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독서감상] 조정래,『허수아비춤』
- 자발적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경제민주화’를 이루자.
2010년의 마지막 날이다. 올해 서점가를 뒤흔든 책은 단연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언인가』라고 할 수 있다. 알라딘의 스타블로거 ‘로쟈’도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다1). 하지만 올해 초에 가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고 할 만한 책이 있었다. 바로 김용철 변호사의『삼성을 생각한다』이다2). 그러나 지금도 이 책이 여전히 ‘조용한 혁명’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 책을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용한 혁명’의 지원군이 있다. 바로 조정래 작가의『허수아비춤』이다. 두 권의 책을 모두 본 독자들은 “『삼성을 생각한다』의 소설판이 바로『허수아비춤』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삼성을 생각한다』는 치워졌지만『허수아비춤』은 그곳에 남아 계속해서 ‘재벌’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중에게 던지고 있다. 올 한해 주요 키워드는 분명 ‘정의’였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키워드는 ‘재벌’ 그리고 ‘삼성’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정의’ 덕분에 ‘삼성’은 올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3).
『굿바이 삼성』에서 김용철은『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사회의 현실과 당신이 말하는 정의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중산층 사람들마저 대거 집에서 쫓겨나는 현실에서도 정부와 의회가 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의 금융 부자들에게 막대한 특별지원금을 안겨주는 나라. 돈이 없으면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길거리에 버려지는 나라. 햄버거 가게에서 소년이 총 맞아 죽는 나라. 정의를 독점하고서 다른 나라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나라. 이런 현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여러 가지 한계 상황에서 보다 정의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그의 강의는 하버드 대학생들이라는 미래 미국 사회의 메인스트림 집단을 벗어나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의란 어떤 한계 상황과 맞닥뜨려 자신이 지닌 가치와 이념에 따른 선택이 최선임을 증명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논쟁이 불필요할 만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48-49쪽)
나는 올 한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삼성을 생각한다』였다면 한국사회가 더 구체적인 담론의 장에서 실체적 대상과 맞대결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생각이 든다. 철학적인 사유의 중요성은 명백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의 고발에 비한다면 덜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각기 지향하는 목표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삼성을 생각한다』보다『정의란 무엇인가』가 훨씬 많이 팔리고 더 주목을 받았기에 대한민국의 기득세력과 권력층이 한결 안도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 장정일은『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까지 말한다. “무척 역설적이게도 이 열풍이 은닉한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책이 100일 동안 총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 집회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4)라고.
하지만 재벌의 범죄에 대한 고발, 경제민주화의 촉구는 조정래의『허수아비춤』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화염병을 앞세우고 가투에 몸 던졌던 그때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정치민주화’만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도 함께 꿈꾸었었다. 노동자들의 열성적인 노동에 힘입어 기업들이 성장하고, 기업들은 양심적으로 투명경영을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서 복지 제도와 함께 분배가 잘 이루어져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치민주화가 시급했기에 경제민주화를 함께 내세울 수가 없었다. 단계적으로 실천하자고 했다. 그 유보의 세월 속에서 기업들은 거대 공룡으로 성장한 것도 모자라 분배와 반대의 길인 비자금 꿰차기에 나선 것이었다. (250-251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경제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허수아비춤』을 좀 더 들여다보자.
우리는 흔히 국민을 나라의 주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투표권 행사. 남·여·유·무식을 불문하고 누구나 한 표씩인 권리. 그 권리는 법 앞에 만인 평등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것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다. 선거는 지배 계급에게 주기적으로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정당성을 선사해 주는 제도일 뿐이다. 프루동의 말이다.(···) 그들의 배신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또 다른 감시와 감독 조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시민단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는 5만여 개에 이르는 시민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모든 권력 기관들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감독한다.(···) 그런 튼튼한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는 굳건해지고, 국민들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순수하게 국민 개개인의 돈으로 운영된다. 국민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 일정액의 회비를 낸다. 그 회비가 시민단체들의 맥박을 뛰게 하는 피가 된다. 그들은 하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여러 개의 시민단체에 가입해 후원하기도 하고, 직접 자원봉사에 나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시민단체가 몇 개나 있을까. 대충 2만여 개이지만,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단체는 2백여 개를 넘지 못한다.(···) 국민들의 참여 부족, 무관심 때문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속력 강한 회원들로 이루어진 5만여 개의 시민단체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수많은 눈들로 정치권을 감시하고, 경제권을 감독하고, 법조계와 공직 사회와 언론계를 눈 부릅뜨고 지켜야만 비로소 전 사회는 맑고 깨끗해져 선진국의 문이 열리게 된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다. (373-376쪽)
다소 길게 인용했는데, 어쨌든『허수아비춤』에서 이야기 하는 중요한 방안 하나가 바로 ‘시민단체의 활성화’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가 구축해 나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단 ‘시민단체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각 시민들의 ‘적극적 사회참여’가 필요한데 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우리도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이 있고, 2008년에는 뜨거웠던 촛불집회도 있었다. 하지만 촛불집회는 단발성에 그쳤고,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의 힘은 잃었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단체는 시민들의 후원금을 적극적으로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직 ‘시민단체’라는 것을 가까이에 있는 무엇, 그러니까 얼마든지 참여 가능하고 해볼 만한 것, 그리고 내가 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단체의 활성과 더불어『허수아비춤』은 또 하나의 카드를 제시한다.
