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읽기
차미령,「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_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통권 132호), 2006.6, page(s): 2-471.
0. 요약
차미령은 오늘날 “젊은 소설이 환상문법을 빌려 누리고 있는 서사적 자유”가 “유례없이 낯선 것”이지만, “자유로운 환상과 견고한 현실 간의 관련성”을 좀 더 숙고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면서 “이들의 미학적 실험을 근본적으로 추동하는 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의식”임을 환기시킨다.
차며령은 박민규 작품의 특성으로 “비현실적인 사건을 인물 개인의 주관성, 즉 정신의 산물로 환원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265)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박민규의 환상을 “현실의 결핍에 보완적으로 기능하는 환상”(266)이라고 규정한다. 차미령은 박민규의 환상이 “부조리한 세계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정신적 의지와 그 세계를 수락하기 직전의 통과제의적 매개 양자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267)고 본다. 그녀는 환상 속 실험을 하는 박민규(와 조하형)를 옹호하면서도 하나의 첨언을 하며 글을 마친다.
문학은, 소설은 늘 바깥을 꿈꾼다. 그 바깥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면, 작가들의 무대는 지구 바깥이 될 수도, 현재의 바깥이 될 수도 있다. UFO와 변형괴물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세계이거나 다리가 네 개 달린 닭과 클론봉황이 동시에 출몰하는 세계라도 괜찮다. 단 그 상상력이 지금 이곳에 대한 고통스런 숙고를 담고 있을 때에만, 자유롭게 펼쳐놓은 환상은 현실을 몰각하게 하는 유혹적인 방편이 아니라 현실 저 너머를 모색하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274)
※ 나의 생각
차미령은 박민규의 작품이 “부조리한 세계와 타협하지 않으려는 정신적 의지와 그 세계를 수락하기 직전의 통과제의적 매개 양자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267)고 지적했다. 나도 여기에 공감을 한다. 하지만 작품 이후에 대한 상상은 독자의 몫이고, 이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것도 같다. 이를 테면 나는『삼미』를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희망으로 읽었다. 하지만 다른 한 독자는 “비정규직이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유도하는 작품”으로 읽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다양한 독자의 읽기가 함께 공유되고 나눠지는 장(무겁지 않고 다양한 발언이 공존하는)이 많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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