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장하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서론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례 없는 규모의 재정 및 통화 지원으로 2008년 금융 위기가 세계 경제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겨우 막아 냈음에도 이 사건은 대공황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경제 위기라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 재앙은 결국 따지고 보면 1980년대부터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는 항상 그냥 내버려 두면 시장이 알아서 가장 효율적이고 공정한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각 개인은 자기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에 효율적일 수밖에 없고,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자기가 가진 생산성에 맞는 보상을 받게 되므로 공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왔다. 기업들은 관련 시장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회사의 이익에 좋은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면 부의 창출이 극대화되고, 결국 사회 전체가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시장의 효율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잘못된 평등주의를 믿고 부의 창출 범위를 제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주로 정부가 개입해서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정부는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 더 나은 성과를 올릴 능력이 없다. 좋은 사업적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도 그렇게 할 동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시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줄곧 들어 왔다.
이 말을 따라 지난 30여 년 동안 대부분의 나라가 자유 시장 정책을 추진했다. 정부 소유의 기업과 금융 기관들을 민영화하고, 금융 및 산업 부문에 대한 규제를 없앴으며, 국제 무역과 투자를 자유화하는 한편 소득세를 인하하고 복지 지출을 줄였다. 이 정책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이런 조처들 때문에 사회가 더 불평등해지는 것과 같은 단기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더 역동적이고 부유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이 가져온 결과는 그들이 약속한 것과 정반대였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유 시장 정책은 금융 위기 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 성장이 둔화되고 불평등과 불안정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부자 나라들에서는 막대한 신용 확대 조치로 이 문제를 덮어 왔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임금 수준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노동 시간은 늘어났다는 사실을 신용 확대에 힘입은 소비 붐으로 눈가림해 온 것이다.(···)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 국가들의 생활수준은 지난 30여년 동안 전혀 향상되지 않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1인당 성장률은 3분의 2가 떨어졌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국과 인도처럼 비록 불평등은 심화되었지만 급속한 성장을 이룬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부분적인 자유화만을 허용하면서 본격적인 자유 시장 정책은 도입하기를 거부한 곳들이다.
결국 자유 시장주의자들, 혹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온 이야기는 잘해야 부분적으로만 맞고, 최악의 경우에는 완전히 틀렸다는 말이 된다. 11-14쪽. (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자유 시장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시장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각종 규제에 반대하는 소리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Thing 1 참조). 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경제의 역동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정부에 대해 널리 퍼진 불신이 근거가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Thing 12, 21 참조). 우리가 탈산업화된 지식 경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일부 정부들이 추진해 온 국가 산업의 쇠퇴에 무관심하거나 암묵적으로 환영해온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Thing 9, 17 참조). 트리클다운 이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부자들에 대한 과도한 세금 감면 정책의 정체를 직시하게 되어서, 지금까지 들어 온 것처럼 이런 감세 정책이 우리 모두를 더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드는 정책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Thing 13, 20 참조).
세계 경제가 겪어 온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저항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도 아니다. 최고 경영진과 은행가들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의 임금은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 시간은 계속 늘어난 현상은 어떤 신성불가침한 시장의 법칙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Thing 13, 14 참조). 우리가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 경쟁에 휘말려 일자리를 걱정하게 된 것이 끊임없는 교통 통신의 진보 때문만은 아니다(Thing 4, 6 참조). 지난 30년 사이 금융 부분이 실물 경제와 점점 더 유리되고, 급기야는 오늘날의 경제적 재앙을 불러오게 된 것은 결코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Thing 18, 22 참조). 열대 기후, 불리한 지리 조건, 경제 발전에 맞지 않는 문화 등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구조적인 요인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이 가난한 것이 아니다(Thing 7, 11 참조). 15-16쪽.
경제학의 95퍼센트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나머지 5퍼센트도 아주 전문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거기에 숨은 근본 논리는 쉬운 말로 설명 가능하다. 17쪽.
Thing 0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개입하여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하면 자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게 된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윤이 높은 일을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투자하고 기술 혁신을 할 동기를 잃는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율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를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19-20쪽.
시장의 경계가 모호하며 객관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자유 시장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의 올바른 경계를 과학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연구하는 대상의 경계를 과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과학적 연구라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새로운 규제에 대한 반대는 일부에서 아무리 현상태가 부당하다고 지적해도 그대로 고수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기존의 규제를 철폐하자는 주장은 시장 영역을 확대하자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돈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30-31쪽.
Thing 0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고정된 보수를 받는 종업원, 정해진 납품 가격을 받는 납품 업체, 약정된 대출 이자를 받는 은행 같은 다른 이해 당사자들과 달리 주주들은 고정 수입을 받지 못한다. 주주들의 수입은 기업의 실적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주주들은 투자 기업의 실적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부담하지 않는 리스크를 짊어지다 보니 주주들에게는 기업 실적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동기가 강할 수밖에 없다. 주주들을 위한 경영을 하면 기업 이윤은 극대화된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를 극대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주주들이 법적으로 기업의 주인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기업의 이해 당사자 중에서 가장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장기 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보유 주식을 다 팔 경우 해당 기업이 위기에 빠질 정도로 지분이 많은 대주주 외에는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주주들, 특히 소액 주주들이 장기 투자를 줄여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 이윤에서 주주에 대한 배당을 극대화하는 단기 수익 극대화 기업 전략을 선호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이렇게 되면 재투자에 필요한 유보 이윤이 줄어들게 되므로 해당 기업의 장기 전망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주주들을 위한 기업 경영이 결국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GM이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누리던 절대 우위를 잃어버리고 끝내 파산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GM은 주주 가치 극대화의 선봉에 서서 끊임없이 다운사이징을 추진하고 투자를 기피했다.(···) 이런 단기 전략 위주의 GM식 경영이 가진 약점은 최소한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가시적으로 드러났으나 GM은 2009년에 파산할 때까지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GM 자체는 허물어지고 있었으니 경영인과 주주들은 행복했기 때문이다.