우리는 지난 80년대에 피 흘려 ‘정치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모든 재벌들이 그 어떤 불법 행위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를 뽑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소비자로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권한인 ‘불매’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을 적극 벌이는 것이다.(···) 투표가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이듯이, 우리가 단결한 불매운동은 기업들과 우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다. (326쪽)
그 카드는 ‘불매운동’이다. 화자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 바로 불매운동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일광기업은 1조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범죄기업’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어마어마한 금액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한국의 자랑이라고 들어왔던 삼성은 비자금의 액수가 10조에 달한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욱 가관인 것이다. 비자금 10조는 삼성의 직원들에게 돌아가거나 혹은 고객에게 돌아갔어야 하는 돈, 그리고 세금으로 납부되어 국가운영의 제정으로 충당됐어야 하는 돈을 빼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정치인, 법조인, 학자, 언론, 공무원 등등에 “멕여”서 절대 권력에 올랐다. 삼성은 ‘돈이면 다 된다’는 맘몬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대한민국을 접수했고, 그것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었거나 혹은 무심했던 국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 왜 그런 사태가 거듭 벌어지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 망칠 그 거대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봉그룹이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주인이고 이 사회의 주인인 국민과 대중들이 그 끔찍한 사건을 방관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고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우리가 그 어리석은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기업들은 더욱 신바람 나게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간다. (322-327쪽)
내가 삼성불매운동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뒤, 주위의 사람들에게 권면할 때면 자주 돌아오는 반응이 있다. “너는 삼성이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그러냐? 그래도 우리의 국가대표잖아.” 내가 삼성에 대해 깊이 아파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삼성이 내게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삼성라이온스 야구팀을 열렬히 응원했었고, 영국 프리미엄리그 축구팀의 첼시가 삼성의 스폰서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팬을 자처했었다. 사랑하는 사촌형이 삼성 애니콜 연구소에 취업을 했을 때는 나 역시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나는 삼성이 사랑받을 만한,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으로 탈바꿈되기를 꿈꾸기 때문에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다.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과 법조계, 우리 기업과 언론 사이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국민경제를 위하여······’ 하는 판결문이나 기사들을 정말 자기들을 위하는 것이라 믿을 뿐 아니라, 그 단순한 생각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반복됨으로써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 두 가지 효과가 합쳐져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업에게 배신을 모르는 자발적 복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416-417쪽)
앎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양심적 발언과 행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라는 것이 거짓말임을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광고료라는 생명줄을 붙잡힌 언론은 제대로 된 여론형성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삼성의 중요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주류 권력가들과 그에 기생하는 학자 및 기업임원들(그리고 근로자들) 역시 연기를 피우며 성 안의 실체를 감춘다. 그래서 나 같이 성을 기웃기웃하다가 우연히 성벽의 구멍5)을 통해 안을 본 사람만이 진실의 일면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정말이지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고, 심한 우려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 구멍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고, 그 안의 진실을 보게끔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 혼자 그 진실을 알아봤자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고 경각심을 가지고 같이 고민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나 시민단체를 활성화시키는 것 모두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할 때만이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경제민주화’를 이제는 실현해나가자. 이것은 우리의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그리고 이 숙제는 ‘삼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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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쟈는 이와 더불어 두 권의 책을 더 꼽고 있는데, 최근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는 장하준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지젝의『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가 그것이다. 장하준의 책은 최근 의미심장하게 읽고 있는 중이고 지젝의 책은 리스트에는 꽤 오래 전에 올려두었는데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조만 간 시간을 내어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2)『삼성을 생각한다』는 언론사들의 광고거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3) 물론 ‘정의’가 올해의 화두가 되어 유효한 측면이 분명 있다. 로쟈는 “가령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로 강행처리하고서 여당 원내대표가 “대다수 국민들이 예산처리를 바랐고 이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한 것도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발한 ‘정의 담론’의 효과 아닌가. 비록 ‘국가를 위한 정의’와 ‘권력을 위한 불의’를 혼동한 감은 있지만 그의 발언에서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읽을 수 있다.”라고 의의를 밝힌바 있다. 나 역시 이러한 것에 공감한다. 하지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로인해 밀쳐진 부분들 역시 살펴야한다.(로쟈의 블로그 참조)
4) 장정일이 프레시안에 기고한『정의란 무엇인가』의 서평 중 일부다. 서평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이다.
5) 내게 그 구멍의 역할을 한 책이 바로『삼성을 생각한다』와『굿바이 삼성』이다. 물론 이외에도 좋은 저작들과 글들이 있지만, 일단 이 두 권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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