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

[독서감상]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두괴즐 2011. 6. 6. 22:45



나는 왜 쓰는가

저자
조지 오웰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0-09-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인간 본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자 조지 오웰의 삶과 사유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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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 그렇다면, “나는 왜 쓰는가?”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권력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64쪽.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삼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한 저서다. 그는 검사 출신으로 삼성에 입사한 후 로비스트로 활동했었다. 김용철은 자신이 구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개적으로 삼성의 비리를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양심고백은 언론의 의도적인 공작에 의해서 회피되었다. 이 책은 주류언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인 신문사라고 불리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에도 광고를 실지 못했다. 심지어 <경향신문>의 고정 칼럼리스트였던 철학자 김상봉의 글이 이 책에 대한 서평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위질을 당했다1). 오웰은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고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의 우리사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조지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참전경험을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잔혹함과 더러움과 헛됨을 생각하다보면 꼭 발설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는 말이 한마디 있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자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153쪽.


 그의 이러한 발언은 우리의 지식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문학자 이택광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론 논쟁이란 대체로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력’을 겨루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현실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할 순간에 텍스트로 도망가서 상대방의 ‘학습 수준’을 거론하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론은 이렇게 위급할 때 위기를 모면하는 대피소가 아니라, 전장을 함께 누벼야 하는 무기다”라고. 조지오웰은 ‘중립’이란 단어의 기만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라고. 그는 결코 숨지 않는다. 양비론을 방패삼지도 않고 거창한 철학 뒤에 숨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그저 거창하게 철학자나 이론가의 테제를 나열하면서 그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그것을 유식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엄밀한 독해’라는 명분을 대고 사실상 공부(혹은 책읽기, 글쓰기)가 현실과 더 없이 괴리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지오웰은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수의 권력층이 요구하는 마약(같은 글쓰기) 만들기에 반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모든 글쓰기, 그리고 모든 예술과 교육, 이론, 담론, 말들이 다 그러하다. 그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공감한다. 강풀의 웹툰 만화나 혹은 서태지의 영상 밑으로 이런 댓글들이 많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지 좀 맙시다. 만화(예술)는 그냥 만화(예술)로만 좀 봅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현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창작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념이 창작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시선’의 거둠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거나, 아니면 마냥 순진한 태도 일 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이렇게 밝힌바 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297-299쪽.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고.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나의 재능이 누구보다도 궁핍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 나는 처음에는 그저 행복을 생각할 따름이었다. 나의 행복과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 말이다. 행복은 함께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것’보단 ‘경쟁’을 말했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게끔 강요당했다. ‘인간다움’이라는 것도 ‘비효율’과 ‘비합리성의 산물’이라는 판정을 받아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강요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더불어 사는 것’과 ‘인간다움’이 폐기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판단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강요당하고 있고 그 육중한 무게와 소리 가운데 무력하게 끌려 들어가고 있다. 그 강요의 근원지, 마음의 유혹을 조장하는 마력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그것은 물질의 신이자 자본 그 자체인 ‘맘몬’에 의해서 이다.


 나의 쓰기는 ‘맘몬’과 맞서 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맘몬에 대한 경고는 이미 2000년 전 예수가 한 것이다. 그는 수많은 비유를 들어 맘몬(그리고 억압하는 자들과 권력)에 대적했고, 사랑을 전파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나는 그의 정신과 실천을 계승해야 한다. 그 시작은 예수의 티셔츠를 팔거나 혹은 맘몬의 함에 돈을 넣는 대가로 천국행이라고 쓰여 진 티켓을 판매하는 짓(교회의 변질)의 중지를 요구하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맘몬의 사상을 전파하는 맘몬의 성전인 ‘삼성’을 비판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나의 읽기(공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한 것이 되어야하지, 숨어들기 위해 방패들을 ‘콜렉션’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사명에의 힘에 기댄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행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남들도 다 자기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괴롭히기 십상”이 되는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맘몬’에 대적하고 ‘사랑’을 말하여 존중된 인간다움 위에 더불어 살게 되는 것을 지향한 것. 그것이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