부동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는 국민 경제와 기업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잭 웰치가 최근 고백했듯이 주주 가치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이다. 45-46쪽.
Thing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 경제에서는 생산성이 높으면 그만큼 보수를 많이 받는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스웨덴 사람이 인도 사람에 비해 임금을 50배쯤 더 받고 있는 현실을 동정심 넘치는 진보주의자라면 용납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이는 모두 생산성의 차이를 반영한 결과이다.(···) 공평하고 효율적인 보상은 자유로운 노동 시장에서만 가능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의 임금 격차는 개인의 생산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각 정부의 이민 정책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라 간의 이주가 자유롭다면 잘사는 나라의 일자리는 대부분 못하는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임금이라는 것은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은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의 부자들은 부자 나라의 부자들에 비해 경쟁력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자 나라의 부자들이 개인적으로 특별히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들의 높은 생산성은 단지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개인의 가치에 맞는 임금을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화를 깨뜨려야만 한다. 47-48쪽.
한 개인이 받는 임금은 그의 가치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부자 나라든 가난한 나라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임금은 이민 제한 정책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이민 노동자들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부자 나라의 일부 시민들, 따라서 자신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 그들이 일하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 덕에 그만큼의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개인의 뛰어난 능력이나 근면성만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하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타당하고 공평한 임금을 받게 될 것이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 신화에서 벗어나 시장의 정치성과 개인 생산성의 집단적 성격을 이해해야만 더 공평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의 재능과 노력뿐 아니라 역사적 유산과 축적된 집단적 노력까지 적절히 고려해서 개인의 노동에 대한 보상이 행해지는 사회 말이다. 56쪽.
Thing 0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 기술 혁명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통신 기술 혁명은 물리적 ‘거리의 파괴’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국경 없는 세계’가 출현하면서 국가의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부의 역할에 대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 타당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바로 이와 같은 기술 혁명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나 기업, 그리고 개인도 그에 상응하는 속도로 변화하지 않으면 존망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제 개인이나 기업 혹은 국가는 과거보다 훨씬 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시장 자유화가 필요하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전자 통신 기술상의 발전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후반의 전보만큼 혁명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인터넷 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만큼 크지 않았다. 가전제품은 집안일에 들이는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 줌으로써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했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은 거의 사라지게 만들었다.(···) 옛것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새것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국가의 경제 정책이나 기업의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잘못된 경정을 내리게 된다. 57-58쪽.
이런 왜곡된 시각이 단지 개개인의 견해에 그친다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귀중한 자원이 잘못 쓰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부 선진국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 통신 기술 혁명에 마음이 팔려 이제는 ‘구닥다리’ 제조업은 필요 없고 아이디어만 있으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 그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탈산업화 사회’의 시대가 왔다고 철석같이 믿고 제조업을 홀대하여 자국 경제를 약화시켰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선진국 사람들이 인터넷에 매료되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정보 격차(digital divide)가 국제 문제화되고, 이에 따라 많은 기업이나 자선단체, 개인들이 개발도상국에 컴퓨터와 인터넷 설비를 갖추라고 많은 돈을 기부한다는 사실이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한 대씩 마련해 주고, 시골 마을마다 인터넷 센터를 세워 주는 것이 도움은 될 터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우물을 파 주고, 전기를 넣어 주며, 세탁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비록 고리타분해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는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66-67쪽.
사실 100년 전의 세계는 1960년부터 1980년까지에 비해 통신과 운송 부문에서의 기술은 훨씬 뒤떨어졌으나 오히려 세계화는 월등히 진전된 상태였다. 1960년부터 1980년까지는 정부들, 특히 힘센 나라의 정부들이 자본, 노동, 상품이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것에 엄격하게 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화의 정도(혹은 각국의 개방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지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기술 혁명에 사로잡혀 시각이 왜곡될 경우에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결국 잘못된 정책을 펴게 되는 것이다. 68쪽.
Thing 0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애덤 스미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들이 관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오직 자기 자신 아니면 기껏해야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아울러서 사회적 조화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한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이 이타적 내지는 자기희생적으로 행동한다는 전제하에 경제 체제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지속될 수 있는 경제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 즉 사람들이 항상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이기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본성도 아니고 많은 경우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도 아니다. 사실 세상이 경제학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이기심 가득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남을 속이고, 나를 속인 사람을 잡아내고, 잡은 사람을 벌주는 데 온 시간을 써야 할 테니 말이다.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는 이유는 인간이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믿듯이 전적으로 이기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 제도는 사람들이 이기심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은 하되 인간의 다른 본성들을 모두 활용하고 사람들이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제도일 것이다. 결국 최악의 행동을 기대하면 최악의 행동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69-70쪽.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기적인 존재라면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테고, 결국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보상이나 제재를 하려 들지 않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도덕적 행위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정치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이기적이고 무도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79쪽.
Thing 06 거시 경제의 안정은 세계 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은 경제 부문 공공의 적 1호였다. 많은 나라가 재앙에 가까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었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 세상은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정부 예산 적자를 더 엄격히 다스리고, 중앙은행을 독립시켜 인플레이션 억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나라들이 많아지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경제 안정이 장기 투자와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플레이션이라는 맹수를 길들인 것은 장기 번영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을 길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세계 경제는 상당히 더 불안해졌다. 지난 30년 사이에 물가 변동을 잡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우리는 같은 기간 동안 전 세계 여러 나라가 겪어 온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못 본 척했다. 그 사이 수많은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과도한 개인 채무, 파산, 실업 등으로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던 2008년 금융 위기도 그 한 예이다.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 고용이나 경제 성장 같은 중요한 문제에 충분히 신경 쓰지 못했다.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졌다. 물가 안정이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고들 주장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에 고삐를 매었음에도 성장률은 미미했다. 바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성장을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81-82쪽.
