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아마미야 카린+우석훈,『성난서울』
아마미야 카린의 목표는 “위협받지 않고 일하며 살 수 있는 사회”이다. 영화 <새로운 신>의 경험 이후 작금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줄기차게 하고 있는 일들 중 하나는, 무직과 가난은 ‘자기 책임’이며 정신과 도덕,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정신적 우익들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다니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애국’은 없다. 조국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더욱 전가시키는 국가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15쪽.
천막 안에서 60일에 걸쳐 단식을 하며 농성하고 있는 김소연 씨와 유흥희 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1996년 이른바 정리해고법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후 연말 총파업을 벌였지만, 다음 해 노·사·정 합의로 정리해고를 인정해 준 것은 민주노총 지도부였다는 사실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그해 8월24일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지도부는 정부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277명을 정리해고하는 데 합의해 준다. 그 277명 안에는 식당에서 일하던 아줌마들 14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36일 간의 긴 파업투쟁은 그렇게 끝났고,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벌였던 강고한 투쟁의 드라마는 “신 노사 관계 옥동자 탄생을 위한 산고의 과정”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때 노·사·정 협상의 정부 측 대표는 나중 인권 변호사라는 후광을 입고 대통령이 되는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 노무현이었다. 오늘 첨예한 문제가 된 비정규직 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11월이다. 2008년 9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식투쟁 현장을 방문한 한 여성이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2006년 비정규직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될 때도 제대로 싸워내지 못한 노동계 출신 의원들. 10년 후 그 법들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칼이 되어 날아올지 모르고 어리석게 싸우지 못한 우리는 모두 그녀들에게 죄인이다. 그 법들이 기륭을 만들고, KTX를 만들고, 이랜드를 만들고, 코스콤을 만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왜 이렇게 순진한가.” 49쪽.
“이 투쟁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는 “열심히 일하면 고용은 안정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그런 현실에 의문을 품고 일어선 그녀들은 회사 측이 조직한 구사대 남성에게 구타당해 코뼈가 부러지기도 하고,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탄압이 있는 다른 한쪽에는 “아이들 학비 문제가 있어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었다. 54쪽.
최저시급
2008년 기준 환율을 1,469원/ 1달러($)와 1,542원/ 100엔(¥)으로 할 때, 최저 시금은 대체로 한국이 3,770원(2.56달러), 일본이 800엔(8.39달러), 미국이 7.5달러(캘리포니아의 경우 8달러)로 추산된다. 일본과 미국의 최저 시급은 지역마다 다르나, 평균치를 계산한 것이다. 73쪽.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데 급료가 다르면 밥 먹는 장소도 달라집니다. 그런 현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비정규직 사람들이 조합을 만드는 데 반대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결국 안정된 직장을 요구하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강해서 다들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가지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공무원이 되기만 하면 잘릴 염려도 없고 생활은 쭉 보장되는 거니까요.” 75쪽.
* 식권 색깔로 구분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울 강남성모병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식권을 구분해서 사용하게 하고 있다. 정규직은 주황색 식권을 한 달에 20장씩만 총무팀에서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식권 색깔에 맞춰 따로 줄을 서야 한다.(···) 회사는 왜 식권 색깔까지 구분하려 드는 것일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다르다”는 자기 암시를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이 지나친 저비용/고효율의 훈육방식은 실로 참기 힘든 인간에 대한 무례가 아닐 수 없다.
* 통근버스 좌석으로 구분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부산의 한 조선업체는 통근버스 좌석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구분해서 이용하도록 하는 ‘좌석 지정제’를 실시했다. 정규직은 통근버스의 1~23번 자리에, 비정규직은 24~25번 자리에만 앉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회사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3배나 많다고 한다.(···) 통근버스의 수를 늘려 모든 사람들이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좌석 지정제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현실로 실천하는 회사 측의 태도는 쉽게 용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76쪽.
그 말을 뒷받침하듯이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20대 사인(死因) 중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2002년 이래 20대, 30대의 사인 1위는 줄곧 자살이다. 77쪽.
대학 진학률이 80퍼센트를 넘는 한국에서 아무리 대학을 나와도 정규직 일자리조차 없는 현 상황. 그러나 여기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문제는, 이것이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 생각되어지고. 또한 그런 인식이 조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빈곤이나 실업 문제 등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이해가 희박해 지고,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이, 심지어는 당사자조차도 이러한 문제들을 ‘자기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유럽 같은 데서는 젊은이들이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사회 문제로 날카롭게 제기하거나 구체적인 요구로 제시하는데 왜 일본이나 한국은 이것들을 자기 탓, 자기책임의 문제라고 생각해버리는 걸까요?” “(···)심각한 것은 서로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경쟁사회의 원리를 가장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지요.” 78쪽.
