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읽기
안남연,「현대소설의 현실적 맥락과 새로운 상상력- 박민규의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1집 (2006년 12월) pp.163-177.
1. 들어가며
안남연은 본 논문을 통해 “박민규의 소설을 도발과 파격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박민규의 작품이 “동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성인들의 구태의연함을 질타하는데, 여기에 키치적인 요소와 세태 풍자를 동원”(164)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키치적 상상력, 만화 같은 현실, 권위나 교육 등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 그리고 숨통을 조이는 경제적 현실을 잘 버무려 독특한 인물들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바로 2000년대 젊은이들이 겪는 현실이기 때문에 공감의 폭은 폭발적으로 증대한다. 더욱 가상한 것은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가 도입됨으로써 진퇴양난에 빠진 젊은이들을 도피처로 피신시켜 다시금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어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164)
2. 대중문화와 박민규 소설의 접점
안남연은 오늘날 대중은 “흥미와 놀이에 쉽게 지치고 싫증”을 내기 때문에 “재미있지만 내용”도 요구한다고 본다. “즉 재미와 더불어 의미의 실속까지 챙기려 드는 것이 2000년대 독자들의 요구”(164)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민규는 바로 이러한 요구에 부흥하는 작가이다.
박민규는 대중을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직업의식에서 기인하는 도덕과 윤리성을 일찌감치 접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었고 한 통속이 되어 그 일원의 시선으로 작품을 완성했기에 젊은 독자들의 우상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고매한 문화예술로 간주되었던 소설은 대중과 같이 호흡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대중문화시대의 범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2000년대는 소수의 엘리트적인 변별성보다는 대중성으로 불리는 다수의 취향과 기호를 간과할 수 없는 대중의 시대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166)
3. 새로운 판타지와 현실의 대립과 조화
안남연은 박민규의 작품들이 “판타지로 겉포장은 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암담한 현실의 슬픈 고뇌를 발견”(167)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박민규의 판타지 소설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환상적인 아름다운 비현실의 세계가 아닌 삶의 무게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고통과 갈들을 판타지로 승화시켰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서글픈 현실의 탈주가 드러난다. 그것은 극복과는 다른 이야기다. 역설에 의한 효과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소설들이 현실의 고통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 극복하고자 시도했다면 박민규의 소설은 절망과 체념에서 오는 도피로써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동물로 변신함으로써 시공을 뛰어넘는 가정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다.(168)
안남연은 “다수 비평가들이 박민규 소설을 21세기 한국소설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인정하지만 그 아이콘이 비약적인 소설의 결말을 반복하는 한 자기균열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1)는 양진오의 논의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가 볼 때 이러한 비약이 바로 박민규의 역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상상적 결말은 우리를 즐거운 환상세계로 인도”한다고 보며, 이는 “현실의 높은 벽을 역설함으로써 판타지로 비상하는 것이다.”(169)
4. 현실의 은유와 새로운 전망
안남연은 박민규의 소설이 “가볍고 경쾌하고 재미”있지만, “한참 읽다보면 슬며시 서글퍼지면서 삶의 중압감에 질식”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민규의 작품에는 “비극적 종말이나 절망은 없다.”(170) 안남연은 박민규 소설의 미덕을 “절망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다. “현실의 버거움을 가벼운 상상적 결말로 유도함으로써 신선하게 마무리 짓는”(171)다는 것이다.
5. 자본의 냉담과 소설적 형상화
안남연은 “박민규 소설은 자본주의로 시작해서 자본주의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73)라고 말한다. IMF 이후 양극화 현상의 골은 매우 깊어졌고, 중산층은 힘없이 무너졌으며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또한 젊은이들은 이러한 세계로의 진입이 강제되고 있다. 안남연은 “박민규는 2000년대의 이러한 자본의 실상을 일찌감치 경험한 작가로써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본시장의 한계와 생리 그리고 소외된 인물군상에서 따뜻한 관심과 이해심을 가지게 된 것(173)”이라고 말한다.
6. 나오며
안남연은 박민규 작품 세계의 의의를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우리는 그동안 자본주의를 유토피아라고 착각했었다는 자각증상,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그 꿈이 크던 작던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심감이 무너졌을 때 오는 생의 절망을 박민규는 그 특유의 상상력으로 기린으로 너구리로 카스테라로 변신시킴으로써 슬픈 판타지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하였다.(···)
삶의 전복을 시종 유쾌하고 코믹하게 묘사하여 그들이 느끼는 좌절을 역설적으로 그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서글픈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것이 그의 소설을 단순히 가벼운 속도감이나 낯선 판타지만으로 점철된 소설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고, 그에 대한 성급한 진단을 상쇄할 수 있는 대타라고 본다. (174)
※ 나의 생각
안남연은 박민규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다수 비평가들이 박민규 소설을 21세기 한국소설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인정하지만 그 아이콘이 비약적인 소설의 결말을 반복하는 한 자기균열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양진오의 논의를 반박한다. 안남연은 박민규 소설의 미덕을 “절망에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면서, “현실의 버거움을 가벼운 상상적 결말로 유도함으로써 신선하게 마무리 짓는”(171)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박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지 묻게 된다. 내 생각에는 안남연이 말하는 바로 그 ‘가벼운 상상적 결말’과 ‘신선한 마무리’가 양진오가 지적한 자기균열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안남연이 박민규 소설의 미덕이라고 지적하는 지점이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도피’는 그저 도피일 뿐이며, 하하 웃는다고 현실이 하하 변하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박민규의 비약에서 ‘신선한 마무리’가 아니라, 극단적 절망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에서 나는 박민규가 개인적 화자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구조 자체를 건드리고 있다고 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빠가 기린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것이 정녕 ‘가벼운 상상적 결말’이나 ‘신선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결국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던 화자가 감당해야하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 오히려 거기서 폭로되는 것이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는 곳에서 부조리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 아닌가?
나는 박민규의 작품 세계가 자폐적 자기 위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가볍게 도피하면서 신선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박민규는 끊임없이 이 세계를 문제시하며, 개입과 기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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