문제는 물가 안정이 경제 안정도를 측정하는 여러 지표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물가 안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제 안정의 지표가 아니다. 사람들의 삶을 흔드는 가장 큰 사건은 일자리를 잃거나, 하는 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혹은 금융 위기가 몰아닥쳐 집을 압류당하는 것들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물가가 오르는 것은 위 사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히 말해 보자. 물가상승률이 2퍼센트일 때와 4퍼센트일 때의 차이를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가 안정(즉 낮은 인플레이션)과 잦은 금융 위기, 고용 불안 증대 등 물가로 표시되지 않는 경제 불안 요소들이 공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현상들은 모두 동일한 자유 시장 정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90-91쪽.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금융 자산의 수익은 대부분 명목상 고정되어 있어 물가가 오르면 상대적으로 수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금융 자산은 물적, 인적 자산보다 더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는 성질 덕분에 다른 자산에 비해 더 높은 이윤을 낼 수 있다. 금융 자산은 바로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 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금융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고용, 해고 절차를 쉽게 하면 기업들의 구조 조정이 더 쉬워져서 당장 보기 좋은 대차대조표를 만들기 용이해지므로 기업 매매가 원활해져 높은 금융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92쪽.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하는 정책들이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증대시켰다 하더라도 정책 주창자들이 장담했던 대로 투자 증가와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을 가져오기만 했다면 그 정당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및 1970년대와 비교해 볼 때 1980년대 이후 인플레이션이 낮아진 상황에서 세계 경제는 훨씬 더딘 속도로 성장했고, 이는 많은 나라에서 투자가 감소한 데에서 그 주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정당히 낮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이 낮아져 경제가 안정되면 투자를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인플레이션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유도하려는 시도는 투자와 성장을 위축시켰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낮아졌어도 우리는 대부분 진정한 경제적 안정을 맛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주요 목표로 하는 자유 시장 정책 패키지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과 노동 시장의 자유화는 금융 불안과 고용 불안정을 초래해서 불안정한 세상을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이 정책이 약속했던 이른바 ‘성장 촉진’마저 실현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박관념은 이제 잊어버리자. 인플레이션은 장기적 안정, 경제 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 금융 자산 보유자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 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92-93쪽.
Thing 07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개발도상국들은 국가 개인 정책을 써서 경제 발전을 추진했고, 그 중에는 노골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까지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은 보호무역, 외국인 직접 투자 금지, 산업 보조금, 심지어 국영 은행, 국영 기업 등의 인위적인 수단까지 동원해서 철강이나 자동차 산업과 같은 자국의 능력을 벗어나는 산업들을 육성하고자 노력했다. 식민 통치를 했던 나라들이 자유 시장 정책을 신봉하는 자본주의 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행태를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잘해야 경제 침체, 잘못하면 경제적 재앙이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정신을 차리고 자유 시장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일본을 제외한(한국도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선진국들은 자유 시장 정책, 특히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자유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이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취한 개발도상국일수록 더 좋은 성적을 올렸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정반대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실적은 국가 주도의 발전을 꾀하던 시절이 그 뒤를 이어 시장 지향적인 개혁을 추진할 때보다 훨씬 나았다. 국가가 개입해서 그야말로 엄청난 실패로 끝난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시장 지향적 개혁 기간보다 이른바 ‘어두운 과거’ 시절에 훨씬 더 빠른 성장과 비교적 고른 분배를 이루었고 금융 위기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자유 시장 정책 덕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가깝다.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이라는 논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여 현재 잘살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보호 무역과 정부 보조 등을 통해 오늘의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보호 무역주의, 정부 보조금 지원 등의 정책들이야말로 요즘 부자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하면 안 된다고 설파하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자유 시장 정책을 써서 부자가 도니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94-95쪽.
Thing 08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초국적 기업들이다. 초국적 기업이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국의 국경을 벗어나 해외로 진출한 기업들이다. 본사는 여전히 회사가 설립된 나라에 있을지 모르지만 생산과 연구 시설은 대부분 해외에 있고, 최고 경영진을 포함해서 많은 직원을 외국인으로 채용한다. 이처럼 자본에 국적이 없어진 시대에 외국 자본에 대해 민족주의적 정책을 쓰면 잘해 봐야 효과가 없고, 최악의 경우에는 역효과가 날 것이다. 외국 자본을 차별하면 그 나라에는 초국적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게 된다. 자국 기업을 육성해서 자국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의도일지는 모르나 이런 정책은 가장 효율적인 기업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결국 국가 경제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자본이 ‘초국화’되어 가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들은 국적이 없는 기업이 되기보다는 사실상 해외 지사를 둔 ‘단일 국적 기업’으로 남아 있다. 핵심 기술 개발이나 전략 설정 등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대부분 본국에서 이루어지고 최고 경영진도 일반적으로 본국 국적을 지닌 사람들로 채워진다. 공장 문을 닫거나 일자리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다양한 정치적 이유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경제적 이유에서 대개 본국의 공장과 일자리를 가장 나중에 없앤다. 이 말은 초국적 기업이 가진 혜택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기업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국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국적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108-109쪽.
서계화론에도 불구하고 연구개발, 전략 수립과 같은 수준 높은 기업 활동의 기지를 어디에 두는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직도 기업의 국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 기업의 국적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투자자가 해당 산업에 어떤 경력이 있는지, 피인수 기업에 대한 장기 계획은 무엇인지 등 다른 경력이 있는지, 피인수 기업에 대한 장기 계획은 무엇인지 등 다른 요인들도 고려해야 한다. 외국 자본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자본에는 더 이상 국적이 없다는 신화에 근거해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다. 123쪽.
