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 읽기 정혜경,「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박민규`정이현`이기호의 소설」, 문학과 사회 2005년 여름호 제18권 제2호 통권 제70호, 2005.5, page(s): 18-423. 발제 1. 2000년대 소설의 백수, 그들이 온다. 정혜경은 오늘 날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단연 ‘백수’가 있음을 지적한다. “1980년대 소설에 ‘투사(鬪士)’가, 1990년대 소설에 ‘댄디’가 있었다면, 최근 소설에는 단연 ‘백수’가 있다.”(173) 그리고 최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백수’는 “대체로 배운 것도 변변치 않고 무언가에 몰두할만한 위인도 못 되며 도시의 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인물들”이다.(174) 따라서 “최근 소설에 등장하는 ‘2000년대적 백수’는 현재 한국 사회의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혜경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작가들이 백수의 존재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어떤 ‘다른’ 틈을 만들어내고 또 독자에게 어떤 태도를 촉발시키는가“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2. 무표정한 백수들의 200년대 버전version ‘문밖의식’ 정혜경은 “최근 소설에 나타나는 백수들의 얼굴을 캐리커쳐caricature해보면, 기본 바탕은 냉소이며 대체로는 무표정”(176)이라고 한다. 그들은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하니 감정의 잉여물을 붙들고 있을 새도 없지만,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열정을 거세시킨 현실이 있고 그들 역시 소용없는 열정을 더 이상 원하지 않”(176)는다. “그렇게 가볍게 냉소하며 현실을 수락하는” “2000년대 백수들은” “마치 선험적인 것처럼 냉소를 체득”하고 있다.(177) “백수는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지 못하고 주변에 서 있는 존재이므로 일종의 ‘문밖 의식’을 가지게 된다.”(177) 이렇게 획득된 거리를 놓고 한편으로는 ‘편입’의 욕망을 채우고, 또 한편으로는 능동적 ‘관조’의 거리를 갖는다. 여기서 전자의 경우가 정이현과 이기호이고, 후자의 경우가 박민규이다. 정이현의「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노골적으로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유리의 성에 입성하기 위해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부와 능력을 갖춘 남자와 연애하는 방법뿐”이며 이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아닌 ‘사랑 따윈 난 몰라’의 방식이 된다. 이기호의 작품 속 화자도 그들이 놓인 계급적 한계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조악한 돈의 논리를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에 편승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반면 박민규의『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능동적 ‘관조’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사회의 속도전을 직접겪으면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기이한 행적이 실은 프로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행위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소설에서 문제 삼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무능력 담론’이다. ‘프로’의 담론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 특히 소비의 민주화 시대에 소비 능력을 가지지 못한 무능력자들을 폭력적으로 배제해온 자본의 논리를 은폐한다. 소설 속 ‘나’는 ‘삼천포’에 있는 진실, 즉 능등적 백수로 대항담론counter-narrative을 만든다. 3. 수다의 발견, 그 가벼운 화법의 정치성 정혜경은 요즘 소설의 화법이 ‘수다’같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태도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자본주의의 가치 파괴적 현실 앞에서 본래의 것을 회복하기 위해 떠는 형이상학적 여행은 무력하다. 아무리 착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철저히 무기력하다. 게다가 이런 의문까지 드는 것이다. 혹시 잃어버린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의 실상을 가리거나 포장하는 허구적 이데올로기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가 안고 뒹굴어야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그 자체’ 뿐인 것이다.(180) 따라서 정혜경이 주목하는 지점은 지금의 소설들이 ‘새로운 무엇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다르게 말하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어떤 것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박민규의 화법인 “언어의 비경제성을 극대화하는 개그적 장광설은 시간과 노력의 경제성을 최고의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프로의 속도 중심 세계에 태클”(181)을 거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기호의 랩 같은 화법도 마찬가지이다. “화자의 랩은 끝나지 않는 문장, 언어 효율성을 무시하는 동어 반복, 서술어나 접속사를 생략하여 문장 간의 결속력을 떨어뜨리는 화법 등”을 구사하는 것이다. 정혜경은 “이 같은 발화의 파괴적인 화법 자체는 ‘무엇에 대해’말하는가를 논하기 전에 이미 폭로적인 메시지를 항변”하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이러한 수다는 구술성의 특징을 갖는데, 상황의존적이고 참여적이다. 즉, 이들의 화법은 “고정적인 중심에서 자꾸만 탈주하려는 잉여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며,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독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한다.(182) 한편 정이현의 주된 화법은 ‘적나라한’ 고백체이다. 정혜경은 정이현의 이러한 “‘되바라진’ 고백체가 ‘과잉순응’의 방식으로 행위의 이데올로기성을 드러낸다”(184)고 본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는 작품이「낭만적 사랑과 사회」인데, 여기서 작가는 다중의 화자를 설정한다. 이러한 “입체적 화법을 통해 ‘나’가 자발적으로 욕망(낭만적 사회)하는 것이 실은 그들(자본주의 시스템)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가짜 욕망)임”(184)이 폭로된다. 