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

[독서감상] 공지영,『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두괴즐 2011. 6. 6. 22:44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저자
공지영 지음
출판사
오픈하우스 | 2010-01-1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상의 모든 딸들, 건투를 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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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공지영,『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당신의 걸음은 ‘무소의 뿔’ 같은 걸음인가요?



 본 소설은 결혼제도(가족의 구성)에서 비롯된 폭력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폭력을 거절하고 이혼녀가 되었고, 한 사람은 폭력을 감수한 일상의 지속을 감행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폭력의 희생 끝에 파멸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정리해버리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폭력’에 대한 사유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사랑의 고갈, 일상의 부득이함을 인정하며 참고 살아가는 경혜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 혜완도 역시 행복하지 않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구축했던 영선은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이들의 불행은 정녕 누구의 책임인가? 단순히 남편의 문제인가?


 혜완은 선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세대의 남녀 갈등은 불가피 한 거야. 우리네 어머니들은 딸보고는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고, 아들에게는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 거”라고.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필연적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인류학자들은 결혼제도가 인간에게 있어서 더 없이 폭력적인 제도라고 평가한다. 인간의 본성(불특정 다수를 향한 욕망의 지속)과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문명을 개척하고 사회를 만든 한 본성에만 의거해서 살 수만은 없다. 잘못된 제도는 고쳐져야 하지만, 그에 앞서 대안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갈되지 않는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까? 만약 그것이 전적으로 가능해서 서로에 대한 욕망의 지속이 유지될 수 있다면 결혼제도를 폭력적으로 흔드는 일이 예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개의 갈등은 결국 서로에 대한 소원함에 있고, 그것은 자신의 법적 배우자로 부터 결핍을 느끼게 때문에 생긴다. 자신의 채우지 못한 욕망은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부로의 욕망의 분출은 폭력과 상처를 남긴다.


 “너와 결혼한 이유는 너와의 연애 기간이 마침 결혼적령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야.”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대개의 경우 유효한 말이다. 만약 더 이른 시기에 연애를 했다면 그저 뜨겁게 사랑하고 헤어질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보통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포섭된 그들은 연애의 시절처럼 쉽게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인연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제도의 강제에 의한 것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헤겔이 서둘러서 아이의 출산을 통해 변증법적 사랑의 갱신을 요청한 것도 사랑의 필연적 죽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시작과 함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의 배려는 그 필연적 죽음의 지연을 가능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죽음을 극복시켜주진 못한다. 따라서 최후의 보루는 ‘정(情)'이 된다.


 인문학자 고미숙은 “시절인연”이라는 개념으로 사랑을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따라서 그녀는 “중요한 건 반쪽이를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시절인연의 속성’이다. 그녀는 “사랑에도 엄연히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는 법”이라고 단언한다. 즉, 사랑의 시절이 끝나는 것(사랑의 소멸)은 봄이 오면 후에 여름이 오는 것처럼 당연(자연스러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다음 ‘시절인연’의 가능성이 되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고미숙의 성찰은 남녀가 연애의 시절일 때는 충분히 유효하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 이후이다. 결혼 이후에도 이러한 시절인연에 기댄다면 파경은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결국 고미숙은 결혼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결혼제도는 ‘시절인연’을 원천적으로 막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동의를 얻지 못한 결혼제도의 부인은 더 큰 사회적 폭력으로 회귀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이혼을 해도, 결혼을 유지해도, 혹은 자신의 인생을 남편(배우자)에게 투사해도 불행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제도의 파기에 대한 상상은 유의미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안드로메다적이다. 결국 최선은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환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기적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것인데 이 역시도 달나라 토끼스럽다. 결국 공지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말한다. 물론 그 걸음은 결혼제도 밖에서의 걸음일 수도 있고, 안에서의 걸음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는 것의 인지와 실천에 있을 것이다. 그 걸음은 주체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구성해가는 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단련되지 않는다면 항상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당신의 걸음은 어떠한가?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걷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