Thing 0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세계 경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부자 나라에서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지만 최근까지 자본주의의 동력이었던 제조업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늘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과 함께 금융 산업이나 경영 컨설팅과 같은 생산성 높은 지식 기반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제조업은 모든 선진국에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전혀 우려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이 점점 커지는 것을 고려하면 개발도상국들도 사양길에 접어든 제조업 산업 단계는 아예 건너뛰고 서비스에 기초한 탈산업형 경제 구조로 바로 진입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수도 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대대수가 이제는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조업 부문이 덜 중요해졌다는 의미에서 탈산업화 시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총생산에서 제조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은 대부분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가격이 서비스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지 제조업 생산량이 줄어서가 아니다. 이렇게 제조업 생산품의 가격이 낮아진 것은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투입 단위당 산출량)이 서비스업 분야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탈산업화 현상이라는 것이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부문이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경제 전반에 걸친 생산성 향상과 국제수지 면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무시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개발도상국들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뛰고 탈산업화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허상에 불과하다. 서비스 산업은 생산성이 증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힘들다. 또 서비스 상품은 교역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서비스 산업에 기초한 경제는 수출 능력이 떨어진다. 수출에서 얻는 수입이 적으면 해외에서 선진 기술을 사들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고 결국 경제 성장의 속도도 느려진다. 124-125쪽.
부자 나라들의 국민총생산에서 제조업 비중이 줄어든 주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조업 제품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탈산업화 현상은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생산성 향상에 따라 제조업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부자나라의 국민들은 고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탈산업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직 ‘탈산업 사회’를 공언할 정도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134쪽.
개발도상국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뛴 다음 서비스 산업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서비스는 생산성이 느리게 성장한다. 그리고 생산성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첨단 지식 기반 서비스 산업들은 강력한 제조업 없이 발전할 수 없다. 더욱이 서비스는 국제 교역이 어렵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이 서비스 산업에 특화하는 경우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에 직면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경제를 고도화시킬 능력 또한 떨어지게 된다. 141쪽.
Thing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경제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자랑한다. 시장 환율을 적용할 경우 미국보다 1인당 소득이 더 높은 나라가 몇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달러가 되었든 유로가 되었든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다른 부자 나라에 비해 미국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도시국가 룩셈부르크를 제외하고 미국보다 더 생활수준이 높은 나라는 없다. 이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자유 시장 경제 시스템을 가장 비슷하게 구현하고 있어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따라 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평균 소득으로 다져 볼 때, 미국인들은 국셈부르크를 제외한 다른 선진국 국민들에 비해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가장 높다. 그러나 소득 분배가 극도로 불균등한 미국과 상대적으로 소득 분배가 고른 다른 선진국을 이렇게 평균 소득만으로 비교해서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 불균등한 소득 분배 현상은 미국의 건강 지표가 좋지 않고 범죄율이 높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국이 다른 선진국보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이유는 이민이 많고 고용 조건이 열악한 덕에 상대적으로 서비스가 싸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해 일을 훨씬 더 오래 한다. 같은 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미국인들보다 유럽인들의 구매력이 더 높아진다. 미국인들처럼 여가 시간보다는 물건을 많이 갖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유럽인들처럼 물건을 더 살 돈보다는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미국이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단연 더 높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43-143쪽.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유럽에 몇 나라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할 때 노르웨이를 필두로 룩셈부르크, 스위스, 덴마크,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스웨덴 순으로 7개 나라가 미국보다 1인당 국민 소득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난다.(···) 미국에 실제로 가 보면 스위스나 노르웨이보다 훨씬 잘 살던데 무슨 소리냐 하고 생각할 듯도 하다. 이런 인상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불평등하다는 데에 있다. 어느 나라나 관광을 할 때에는 빈민가를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 여러 나라보다 미국에 빈민가가 훨씬 더 많은데도 그곳을 뺀 나머지 부분만 보고 미국이 더 잘산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145-146쪽.
미국인 노동자라 하더라도 직업 안정성이 낮고 복지 수당 등 사회적 지원이 약하기 때문에 비슷한 소득 수준의 유럽 노동자들에 비해 기댈 데가 별로 없다. 따라서 미국 노동자들, 특히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지 않은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미국 노동자들은 유럽에 비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조건을 참아 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에서 택시를 타거나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것이 다른 부자 나라에 비해 훨씬 싼 것이다.(···) 미국 평균 소득의 구매력이 높은 것은 많은 수의 미국 시민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조건을 견뎌 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150쪽.
미국은 소득 불균형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을 짐작하는 데 평균 소득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이 사실은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훨씬 월등한 미국의 보건 및 범죄 관련 지표에 잘 드러난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인들의 구매력은 또 다른 미국인들, 특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미국인들의 빈곤과 불안정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또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비해 노동 시간이 상당히 더 길다. 같은 시간을 일해서 생기는 돈은 구매력을 기준으로 해도 유럽 여러 나라에 뒤진다. 152-153쪽.
Thing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다. 나쁜 기후는 심각한 열대병 문제를 낳고, 지리적 조건도 열악해서 항구도 없는 내륙 국가가 많으며, 이웃 나라들은 시장 규모가 작아 수출 기회가 적은 데다 잦은 무력 충돌 사태는 쉽게 이웃 나라에까지 번지곤 한다. 천연자원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게으르고 부정부패와 갈등의 소지가 높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러 민족으로 갈라져 있어서 통치하기가 어렵고, 민족 간 갈등은 쉽게 무력 충돌로 번진다. 투자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대로 갖춰진 제도가 없고, 좋은 문화도 뿌리를 내리지 못해 사람들은 근면, 저축, 협동이라는 것에는 관심도 없다. 바로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에 아프리카는 1980년대 이후 상당한 강도의 시장 자유화 조치를 취했음에도 세계 여타 지역과는 달리 성장을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해외 원조 없이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늘 정체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있었고 경우에 따라 더 심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아프리카는 상당한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는다고 하는 구조적 요인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만 이런 장애 요인들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체를 불러온 진짜 요인은 이 지역 국가들이 추진하도록 강요받았던 자유 시장 경제 정책이다. 역사나 지리적 요건과는 달리 정책은 바꿀 수 있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154-155쪽.