* 범람하는 자기계발과 처세술 관련서적들
자살과 우울증 급증 현상과 자기 계발 열풍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실이다. 사회적 낙오자나 무능력자로 낙인 찍힐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자기계발에 대한 엄청난 강박으로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강박을 겨냥하여 무수히 쏟아져 나온 책들 가운데는, 심지어 어린이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서적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 중『리더를 꿈꾸는 초등학생이 꼭 알아야 할 101가지』란 책에는 “힘들더라도 겉과 속이 달라야 한다”라거나 “기상 캐스터처럼 밝고 명량하게 얘기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소녀들이 꼭 해야 할 자기계발 77가지』란 책은 종아리 스트레칭으로 미모 관리하는 법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 자기책임
빈곤이나 일자리 문제가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책임에 달려 있다고 하는 언설의 배후에는 ‘무능력 담론’이 도사리고 있다. 이는 비주류, 실업자, 백수, 부랑자들, 주변부 청소년들에 대한 근대 자본주의의 전통적인 훈육전략이다. 그리하여 산업사회에 자격 있는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회적 무능력자들에 대해 혐오와 짜증, 심지어는 분노를 표출하는데, 이것은 노동하는 주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뿜어내는 방어적 편집증에 다름 아니다. 한편 이러한 훈육 자본주의를 지나 탈근대 자본주의에 이르면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가 이 ‘무능력 담론’을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언제라도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 앞에서 사람들은 끊임없는(계속적인) ‘능력화’를 요구받게 된다. 창의성, ‘아침형 인간’이 권장되는 사회는 온통 자기계발 열풍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79쪽.
지난 2006년 3월 프랑스 학생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인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법안은 사용자가 만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면 첫 2년 동안은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었는데, 당시 이 법안에 반대하여 거리에 나온 시위자는 300만 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이와 같은 시위는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일자리는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과 ’실업은 국가적 책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오랫 동안 자리 잡아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위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말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항변도 있었다. “처음에는 쓰고 버릴 수 있는 손수건이 있었다. 지금은 쓰고 버릴 수 있는 청년들이 있다.” 80쪽.
이런 버거운 현실 속에서도, 한국에서 비정규직 고용, 워킹 푸어 문제 등 20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들과 씨름하는 당사자 그룹이 있었다. 바로 <희망청www.hopenetwork.kr>이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은 ‘88만원 세대’에서 이름을 따온 ‘88무브먼트movement'를 전개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기업에 적극 연계하고 참여하는 활동을 통해 실업 문제 해결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10년 정도 청년층의 실업 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원래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어 학생들이 정치적인 운동을 해왔습니다만 최근에는 학생운동 자체가 쇠퇴하고 있어요. 과거처럼 운동이 활성화되지 않는 것은 학생들이 생활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활비를 버는 데 필사적이고 실업률도 높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 운동조차 할 수 없는 거지요.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쫓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 측은 경력이 있는 젊은이를 요구한다. “경력을 쌓기 위한 돈도 시간도 없어요.”
“대학 진학률은 84퍼센트인데 졸업해도 취직을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그런 길밖에 없어요. 대학 등록금이 1년에 1,000만 원 정도인데 대출을 받는 학생도 많아요. 그렇게 되니까 성매매 같은 불법적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생기는 거지요. 혹은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한다든지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83-84쪽.
일본에서는(··· ) 대형노조 중심의 기존 메이데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메이데이가 주목을 받고 있다. 파견사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 프리터, 노숙자 등이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인디 메이데이’(독립 노동절)가 그것이다. 인디 메이데이 행사는 2005년 청년 비정규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프리터 전반노조’가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깃발을 올린 이후 5년째를 맞는다. 비정규직, 프리터, 홈리스 등 구성이 다양한 만큼이나 여러 형식의 행사들이 각지에서 벌어진다. 1920년 이후 해마다 5월 1일 열려온 기존 행사가 노조 가입율 하락과 참여자 저조로 이름뿐인 행사라는 지적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인디 메이데이는 기존의 메이데이 행사와 진행 방식도 많이 다르다. 트럭 위에서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고 춤을 추는가 하면, “빈곤은 자기 책임이 아니다” “집세를 내려라” 등 구호도 다양하다. 아마미야 카린에 의하면 이 운동의 핵심은 ‘재미’이다. 잃어버린 삶의 신명을 찾는 것이 운동의 과정이자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93쪽.
