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배신
[밑줄] 라즈 파텔(제현주/우석훈 해제),『경제학의 배신-시장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북돋음, 2011(2009).
* PartⅠ 가치가 사라진 세계
1. 치명적 결함
효율적 시장 가설의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참이라면 조사·분석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조사·분석을 한다 해도, 마술적인 힘을 가진 시장이 당신이 조사·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이미 가격에 반영해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 편의 연구가 효율적 시장 가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지적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많은 경제학적 증거가 있는데도, 세계 각국의 정부가 이 이념을 받아들였다. 38
정부는 문제가 생길 경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개입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금융 산업이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게끔 조장했고, 사태가 터지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금융가들의 도박으로 금융 시스템은 망가졌는데도, 그들이 챙긴 이익은 고스란히 그들의 주머니에 남았다. 그 이익은 사유화되었으나 위험은 사회화되었다. 그들의 부는 전 세계가 엄청난 희생을 치른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39-40
폴라니는 시장과 시장을 둘러싼 사회가 서로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시장을 신봉하는 그린스펀의 철학과 달리, 폴라니는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하려면 특수한 기능을 가진 사회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특정 물건이 경제체제 안에서 매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되도록 사회가 허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47
폴라니는 어째서 경제와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인지, 그런데도 우리가 시장과 사회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윤 지향적 시장 문화, 즉 폴라니가 말하는 ‘자기조정적(Self-regulating)’ 시장의 신화는 겉보기와 달리 사회를 통한 기능의 보완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조정적 시장이 보다 확산되려면 경제와 사회가 두 개의 구별된 영역이라는 신화가 더 널리 전파될 필요가 있다.(···)
위기의 시기에는 그 신화의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은행의 실패는 그것을 지탱할 공공 부문이 없었다면 총체적인 경제 붕괴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자기 능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는 없다. 시장은 언제나 사회에 의존해왔다.(···) 자유방임의 논리는 언제나 사회적 기반을 필요로 하고, 이 때문에 폴라니는 인간이 ‘정부와 자유시장’에 이르게 된 과정을 구분해 보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는 둘 다 ‘시장사회(market soiciety)’의 일부인 것이다. 48-49
나아가 시장사회는 자연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체제인데, 자기조정적 시장 신화는 같은 이유로 이것마저 부정하려 한다. 비록 인간은 지구 생태를 문자 그대로 종말에 이르도록 착취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 문명은 지구 생태에 의존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경제성장을 추구하면서 지구 곳곳에 멸종을 일으키는 주체로 전락했다. 경제체제가 살아 있는 지구를 유지해주는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과소평가함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경제는 많은 것을 당연히 ‘공짜’로 여기고 그 가치를 무시함으로써, 이제는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을 본질적으로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49-50
시장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면서 인류는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거대한 전환이 너무나 깊숙이 진행된 탓에, 가격을 매기거나 자유시장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놓아두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평가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한다. 자기조정적 시장 없이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자기조정적 시장의 신화에 집착한다. 50
우리는 고삐 풀린 시장이 세계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할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또 수요와 공급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외치는 문화와 정치의 함정에 빠져 있다. 이런 주장은 단순한 착각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도 왜곡시킨다.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단지 소비자로만 여기면, 그들과 자신 사이의 더 깊은 연관성을 보지 못하고 결국 삐뚤어진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된다.(···) 모두에게 먹을 것이 돌아가도록 재협상할 여지도 없고 생산에 참여할 방법도 없다. 52
시장이 없는 세계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장은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로서 모든 인류 문명에서 존재해온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은 욕구 충족을 위한 거래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한 거래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사회가 제 기능을 다하는 최상의 방식은 시장이 이윤을 추구하도록 놓아두는 것이고, 개입을 최소화할 때 시장은 가장 잘 작동한다는 생각은 진리가 아니라 순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시장이 작동하는 조건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정해진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53
역사를 돌아볼 때 그 치유책은 정부에 있는 게 아니라 시장사회 내부의 변화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폴라니가 지적한 것처럼 수많은 폭력으로 자유시장이 탄생했다. 그러나 폴라니가 지적한 다른 측면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사람들이 이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스핀햄랜드법은 탐욕스러운 인클로저로부터 고통받던 농촌의 민중이 분노를 표출했기 때문에 도입되었다.(···) 스핀햄랜드법은 폴라니가 이중운동이라고 부른 것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에선 토지와 노동을 매매할 수 있도록 바꾸기 위해서 광범위한 권리 박탈이 필요했다. 이것이 첫 번째 ‘운동’이다. 두 번째 운동은 자기조정적 시장이 할퀸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회로부터의 대응이다. 그리고 이 두 운동 모두 시장사회의 틀 안에서 일어난다.