Thing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부는 현명한 사업 결정을 내리거나 산업 정책을 내리거나 산업 정책을 통해 ‘유망주를 고르는’데 필요한 정보와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은 이윤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 자기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에 재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 특히 어떤 정부가 시장 논리에 어긋나는 정책을 채택하고 그 나라가 가진 자원과 능력을 넘어서는 산업 부문을 장려하려 한다면 재난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뿐이다. 개발도상국들에 산재한 ‘흰 코끼리 프로젝트들’1)이 그 산 증거들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정부는 유망주를 고를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한 선택이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사례도 많다. 편견 없이 둘러보면 전 세계에 정부가 유망주를 제대로 고른 사례들이 널려 있다. 기업 활동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은 기업들이 직접 내리는 결정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더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항상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 너무 많은 정보에 파묻혀 있으면 오히려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정부는 필요하면 더 나은 정보를 획득하여 의사 결정의 질을 높일 수도 있다. 게다가 개별 기업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국민 경제 전체로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들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의 움직임에 역행하는 유망주를 골랐다 하더라도 특히 그 결정이 민간 부문과 긴밀한 (그러나 지나치게 긴밀하지는 않은) 협력하에 진행되었다면 국민 경제를 향상시키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170-171쪽.
문제는 정부가 유망주를 선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그럴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의 승률을 높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치적 의지가 충분하면 정부의 승률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 유망주 선택에 성공률이 높은 나라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타이완의 기적은 국민당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한강의기적을 일군 한국 정부도 1950년대에는 미국의 대외원조기관 유에스에이드(USAID)로부터 ‘밑 빠진 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제 관리 능력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망주를 선택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것으로 유명했던 프랑스 정부도 2차 대전 후에는 유망주 선별 부문 유럽 챔피언 자리에 등극했다.
(···) 민간 기업의 유망주 선택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는, 혹은 정부와 민간의 협력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경제 발전의 거대한 가능성을 모두 놓치고 말 것이다. 182-183쪽.
Thing 13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부의 분배에 앞서 부를 창출해야만 한다. 싫건 좋건 투자를 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것은 부자들이다. 부자들은 시장의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런데 과거 많은 나라에서 계층 간의 질시를 이용하고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펼치면서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부의 창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심하게 들릴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도 나아지지 않는다.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 조각을 주면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파이 조각이 작아질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들에게 돌아가는 파이의 절대적인 크기가 커질 것이다. 파이 전체의 크기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트리클다운 경제학으로 알려진 이 주장은 첫 번째 장애물에서부터 넘어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성장을 촉진하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 그리고 ‘성장 감소를 부르는 빈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의미를 양분해서 말을 하는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성장을 가속화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 조각을 주면 결국에는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트리클다운 이론의 첫 번째 단계는 설득력이 없다. 또 두 번째 단계, 즉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든다는 이른바 트리클다운 현상 역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트리클다운 현상이 조금씩 일어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시장에 맡겨 두면 그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184-185쪽.
부자들에 유리한 소득 분배가 투자와 성장을 가속화시킨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이런 현상이 있었던 적도 별로 없다. 미국과 복지 정책을 잘 갖춘 다른 선진국들과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설령 성장률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부가 아래로 분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단순히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더 많은 부가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파급되게 하려면 국가는 각종 정책 수단(예를 들어 부자와 기업의 감세를 허용하는 대신 투자를 조건으로 제시)을 통해 부자들로 하여금 더 많이 투자하도록 해서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하며, 복지 국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전 사회 구성원들과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96-197쪽.
Thing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돈을 훨씬 많이 번다. 특히 미국의 최고 경영진들이 받는 보수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당치도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장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 일을 할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 수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보수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관행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시기심이나 억하심정을 품고 억지로 막아서는 안 된다. 결국은 역효과만 날 뿐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 높다. 우선 전임자들에 비해서 너무 높다. 동시대 노동자들의 보수 평균과 비교해서 볼 때 오늘날 미국의 CEO들은 1960년대 CEO들에 비해 10배를 더 받는다. 상대적으로 1960년대 CEO들의 경영 성적이 훨씬 더 좋았음에도 말이다.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는 다른 부자 나라 경영자들과 비교해도 너무 높다. (···) 비슷한 규모와 실적을 올리는 다른 나라 회사 경영진들에 비해 미국 경영자들은 절대 기준으로 많게는 20배나 더 받는다. 이들은 또 보수만 지나치게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경영 부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로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가 완전히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영자 계층이 지닌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힘은 자신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시장 자체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198-199쪽.
노동자들은 계속되는 임금 하락 위협, 간단해진 해고 절차와 정규직을 대체하는 임시직의 증가, 그리고 지속적인 다운사이징 등으로 압박을 받는 반면에 경영자들은 이렇게 해서 창출한 추가 이윤을 주주들에게 분배해서 그들이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를 문제 삼지 않도록 한다. 주주들의 입을 막기 위해 배당금을 극대화하려면 투자가 위축되고, 결국 기업의 장기적 생산 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경영진의 과도한 보수까지 보태면 영미 기업들은 국제 경쟁력을 잃게 되고, 결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만 없어지고 만다. 2008년처럼 일이 잘 못되는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기업을 회생시키는 데 납세자들의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지만 경영진은 그야말로 거의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사고 현장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
미국, 그리고 미국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영국의 경영자 계층이 시장을 조종하고 자신의 결정이 부른 부정적인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강해진 마당에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수 체계가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또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208쪽.
