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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강동호,「문학에 대한, 타자를 향한 변론_ 박민규론」

두괴즐 2011. 7. 8. 11:36




* 박민규 읽기


강동호,「문학에 대한, 타자를 향한 변론_ 박민규론」,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통권 135호), 2007.3, page(s): 2-527.



1. 문학의 위기에 서서 박민규를 부르다


 강동호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학의 위기에서 박민규를 부른다.’


 이 시점에서 나는 박민규(朴玟奎)를 이야기하려 한다. 왜 박민규인가. 첫째는 그가 대중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서사가 기대고 있는 모더니즘적 비판의식이 카라따니 코오진이 문학에 기대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501)


 강동호는 그동안 박민규에 대한 논의가 “참신성에만 과잉 집중”되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는 “박민규 문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 장애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낯설음을 경험하게 하는 소재와 서사방식이 반복되면 반복될 수록 그 효과는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기반은 바로 그것이 담고 있는 통렬한 자기반성적 사유와 자기호명적인 문제의식”이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품들에 담긴 일관된 주제의식을 잡아내어 비평적 사유의 지평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502)하다는 것이 강동호의 주장이다. “이 지평에서 펼쳐지는 박민규만의 몸부림을 통해 그의 문학이 여전히 모더니즘적 현실의 모순을 전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음을 밝혀내야 한다.”(503)


2. ‘포스트모던’ 타임의 ‘포스트’「모던 타임즈」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시대가 가능했던 이유가 “근대 들어 윤리적 소명의 호출에 문학이 적극적으로 응답해왔기 때문”으로 본다. 즉 “문학적 상상력은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하여 현실의 모순에 대항적 포즈를 취”해왔던 것이다.

 강동호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는 점에서 박민규의 소설은 근대문학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것”(503)으로 파악한다. 박민규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관딘 대항체로서의 세계는 자본주의 질서와 그로 인해 파생된 양육방식의 모습이다.”(503) “박민규 소설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존경쟁에서 뒤떨어진 존재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따라서 모두 의도된 서사전략이다.”(505) 강동호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라는 진부한 인식이 박민규 문학의 새로움 뒤에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와 박민규의 소설이 지닌 감수성은 둘 다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와 반감에 기반한다. 그리고 블랙코미디적인 서사양식을 통해 직간접적인 메타포를 사용하여 그것을 보고 읽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엽기적인 작품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처음에는 작위적이고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것이 곧 독자들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섬뜩한 은유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507)


 따라서 강동호가 볼 때 “박민규의 서사가 만화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들의 집합인 것처럼 보여도, 그의 문학적 자의식의 자양분은 바로 포스트모던한 시대에서도 존속하는, 아니 더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는 ‘모던 타임즈’의 삶과 논리이다.”(508)


3. 배제된 공간으로의 말 걸기


 강동호는 여기서 다시 가라타니 고진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박민규의 작품이 고진의 ‘종언’ 테제를 과연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의무감은 근대적 서사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학의 소명의식은 문학 스스로가 단순한 유희에서 더 훌륭한 무엇이라는 존재가 되기 위한 자기지시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민규의 소설을 가라따니가 내린 문학의 삼아선고에 대한 반증으로 삼기 위해서는 근대적 세계에 맞서는 대안적 상상력, 즉 윤리적 지평이 그의 소설에 얼마나 깊이있게 서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508)


 강동호는 우선 박민규의 이전 작품인『삼미』와『지구』를 살핀다. 그는 두 작품이 여러모로 아쉬운 대안적 상상력을 제시했다고 진단한다.