따라서 정혜경은 “박민규·이기호·정이현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가벼운 수다의 화법은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된 존재가 구사하는 ‘견딤의 언어’”(185)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소설은 “정면 대항이 어려운 힘없는 화자가 이성적인 지배 언어를 비트는 황당한 언어 구사를 통해 강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전략, 바로 그 ‘비껴-가기’가 실현되는 현장”(185)이다. “가볍고 유희적인 언어가 기존의 주류적 가치들을 잡담으로 만들고 고정적인 것들을 유동적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들의 소설 화법은 정치적이며 위험한 방식”(185)이라는 것이 정혜경의 생각이다. 4. 균열, 혹은 텍스트 공간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 정혜경은 최근 작가들의 사유 속에는 “그 누구도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깊은 허무주의가 깔려”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허무주의는 현실 도피의 결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데서 생겨났다는 점에서 타당”(185)하다고 하면서 옹호한다. 그리고 소설 속 화자들이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기는 하지만 선뜻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척도가 배제해온 ‘타자’, 곧 생산과 소비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몰린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속물적인 행위의 바탕에는 살아남기 위한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정혜경은 이렇게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이들에게 독자는 미묘한 ‘거리distance’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풍자’가 아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186)고 주장한다. 이들 작가들의 “겹의 목소리는 독자와 인물 사이에 성찰의 거리를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정혜경은 “존재의 고정성을 흩뜨려 놓는 화법, 또 독자를 적극적으로 텍스트로 불러들이는 이 화법은 구획된 경계를 넘나는 불황적인 방식”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텍스트 공간에서 생성되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끊임없이 문득문득 자본주의적 주술(呪術)에서 깨어나게 하는 균열의 행위”라고 의미 짓는다. 5. ‘위험한’ 수다의 이중성 정혜경은 오늘 날의 작가들의 ‘수다’가 대안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또한 위험성 역시 갖고 있다고 본다. 즉, 박민규·정이현·이기호의 소설이 추구하는 기존의 삶과 부재의 삶 사이의 불온한 존재 방식은 그 아슬아슬한 긴장을 놓치면 매우 허약해진다. 왜냐하면 “작가들이 소설에서 보여준 균열의 방식은 낯선 만큼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관점의 수인(囚人)’이 될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수다가 소비적으로 자가발전하는 경우 ‘유희의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도 있다.”(190) ※나의 견해 정혜경이 본 글에서 시도한 분석은 탁월해 보인다. 또한 ‘수다의 정치학’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더 도움이 되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수다의 이중성을 지적한 부분인데, 구체적으로는『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비판한 지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능동적 백수는 자의식적 내면을 통해 주체를 구축하고 억압적인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21세기 판 문제적 개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한쪽 대립항을 선택함으로써 동일성을 획득했을 때 인물은 안정감을 얻는 대신 소설적 긴장은 풀어질 수밖에 없다. 백수 혹은 아마추어라는 대항담론은 이분법적 대립 구도의 폐쇄성을 수락한 것이며 일종의 ‘계명에 대한 계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대 방향에서 욕망의 흐름을 또 하나의 틀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행위이다.(191) 나 역시 구조적으로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긴장이 풀어졌다는데 동의한다. 평론가 권희철도 『삼미』에서 말하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라는 식은 “세속의 진부한 가르침들과 너무 닮”아 있고, “고매한 정신과 악마적 물질, 바깥으로의 구원의 약속이라는 영지주의적 이분법과 묘하게 닮아”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보자. “진짜 인생은 삼천포”라는 테제가 진부할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 진부함이 실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바디우는 “진리들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주체들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변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충실하게 실천하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박민규가 이 소설에서 말하는 삼미의 정신이 무비판적으로 “비정규직의 삶을 받아들이라”는 테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자본을 뒤틀리게 하는 테제라고 생각한다. 경쟁에 반(反)하고, 삶을 성찰하며, 동료와 더불어 사는 것에 충실한 것. 그것이야 말로 반(反)자본주의 정신 아닌가? 나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내재하고 있는 폐쇄성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고는 보지 않는다. 진리는 또 다른 진리에 의해 상호 성찰되어야 하지만, 그 진리들이란 지속적인 실천 없이는 구현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차원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끝없이 유예하는 길은 결국 오늘의 자명한 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보라. 오늘의 수 많은 폭력과 고통들이 그렇게나 에둘러 돌려 봐야할 만큼 모호한 것들인가? 아니면 자명한 것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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