Thing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가 정신은 역동적인 경제의 핵심이다.(···) 프랑스부터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활력을 잃은 나라들을 살펴보면 기업가 정신의 결여가 그 원인의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개인들에게 기업가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과 현대식 기업 같은 발달된 사회 조직이 없어서이다.(···) 20세기에는 특히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려면 공동체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집단적 조직력의 부족이 개인의 기업가 정신의 부족 현상보다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더 큰 장애 요인인 것이다. 209-210쪽.
토머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전설과 오스트리아 출신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조지프 슘페터의 선구적 연구 결과 등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기업가 정신을 너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업가 정신이란 탁월한 비전과 굳은 결의를 지닌 영웅들에게만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처럼 특별한 인물들도 수없이 많은 제도적, 조직적 지원을 받지 않았으면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또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험해 볼 수 있도록 해 준 과학 인프라, 크고 복잡한 조직을 갖춘 기업을 설립한 회사에서 고용한 엔지니어, 경영진, 노동자 등을 양산한 교육 시스템, 회사를 확장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던 금융 시스템, 새로 개발한 기술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특허법과 저작권법 등이 모두 그 예이다.
여기에 더해 부자 나라에서는 기업 간의 협력이 가난한 나라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기업 차원에서도 부자 나라에서는 기업가 정신이 집단적으로 발휘된다. 이제는 더 이상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이 경영하는 기업은 거의 없고 전문 경영인들이 회사 경영을 맡고 있다. 219-221쪽.
한 나라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노력이나 재능보다 공동체 차원에서 효율적인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영웅적인 기업가들이 등장하는 신화를 거부하고 집단 차원의 공동체적 기업가 정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조직과 제도를 마련하도록 돕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222쪽.
Thing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장에 관여하는 것을 일체 삼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시장에 참가하는 주체는 모두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및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기업은 언제나 자기에게 무엇이 가장 이로운지를 잘 알고, 자기와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외부자, 특히 정부가 이들의 행동을 제한하려 하면 최상의 결과가 나올 수 없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 ‘제한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극도로 복잡한 현대 금융 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 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223-224쪽.
금융 경제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은행장, 날고 긴다는 펀드 매니저, 명문 대학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유명 인사들까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하는 경제학 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우리 인간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될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230쪽.
일부러 제한적인 규칙을 만들어 우리의 선택을 의도적으로 한정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환경을 단순화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으로는 세상의 복잡성에 대처해 나갈 수 없다. 우리에게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정부가 당사자인 경제 주체들보다 관련 상황을 반드시 더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규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정신적 능력에 대한 겸허한 인정인 것이다. 236쪽.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교육을 잘 받은 노동력은 경제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육 수준이 높기로 유명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경제적 성공과 세계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지는 지역 중의 하나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 침체를 비교해 보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지식이 부의 주요 원천이 되는 이른바 ‘지식 경제’가 출현하면서 교육, 특히 고등 교육은 번영으로 가는 열쇠가 되었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높은 교육 수준이 국가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사람들이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또 지식 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이 경제 발전에 필수 요소가 되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우선 지식 경제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역사적으로 지식은 언제나 부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산업화와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선진국의 대다수 일자리에서 꼭 필요로 하는 지식 요건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지식 경제에 더 중요하다는 고등 교육도 그것이 경제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237-238쪽.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런 조직화의 결과는 보잉이나 폭스바겐과 같은 거대 기업일 수도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많은 세계적 수준이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일 수도 있다. 이런 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투자와 리스크 감수를 장려하는 일련의 제도가 필요하다. 유치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교역 정책,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 시스템, 제대로 된 파산법으로 자본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좋은 복지 정책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제도, 연구개발과 노동자 훈련에 관한 공공 보조금과 규제 정책 등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의는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생산적인 기업과 그런 기업을 지원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250-251쪽.
Thing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은 자본주의의 심장이다. 기업이야말로 제품을 생산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활발한 기업 활동이 없으면 경제도 활력을 잃고 만다. 따라서 기업에 좋은 것은 나라 경제에도 좋다. 세계화와 함께 국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기업의 설립과 경영을 어렵게 만들거나 기업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드는 나라는 투자와 일자리 창출의 기회를 잃게 되고, 결국은 뒤떨어지고 만다. 정부는 기업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또 각 개별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 교육 규정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 규제의 내용이지 양이 아니다. 252-253쪽.
Thing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경제 계획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복잡한 현대 경제 시스템에 계획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비중앙 집중적 의사 결정만이 언제나 수익 창출의 기회를 노리는 개인과 기업에 기반을 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복잡한 현대 경제를 지탱해 줄 수 있다.(···) 계획은 적을 수록 좋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도 계획되는 부분이 많다.(···) 모든 자본주의 정부는 연구개발과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자본주의 정부가 국영 기업의 사업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계획한다. 부문별 산업 정책을 통해 미래의 산업 구조를 계획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유도 계획(indicative planning)을 통해 국민 경제의 미래 모습까지 설계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국경을 넘나들 정도로 큰 규모의 위계질서를 갖춘 대기업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기업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입각해 경제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계획의 수립 여부가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계획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263-264쪽.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해 분노한다. 하지만 평등도 평등 나름이다. 노력과 성취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보상할 경우 재능 있고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성취동기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기회의 균등은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훌륭한 성과를 올린 사람은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가 배가 고파서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면 선천적으로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그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집에서는 생계비 지원을 받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학교에서는 무료 급식을 통해 밥을 굶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기회의 균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부모가 아이를 굶기지 않을 정도로는 돈을 벌 수 있어야(결과의 균등) 그 아이도 같은 조건에서 다른 아이들과 경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76-277쪽.