『지구』는 너무 직접적인 알레고리 때문에 그의 문학적 역량을 어느정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삼미』의 경우 초반부의 유쾌한 이야기들 속에 알레고리와 주제의식이 적절하게 내포되어 있지만, 후반부에 드러나는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알레고리 및 지나친 낙관주의는 그의 대안적 상상력을 의심케 만든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삼미』, 279면)지만 그 새로운 공간이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기반하기에 현실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박민규 스스로도 “산업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역사적인 시합”(같은 책 285면)이라고 비꼬듯 부른, 슈퍼 올스타즈와 한 야구 동호회의 시합에서의 나르씨시즘적 자기위안의 행위들은 새로운 윤리를 끌어안으려는 문학의 적극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가 끊임없이 문제제기해온 자본주의의 모순성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의 문학은 유머러스한 폭로를 넘어서지 못한 고급오락에 머무르고 만다.(508-509)


 그러나 단편집『카스테라』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제를 일정부분 극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앞부분에 앞부분에 등장하는 ‘농담경제학 백과사전’이나 소설 속 주인공의 상상이 기존의 박민규가 보여준 유희적 서사를 비유하고 있다면, 야쿠르트 아줌마의 건강한 목소리는 초현실적 서사를 현실로 끌어오는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그것을 이끌어낸 타자와의 관계를 동시에 환유한다.(···) 박민규 문학의 전환점은 기존의 나르씨시즘적 서사에 머물던 그의 언어가 이같이 타자의 목소리에 응답함으로써 자기애에서 탈(脫)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510)


 본 단편집의 또 다른 작품인「너구리」의 경우에도 “등을 밀어주는 너구리는 생존을 위해 인사부장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나’의 실존적 아픔을 달래주는 새로운 차원의 말 걸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분석한다. 강동호는 “배제된 자리의 말 걸기는 박민규 소설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는 타자를 직면하는 방법이자 윤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본다.


4. 윤리적인 탁구를 위하여


 강동호는 아도르노를 인용하면서 “타인을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인식론적 노력은 교환관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그 가능성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를 기반하여『핑퐁』을 분석한다.


『핑퐁』에서는 그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하는데, 박민규가 말하는 형식은 바로 탁구에서의 관계이다. 탁구를 치는 것은 타자의 존재를 상상하는 행위인 동시에 타자에게 무엇인가를 건네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선물 행위는 자본주의의 속성인 타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건망증을 치유한다.

 그렇기 때문에『핑퐁』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박민규 소설에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꽤나 의미심장하다.(···) 탁구가 기존의 관계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 한 사람이라도 관계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면 랠리가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탁구는 항상 타자의 리씨브가 존재해야 한다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하지만 우리가 항상 잊고 살아가는 존재의 문제를 환기시킨다.(512)


 게다가 탁구를 치면서 하는 대화에는 ‘기다림’이 있는데, “이 기다림은 양자에게 동시에 그리고 공평하게 주어진다.”(513) 따라서 “기다림은 결국 타자에 대한 응시이고 그 응시가 우리의 시선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쪽의 다음은 ‘폼’을 보낸다는 것은 나의 현존을 던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강동호는 “폼을 보낸다는 메타포는 결국 공이 지니는 도구적 특성에 매몰되는 근대성에서 벗어나 ‘나’와 ‘당신’이라는 실존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설파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탁구계의 예절, 그것은 잊혀져가는 타자를 부활하고자 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상징한다.”(514)


 그물을 맞고 넘어간 공 덕분에 점수를 얻은 나는 상대방의 존재를 배려한다. 이때 교환의 관계에서 배제되었던 타자는 배려의 말 걸기로 공간에 호출된다.(514)


