 권장한”(「헤드락」, 263쪽) 시점에 저항은 불필요하다는 논리는 그래서 ‘패배주의적’ 이라는 비난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다루면서도 ‘역사의 바깥’에서 집을 짓는 박민규의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다.(356)
권유리아는 “박민규의 황당무계한 발상들이 철저하게 ‘후기자본주의의 소통 방식’을 따르고 있다”(356)고 본다. “중심의 가치를 해체하여 하찮은 농담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이들의 긴장 상실은 여전히 박민규의 주된 병통이 되고 있”(356)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 순간 엉뚱한 사물의 출현과 황당한 웃음으로 성급하게 마무리하는 결말 방식은 박민규 소설이 후기자본주의를 공략하면서도 끝끝내 후기자본주의의 소통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한 ‘무장해제를 당한 자의 체념’밖에는 생산할 것이 없다.(357)
권유리아는『핑퐁』과『카스테라』을 분석하면서 “희로애락을 갖고 있지 않는 ‘감정의 진공상태’야말로 박민규 소설의 가장 치명적인 독”(358)이라고 주장한다. “미움과 사랑, 저항과 단합이라는 이항대립을 벗어났다고 해서 박민규의 소설을 막연히 긍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희로애락을 증발당한 인류는 차라리 열정적으로 애증을 휩싸이는 근대의 이항대립적 인간보다 못하다”(358)는 것이 권유리아의 생각이다. 그리고 박민규의 “그냥과 해프닝의 사고는 ‘우연성과 무책임성’을 기반으로 한다.”(360)고 말한다.
권유리아는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문학의 양태가 변해도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라는 문학의 본질까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361)고 주장하며 글을 마친다.
※ 나의 생각
권유리아는 박민규가 후기 자본주의의 폭력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지만, ‘반성적 의지의 실종’, ‘체념’ 등에 의해 “‘저항이 곧 타협’이라는 공식에 충실”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확하게 말해서 박민규의 소설은 다수의 실패는 정당하다는 이상한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나 혼자만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은 패배를 유예시켜주고,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유보하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그늘로 돌아가게 하는 알리바이’가 되는 것이다.(351)
라고 말한다. 물론 박민규 소설 속 화자가 무기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무력감이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조의 폭력이다. 치밀한 폭로의 과정이 화자의 막막함으로 끝이 난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그늘로 돌아가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엄기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맞서는 이런 위로와 돌봄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민규가 자본주의의 폭력적 시스템을 고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경쟁이 아니라 ‘위로와 돌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권유리아가 주장하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도 닿아있는 것이다. 박민규가 이후에 냈던『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사랑’을 가지고 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박민규가 고발하는 자본주의의 폭력적 시스템이 널리 공유되고, 그로 인해 도래하게 될 ‘자본에 저항하는 주체’(‘삼미팬클럽’, ‘파반느의 사랑)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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