(···) 대항운동은 사람들이 손에 쥔 정치로부터 형성되고, 이 정치와 연대를 통해 미국의 뉴딜이나 유럽의 복지국가 같은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진다. 54
2. 호모에코노미쿠스의 탄생
밀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최선의 방식으로 자원을 사용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밀의 가정을 통해 탄생한 인간상은 가정으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으려는 욕망에 의해 탄생한 호모에코노미쿠스, 바로 경제적 인간(Economic Man)이 그것이다! 58
인간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어떤 사회에서든 호모에코노미쿠스는 같은 것을 선호한다는 베커의 가정은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북미의 많은 토착 문화에서 사회와 경제가 작동하는 데 중심이 되는 덕목은 ‘관대함’이었다.(···) 백인 아이들은 두 번째 것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지만 원주민 아이들은 막대 사탕을 받지 않은 다른 아이들에게 주었다. 여기서 문화가 자원의 축적과 분배 방식을 규정할 수 있고 공유보다 저축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태도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실험은 소비의 반대가 절약이 아니라 관대함이라는 점도 상기시킨다. 62-63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화폐가 사용되느냐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중요한 단서다. 현재의 경제위기에서 거래 자체는 문제의 원천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거래 행위를 둘러싼 시스템에 있다. 66
인간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협력하고 교류하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며, 서로 사랑하고 나누어야 살아갈 수 있게끔 진화되었다. 호모에코노미쿠스와 달리, 사람들은 관용, 공정함, 신뢰, 이타주의, 호혜성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여긴다. 호모에코노미쿠스는 이런 미덕의 ‘효용’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 점차 밝혀지고 있듯이, 관대함과 베풂, 비이기심의 본질적 가치를 인식할 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질, 바로 복지를 극대화하는 핵심이다. 70
일정 수준을 지나면 돈이 더 많다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더 행복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에 빠져들어 친구나 이웃의 수준만큼은 소비해야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버린다. 타인의 소비수준이 우리의 수준보다 더 높다면, 비록 절대적 기준으로 더 잘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더 낮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서 얻는 행복은 심각한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 불평등이 심해질 때 특히 그렇다. 미국에서는 최상위 소득계층과 최하위 소득계층의 격차가 꾸준히 증가해왔다. 1979년과 2005년 사이에 최상위 1%의 세후 소득은 거의 200% 증가한 반면 최하위 20%에 해당하는 인구의 소득은 고작 6%증가했다. 더욱 많은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미디어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미화했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경제력 범위를 점점 더 넘어서는 기대 수준을 갖게 되었다. 74
베커는 자신의 방법을 각종 분야에 ‘순수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성의 법칙(law of parsimony)을 따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의 분석은 경제적 독점의 유지, 가부장제, 아니면 장기매매까지, 이 모든 것을 예외 없이 합리화하면서 힘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지지한다.(···) 베커의 방법론이 사회과학, 특히 미국에서 인기 있는 사회과학 분야에 매우 광범위한 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베커를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없다.(···) 그는 완전한 신자유주의 문화의 선구자다. 이 문화 안에서 우리는 시장의 덕목을 내면화하고 우리 자신의 행복을 운영하는 사업가로서 행동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효용을 창출하기 위해 시장의 자원을 이동시키고, 여기에 각자의 시간을 추가하며, 그렇게 소비를 통해 행복에 이르려고 한다. 77-78