5. 종언의 수사학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못’과 ‘모아이’가 탁구를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관계에 대한 희망은 곧 이어지는 종말의 서사 앞에서 무기력하게 좌절된다.” 이에 대해 강동호는 “읽는이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반함으로써 박민규는 인류의 존재를 낯선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아두는데, 이는 기존의 박민규 소설들에서 주변부적 존재들이 고통을 감내한 끝에 도달하게 낙관주의적 감수성을 가차 없이 깨뜨리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존속 여부에 대한 언인스톨 결정을 내린 박민규의 결단”은 가라타니의 ‘문학에 대한 불신’과 ‘문맥적 상동성(相同性)’이 있음을 지적한다. “카라따니가 문학으로 윤리와 도덕을 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자조 섞인 니힐리즘적 인식을 바탕으로 문학에 대한 기대를 거둔 것처럼, 박민규 역시 인류가 앞으로 탁구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요원해 보이기에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박민규는 그럼에도 “이 삶을 생존이라 생각한 채 그간 당신에게 큰 해를 끼쳐왔다. 미안하고 미안하다. 모쪼록 탁구를 치며 그 죄를 갚아나가겠다.”(『핑퐁』, 257면)라고 말하면서 가라타니와 분기(分岐)한다. 따라서 강동호는 “기존의 작품에서 해학 뒤편에 자리한 비애감을 보여줌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에 반어적으로 강조의 방점을 찍었던 것처럼,『핑퐁』의 종말의 메타포 역시 인류 종말에 대한 선연한 두려움을 안겨줌으로써 반성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된 전략으로 잃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더 이상 ‘잔존해선 안될 생물’이라는 지독한 비관주의는 인류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류가 멸종해서는 안될 어떤 실존적·윤리적 근거도 없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윤리의 정립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강동호가 볼때 “결국 인류 종말의 수사법을 통해 그가 힘을 실어주려고 한 것은 타자의 목소리이다.”(516)

 

 박민규의 초현실적 서사는 자본주의 현실과 교환관계라는 명확한 대상을 디딤돌로 삼아 세상 위로 도움닫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오른 문학은 본래 날개가 없기에 다시 이 단단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다. 만약 문학이 나르씨시즘이나 지기기만이라는 허구의 날개를 가지고 영원한 부상을 시도한다면, 카라따니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공허한 언어놀이에서 문학의 죽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박민규 소설에 대해 문학이라는 제도가 보냈던 신뢰는 그의 서사에 내재된 추락의 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517)


 따라서 박민규 문학에서 보듯이 문학이 자발적으로 추락하려고 노력하는 한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물론 “박민규식으로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역설적으로 문학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 필요하다.”(517) 만약 “인류가 다같이 숙연하게 ‘럭키’의 윤리를 이칠 때 박민규의 상상력은 현실이 될 것”이라는 강동호의 생각이다. “문학이 여전히 사유의 영역에서 타자를 인식하게 하는 상상력과 감수성을 제공한다는 사실, 그것이 아직 문학이 끝나지 않았다는 박민규만의 문학적 몸부림이다.”(518) 그러면서 박민규의 후속 작업에 기대를 보내면서 글을 마친다.



※ 나의 생각


 “문학이 문학일 수 있는 기반은 바로 그것이 담고 있는 통렬한 자기반성적 사유와 자기호명적인 문제의식”이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작품들에 담긴 일관된 주제의식을 잡아내어 비평적 사유의 지평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502)하다는 강동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박민규 작품의 사회학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했을 때, 문제시 삼아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타자의 윤리학’을 포착하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한 ‘타자의 윤리학’이『지구』이후에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삼미』에는 정말 ‘타자’가 존재하지 않았나? 강동호는『핑퐁』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만,

『삼미』에서도 사회로부터 배제된/하는 두 타자의 윤리적 겹침이 나온다.

 그리고 강동호가 비판하고 있는『삼미』의 대안적 상상력이 그렇게 무기력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삼미』, 279면)지만 그 새로운 공간이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기반하기에 현실에 대한 전복의 가능성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왜 ‘소시민적 개인주의’는 답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삼성불매운동’이나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 행위’는 답이 아닌가? 경쟁에 반하는 태도를 내면화 하는 것, 자본의 속도에 맞춰 노동력을 무던히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내면화 하는 것은 무의미한가? 물론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기반하는 대안이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구조에 대한 변혁이 없다면 개인적 노력은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역으로 그 구조의 변화가 바로 개인들의 소소한 실천들이 쌓일 때 가능한 것 아닌가? 나로서는 소시민적 개인주의에 기반하여 할 수 있는 실천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는 입장이다. 나는『핑퐁』의 ‘언인스톨’이야 말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이것을 ‘종말’에 이르기 전에 지금의 문제에 대처하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읽어 낼 수는 있다).

 


 

강동호,「문학에 대한, 타자를 향한 변론_ 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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