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http://blog.aladin.co.kr/mramor/4369173
- 로쟈 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것입니다.
성탄절 아침에 뒤적거리고 있는 책은 이번주에 나온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와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민음사, 2010) 등이지만, 리뷰기사로는 바디우의 <사랑 예찬>(길, 2010)을 읽는다. 아무래도 성탄절에 더 어울리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니까. 게다가 아주 드물게 올라온 기사다.
한국일보(10. 12. 25) 사랑,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 만드는 힘
프랑스 68혁명 세대의 지성들이 대개 보편적 진리의 해체로 나아갔다면, 알랭 바디우는 빈사 직전에 몰린 그 진리의 복원을 꾀하고 있는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그의 책들이 속속 번역되고 있는데, <사랑 예찬>은 사랑을 진리 생산의 한 절차로 보는 그의 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바디우가 2008년 사랑을 주제로 연극기획자와 나눈 대담을 묶은 책이다.
바디우 철학의 전모를 모르더라도 책은 사랑에 대한 여러 성찰로 가득차 있어, 지금 사랑을 시작했거나 사랑에 흠뻑 빠져있는 연인들이라면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바디우가 우선 비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을 종의 번식을 위한 위장술, 욕망의 미사여구 정도로 보는 냉소적 시각이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사랑 없는 섹스는 자위행위와 다름없다. 그는 "사랑을 포기하고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며 "사랑을 포기하면 삶이 완전히 무미건조해진다는 사실을 언급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사랑은 일회적인 인스턴트식 욕망이 아니라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고 하자는 욕망"이다. 그러니까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한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매몰차게 극복해가는" '진정한 사랑'이 그의 관심 대상이다. 보잘것없는 우연한 만남을 운명처럼 느끼게 하는 사랑의 힘에 주목하면서 그가 끄집어내는 사랑의 가치는 지속성, 약속, 충실성 등이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다."(59쪽) 이런 사랑 예찬이 낭만적 환상이라고 느낀다면 책을 덮으면 그만. 하지만 사랑 속에서 영원성의 도약을 느껴본 이라면 난해한 그의 글을 읽는 수고가 그리 아깝지 않다.
책은 사랑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로 본격적으로 이어지는데, 사랑은 둘에 관한 진리,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차이'라는 진리를 구축하는 경험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는 둘의 관점에서 행하는 세계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
'진리가 없다'는 탈근대 사상가들의 상대성과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바디우는 그렇다고 폭력성과 배타성의 원천으로 지목된,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가 복원하고자 하는 진리는 '복수의 진리들'이며 그것은 우연한 사건들 속에서 출현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사건의 철학'이다. 바디우에게 그 진리가 출현하는 사건 중 하나가 남녀의 우연한 만남인 것이다.(송용창기자)
10. 12. 25.
P.S. 참고로, 바디우와의 재작년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는 프랑스철학 전공인 김상환 교수가 맡았다.
중앙일보(08. 01. 16) “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칟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칟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정리=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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