지나치게 결과를 균등하게 하는 것은 해롭지만, 이 ‘지나치다’는 것의 한계를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는 논의를 거쳐야 한다.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 등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288쪽.
Thing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큰 정부는 경제에 좋지 않다. 복지 국가는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기 위한 조정 비용을 부자들에게 부과함으로써 보다 편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장의 현실에 적응할 필요를 못 느끼고, 따라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맞춰 직업 및 직무 형태의 전환하는 것도 늦어진다.(···) 생기 넘치는 미국 경제와 비대해진 복지 정책에 눌려 활력을 잃은 유럽 경제를 비교해 보라.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잘 설계된 복지 정책이 있는 나라 국민들은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에 오히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보호 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산업이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해도 실업 수당을 받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에 반해 미국 사람들은 한번 일자리를 잃으면 생활이 심하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복지 정책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들이 이른바 ‘미국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1990년 이후에도 미국과 비슷한 성장을 하거나 심지어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289-290쪽.
미국의 취약한 복지 제도는 이 나라가 전반적으로 정부 개입에 훨씬 더 긍정적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오히려 심한 보호 무역주의 정책을 취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유럽에서는 몸담고 있던 산업이 쇠퇴해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 큰 타격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날 정도의 일은 아니다. 의료 혜택을 변함없이 받을 수 있고, 국가 임대 주택 혹은 주거 보조금도 유지될 뿐 아니라 많게는 실직 전 월급의 80퍼센트까지 받으면서 정부의 지원으로 직업 재교육을 받고, 구직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정부에 보호 무역을 도입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라도 한번 잡은 일자리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실업 보험의 자격 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그나마 유럽에 비해 지급 기간도 짧다. 직업 재교육과 재취업 과정에서도 정부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 없다.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실직을 하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집마저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임대 주택이나 임대료 보조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원을 포함한 산업 구조 조정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은 유럽보다 미국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미국 노동자들은 조직적 저항을 하기 어렵지만, 조직적 저항이 가능한 노동조합 소속의 노동자들이라면 현재의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295-296쪽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1990년 이후 OECD 핵심 국가 중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 두 군데가 바로 핀란드(2.6퍼센트)와 노르웨이(2.5퍼센트)라는 것이다. 두 나라 다 복지 정책이 잘 갖춰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0년에서 2008년까지 2000년대 자료만 살펴보면 스웨덴의 성장률(2.4퍼센트)과 핀란드의 성장률(2.8퍼센트)은 미국의 성장률(1.8퍼센트)보다 훨씬 높다. 자유 시장주의자들의 말대로 복지 제도가 노동자의 노동 윤리와 부의 창출 동기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복지 제도가 항상 좋기만 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복지 제도도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잠재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잘 설계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종류의 복지 제도는 사람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일 수 있는 여유를 줘서 산업 구조 조정이 쉬워지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실업이 자기 인생을 망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큰 정부가 사람들을 변화에 더 개방적으로 만들고, 그에 따라 경제도 더 역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299-300쪽.
Thing 22 금융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금융 시장의 급속한 발달 덕에 우리는 자원을 신속하게 분배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유로운 금융 시장을 보유한 경제는 변화하는 기회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고, 이는 결국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금융 위기가 있었고, 그 위기의 규모가 좀 컸다고 해서 금융 시장을 규제하는 쪽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효율적인 금융 시장은 한 나라 번영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현대 금융 시장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효율적이라는 데에 있다. 최근의 금융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수없이 많은 새 금융 상품들 덕에 금융 부문은 금융 자산 보유자들을 위한 단기 이윤 창출에는 더 효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보았듯이 이 새로운 금융 자산들은 금융 시스템 뿐 아니라 경제 전반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금융 자산의 유동성을 이용해 자산 보유자들은 작은 변화에도 빨리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실물 경제 부문의 기업들은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기다려 줄 줄 아는’ 자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 사이에 존재하는 속도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 즉 금융 시장의 효율성을 의도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301-302쪽.
아이슬란드 이야기가 매우 특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금융 부문의 민영화, 자유화 및 개방으로 경제 성장 동력을 육성하려 한 나라는 아이슬란드만이 아니다. 아일랜드도 아이슬란드와 똑같은 전략으로 또 하나의 ‘금융 중심지’로 발전을 모색했다. 이 나라의 금융 자산 역시 2007년에는 국내총생산의 900퍼센트에 달했고, 그 결과 아이슬란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역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 IMF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아일랜드는 2009년 7.5퍼센트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라트비아도 금융 중심지 발전 노선을 추진해온 국가 중 하나인데 위의 두 나라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IMF의 추정에 따르면, 금융 주도의 성장이 붕괴하면서 라트비아의 2009년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16퍼센트에 달했다. 자칭 중동의 금융 중심지인 두바이는 유럽의 다른 경쟁국들보다 좀 더 오래 버티는 듯싶었지만, 결국 2009년 11월 이 나라의 최대 국영기업 집단인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을 선언하면서 백기를 들고 말았다. 306쪽.
최근 들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이 나라들은 세계화 시대의 선두 주자가 되고 싶었던 다른 국가들에게 새로운 ‘금융 주도 비즈니스 모델’의 빛나는 사례로 찬탄받았다.(···) 더구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라트비아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도 금융 주도형 경제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나라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제조업에서 강세를 보여 왔던 한국도, 비록 벤치마킹하고자 했던 아일랜드와 두바이가 붕괴하고 나서 좀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북아시아의 금융 중심지가 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306-307쪽.