우석훈은 ‘8자형 사회경제’의 핵심은 ‘분리’라고 적시한다. 중남미가 그랬듯이, 주거와 교육, 시작에서 상층부와 하층부가 ‘따로 노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타워팰리스의 등장은 8자형 경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이 주택 양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과 섞여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
타워팰리스는 이른바 ‘요새fortress주택’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접근할 수 없다.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주상복합은 부(富)를 표상하는 ‘지역 속 강남’으로 전국 곳곳에 출현한다. ‘서울 강북의 강남’ ‘부산의 강남’ ‘대구의 강남’ 식으로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분리는 주거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분리, 시장의 분리를 거쳐 도달하는 가장 극단적인 결말은 ‘8자형’ 혹은 ‘눈사람형’ 사회·경제구조의 완전한 분리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국민 경제라는 이름으로 통합이 불가능하다. 103쪽.
<연구 공간 수유+너머www.transs.pe.kr>(···) 이곳은 연구자들이 설립한 <연구와 공동생활을 위한 코뮌commune>이다.(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실험적인 공동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본디 분리되기 십상인 학문과 ‘사는 것’,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지향하는 공간(···)
“한국의 재야 연구기관 수유+너머의 실천 기록-지식과 일상이 하나로 겹쳐지고 일상이 다시 축제가 되는 기묘한 실천이 이루어지는 공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 혁명과 추구하는 길이 일치하는 비전을 탐색하는 공간. 137-138쪽.
“10년간의 연구실의 시도는 어쩌면 실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까지 없었던 방법으로 실패하는 것’을 즐기고, 거기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면서······자신들조차 무엇을 해나갈지 예상도 할 수 없는 것. 그거야말로 이 공간의 참모습이다.”(···)
“최종 목표라는 설정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최종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니까요. 즉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리 하고 싶지 않다는, 아니 하지 않겠다는 게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먼 미래에 온다고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서는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전제된 것인데, 하지만 코뮌적인 관계를 만들어 간다면 ‘지금 여기서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 집니다. 그래도 굳이 최종 목표를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정도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내부에 외부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살벌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외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촉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목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무수한 외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와도 어떤 의미에서 연대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연구자들의 공동생활의 장이자, 삶과 운동을 연동(聯動)시키는 공간이며, 각자가 지닌 ‘선물’이 교환으로 성립하는 <수유+너머>. 이념도 흥미롭지만, 그러나 내게는 그보다도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밥을 먹거나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를 하거나 토의를 하는, 그런가 하면 아이들이 놀거나 낮잠을 자거나 요가를 함께 하기도 하는, 그런 눈 앞의 ‘잡탕’ 같은 공간의 풍경이 기적같이 생각되었다. 젊은이도 있고 외국인도 있는, 강의에 따라서는 어린이도 오고 고령자도 참가하는, 그래서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곳. 그런 ‘꿈의 공간’이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며, 오히려 그것을 양식으로 자라 10년이나 지속되어오고 있다. 분노만으로도, 과학만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전 세대의 교훈을 아는 이들의 새로운 실험에 박수를! 157-158쪽.
노동운동에 더 기대할 것이 없다며 돌아서거나 체념하고 있는 젊은이들. 이것 역시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다. 젊은 세대나 비정규직 당사자에 의한 인디 노조 등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운동이 활기를 얻어가고 있지만, 일본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자책하며 더욱 깊이 ‘자기책임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
일상에 쫓겨 생각할 시간이나 여력조차 빼앗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나 ‘자기계발’이다. “죽도록, 지쳐 나자빠지도록, 자신을 몰아세우라!” 이 신자유주의의 저언명령에 따라 자신을 과도하게 몰아붙여 자기 향상에만 전력을 기울거나, 어차피 정규직이 못될 바에는 다른 자기 길을 찾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그나마 행복하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삶들은 다만 전전긍긍할 뿐이다. 185-186쪽.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 문제에 달려들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만났다. <서부 비정규노동센터 준비모임>.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라는 가치 아래 힘겹게 연결되어가던 사람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이 단체는 “비정규직 문제와 지역주민을 연결하는 것”을 커다란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문제는 개별 사업장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며 지역 비정규직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으므로 이 활동에 전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정규직 운동이 감당해야 할 일종의 숙명이다. 187쪽.
“저는 지금까지 일본의 프리터들이 무척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임금도 높고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돈을 모아 해외여행도 가고, 일본 문화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태가 상상과 전혀 달라서 놀랐어요.”(···) ‘거품경제’ 무렵의 일본 프리터에 대한 이미지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191쪽.
그렇다면 그녀는 그 시기에 부유했을까? 실제 그녀는 우익 단체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실제로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았다고 알고 있다. 1996년의 일이다. 비정규직이 우파를 지지하는 것은 사실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다. 대부분의 우파 정당들은 비정규직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이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박탈하거나 축소시키는 일들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공통점 하나를 찾자면 정치가 아주 후진적이라는 점이 있을 것이고, 흔히 계급투표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합리적인 대의제 정치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대중에게 배신자인 것만큼이나 일본의 정치인들도 그런 것 같고, 경제적 이해와 같은 소위 ‘계급’ 분석으로는 전혀 투표 성향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이 된 사회이다. 208쪽.
한국은 아파트를 사면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오래 가지고 있어 특히 건물상태가 노화될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현상을 갖는다. 이게 바로 ‘밀도의 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재건축이 만들어내는 한국적 특수상황이다. 그래서 아직도 멀쩡한 20년 갓 넘은 아파트를 일부러 보수하지 않고서는 재건축을 해야겠다고 거주민들이 우기는 그런 웃기도 어렵고, 생태윤리의 관점에서도 건전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보통 아파트와 같은 유형의 공동주택은 구매 시점부터 노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래야 아파트의 투기적 목적 같은 것들이 사라지게 되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된다. 우리나라의 다세대나 빌라가 그렇고, 또 대부분의 나라의 주택들이 구매 시점부터 약간씩 하락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그러한 아파트의 정상화가 일본에서는 대체적으로 2000년 즈음에서 회복되었고, 그 즈음에서 소위 일본의 토건족 정서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진 일련의 다른 세대 작가와 예술가들이 등장하는 것 같다. 218쪽.
신자유주의와 토건질서가 아직도 굳건한 한국에서 가진 것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많은 경우 파편화되어 있고, 개별화되어 있고, 공식 경제의 언저리에 위치한 그야말로 경계인일 뿐이다. 어쩌면 이들은 더 보수적이지도 않고, 더 우파적이지도 않고, 다만 삶이 피곤할 뿐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21세기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의 스타들이 실제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도대체 누구한테 오는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은 채, “어서들 빌려다 쓰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점에서 정말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돈 버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부업체 광고 같은 것 혹은 다단계 광고 같은 것은 좀 너무한 일이다. 227-228쪽.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라는 구호는 3년 전 프랑스에서 생애최초고용법을 시행하려고 했을 때, 프랑스의 대학생들과 노동조합에서 내걸었던 구호이다. 이 때 프랑스 파리는 불 타오르는 폭동에 휩싸였고, 처음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 고용자는 언제든지 사장이 임의로(2년 이내에) 해고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폐기되었다. (···)
한국에서 최근 시행되는 청년 인턴제는 이보다는 몇 배 악랄한 것인데, 프랑스와 비교하면 아예 1년 미만에서 해임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 기간이 1년 미만이 된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 퇴직금을 1년 이상 근무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것조차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악덕 알바 업주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방식을 정부가 직접 사용한 것은 지독할 정도로 악랄한 일이다. 원래 정부는 경제적 효율성과 함께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정책의 일반적인 수용성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인데, 해도 해도 좀 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상적이라면 이 시점에서 한국의 노조, 그것이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이런 악랄한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민주당이 지금 저 꼴이고, 진보정당은 흔적도 없다시피한 지금, 사실 최소한의 물리력으로 바리케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 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들의 대표적 조직들은 형식적인 성명서 몇 번 내고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는 아예 한 술 더 떠서 최초 고용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공무원이든 민간기업이든, 교묘하게 뒤틀린 통계들을 제시하면서 올해 졸업생들 중 가까스로 정규직에 들어온 사람들의 임금을 삭감했다. 이게 내가 세대 착취라고 부르는 사건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충돌은 별로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고, 재수없게도 금년도 졸업하는 대학생들은 1개월 미만의 인턴이거나, 임금이 삭감된 정규직이거나, 둘 중의 하나만의 선택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게 무서운 사람들은 휴학(모라토리엄)을 하면서 경제 사정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며 대학 기간을 연장하고 있다. 241-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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