금융 자산은 다른 곳으로 옮겨 재배치되는 데 몇 초, 길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엄청난 유동성의 차이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빚어지는데, 이는 금융 자본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impatient)’ 자본으로 단기간에 이익을 챙기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진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경제가 불안해진다. 우리가 최근 목격한 바대로 유동성 높은 금융 자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것도 대단히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적과 산업부문을 가리지 않고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부작용이다. 금융의 높은 유동성은 생산성 상승을 약화시킨다. 기업(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 자본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금융 심화도’(국민총생산에 대한 금융 자산 총액의 비율)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도 경제 성장이 실질적으로 지체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재빨리 옮겨 갈 수 있는 바로 이 효율성 때문에 금융이 경제의 다른 부문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198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이 “지나치게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국제 금융 시장의 수레바퀴에 모래를 뿌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토빈은 금융 이동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금융 거래세, 이른바 토빈세(Tobin Tax)의 도입을 제안했다.(···) 토빈세만이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속도 차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 적대적 인수 합병을 어렵게 만들어 투기적 주식 투자로 얻는 이득을 줄일 수 있다. 주식을 빌려서 파는 공매도(short-selling)를 금지하거나 주식 증거금률을 인상하는 방법도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에 대해 규제를 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속도 차이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문제는 금융이 지나치게 빨리 움직여 실물 경제에서 탈선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수준의 유동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제 발전의 궁극적 원천인 (기계 설비 등) 물리적 자본과 인적 자본, 조직 혁신 등에 기업이 장기 투자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금융 시스템이라는 회로의 배선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313-315쪽.
Thing 23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정부 정책의 성공 여부는 많은 부분 그것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렸다. 다른 나라들도 간혹 그렇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의 정부 관료들은 경제학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좋은 경제 정책을 실행에 옮기려면 경제학 지식이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그런 관료들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선별적인 산업 정책 등 ‘어려운’ 정책에 손대지 말고,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는 ‘쉬운’ 자유 시장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
-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
좋은 경제 정책을 수행하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를 가장 잘 운영한 경제 관료들은 대부분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었다. ‘기적’적인 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일본, 그리고 일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한국도 경제 정책은 법대 출신들이 맡았다. 타이완과 중국에서는 공대 출신들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경제가 성공하는 데 경제학, 특히 자유 시장 경향의 경제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살펴봤듯이 지난 30여 년 동안 자유 시장 경제학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 실적이 저조해졌다. 성장률 감소, 경제 불안정성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급기야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까지 몰아온 주범이 바로 이 자유 시장 경제학인 것이다. 정책 입안에 경제학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경제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이 아닌 다른 종류의 경제학이어야 한다. 316-317쪽.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 못했지요?”(···)
과거 20여 년간 우리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세계 최고라는 금융 규제 당국자들에서부터 세계 명문 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재능 있고 젊은 투자 은행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로부터 세계 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는 소리를 되풀이해서 들어 왔다. 경제학자들이 드디어 빠른 성장과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마법의 공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장기 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한 경제 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그저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것 이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이 한 짓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를 끼쳤다. 320-323쪽.
위험한 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세상을 풍미해온 자유 시장 경제학이라는 특정 부류의 경제학일 뿐이다. 역사 전반에 걸쳐 경제를 발전시키고 더 잘 운용하는 데 도움을 준 여러 경제학파들이 존재했다.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출발한다면 2008년 가을에 세계 경제를 총체적 붕괴에서 구해 낸 것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금융 위기에 관한 고전『광기, 패닉, 붕괴(Manias, Panics, and Crashes)』의 저자 찰스 킨들버거(Charls Kindleberger), 그리고 금융 위기를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로 그 업적이 대단히 과소평가된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 등의 경제학이다. 세계 경제가 1929년 대공황을 재연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이들의 통찰을 배워 주요 금융 기관에 구제 금융을 지원하고(애초에 이런 사태를 초래한 은행가들을 아직 제대로 벌하지 못했고, 필요한 금융 개혁도 하지 못했지만), 정부 지출을 늘리고, 예금 보험을 강화하고, 실직자의 소득을 보조하는 복지 정책을 사용하고,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유동성을 금융 시장에 쏟아부은 덕분이다. 하지만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설명했듯이 세계 경제를 구출한 이 모든 대책들 중 많은 부분은 과거부터 현재에 걸쳐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한사코 반대해 왔던 정책들이다.
(···)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장기 투자와 생산 구조를 바꾸는 기술 혁신이지, 풍선을 부풀리듯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팽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고, 기술적으로 정체된 농업과 같은 산업 분야에서 보다 역동적인 산업 분야로 자원을 강제 이전하는 한편, 허시먼이 강조하던 서로 다른 부문 간의 연계 효과를 활용하는 등 기적의 성장 기간 동안 동아시아 경제 관료들이 택했던 많은 경제 정책들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경제학자들[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앨버트 허시먼 등)의 가르침에서 배워 온 것이지 자유 시장 경제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그 이전에 유럽과 북아메리카 국가들이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채택했으면 그들이 이루어 낸 것과 같은 경제 발전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버트 사이먼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경제학은 현대적 기업, 더 나아가서는 현대 경제에 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경제학은 우리 경제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는 완전히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체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신화를 깬다. 늘 합리적이지만은 않으며 다양한 행동 동기를 지닌 개인들이 모여 시장, 기업, 정부, 네트워크 등을 통해 복잡한 조직을 이루고 사는 것이 현대 경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자유 시장 경제 원칙을 가지고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간다.(···) 신자유주의 경제학파 안에서조차 자유 시장 내에서 왜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없는지에 관한 이론들이 많다. 20세기 초 케임브리지 대학의 아서 피구(Athur Pigou) 교수가 제일 처음 제창하고 후대에 와서 아마티야 센, 윌리엄 보몰,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이 발전시킨 ‘시장 실패 이론’ 혹은 ‘후생 경제학’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 ‘다른’ 경제학자들을 아예 무시하거나 심지어 가짜 예언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에 걸쳐 벌어진 경제 현상들을 보면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학보다 이들 다른 경제학자에게서 배울 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323-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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