베커는 시장과 호모에코노미쿠스 세계의 확산을 옹호함으로써 힘있는 자들의 물질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며, 이를 통해 시장사회의 문화에 기여한다. 문화는 단순히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살점과 피를 가진 인간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다. 베커의 관점은 우리보다 호모에코노미쿠스에 훨씬 가까운 창조물, 우리보다 시장사회에 더욱 깊숙이 안착한 창조물의 이해관계에 봉사한다. 이 창조물은 바로 기업이다. 79
3. 기업의 인격
상인과 시장은 과거 모든 문명에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 시장사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업을 만들어냈다. 기업은 이윤 추구라는 동인에 따라 움직이도록 창조된 ‘새로운 인간’으로, 짧은 역사를 통해 우리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대다수 나라에서 기업(corporations)은 ‘법인(法人, legal people)’으로 정의된다. 이 법인은 살과 피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자연인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81
매년 미국에서 팔리는 5억5,000만 개의 빅맥이 2억9,700만 달러의 에너지 비용과 12억 킬로그램의 CO2에 해당하는 온실가스를 낳는다고 추산했다. 탄소 배출 말고도 물 사용과 토양 파괴 등의 더 폭넓은 환경 영향도 추가할 필요가 있겠다. 게다가 당뇨병과 심장병 같은 식단 관련 질병의 치료를 위한 건강 비용도 추가해야 한다.
이 비용 중 어느 것도 빅맥의 판매 가격에 반영되진 않지만 누군가는 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문제는 맥도날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우리가 환경 재난 비용, 기후변화로 인한 이주 비용, 더 높은 보건의료 비용 등을 부담하게 된다. 85
그[얀 키스 비스]는 지구와 자기 회사에 이익이 되는 기획들, 예컨대 수자원 절약, 화석연료 사용 절감 등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인정하듯, 환경에 이득이 되지만 회사에는 해가 되는 정책을 채택하는 순간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기업은 호모에코노미쿠스다. 기업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주 합리적’, 합법적이든 때론 불법적이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윤을 높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정글의 기본 법칙을 따르지 않는 기업은 파산할 것이다. 이는 한 기업이 무엇을 만들든, 불가피하게 외부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가격 시스템을 통해 구조적으로 해결할 문제지, 개개인이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는 물건을 고르는 ‘윤리적 소비’를 선택하기를 기대하는 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제품이 정말로 비용과 편익을 낳는다면 이 비용과 편익은 가격에 반영되어야 하고, 그래야 시장의 경제 논리가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은 거대한 보조금을 먹어치울 뿐이다. 91-92
중상위 소득국가는 자국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오염 발생 산업을 아웃소싱하면서 빈곤국에 5조 달러 이상의 생태적 손실을 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빈곤국이 부유국에 끼치는 환경 영향은 6,800억 달러에 불과하다. 부유국이 빈곤국에 지는 생태적 부채에 비하면, 제3세계 전체가 부유국에 지는 생태적 부채는 1조 8,000억 달러로 왜소하기 그지없다.
부유층으로부터 빈곤층 쪽으로, 힘 있는 자로부터 힘없는 자 쪽으로 기울어진 비용의 불균형을 살펴보면, 외부효과가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더 부유한 소비자들이 도둑질한 약탈물을 나누어 갖기 때문이다. 93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세탁하기보다 사는 쪽이 저렴한 옷과, 수리하기보다 교체하는 쪽이 싼 전화기를 선사했다. 우리는 이런 ‘염가품’을 통해 현대의 소비자 자본주의에 편입된다.(···) 많은 가구가 최저 생계 수준 임금보다 적게 버는 상황에서 염가품을 찾아 헤매는 것은 일종의 복지 정책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소비자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어떻게 소비자가 되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94
공짜란 냉정하리만큼 합리적인 기업과 비합리적인 소비자가 만날 때 한결같이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무언가를 공짜로 줌으로써 소비자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 물건을 구매할 거라고, 혹은 소비자가 공짜 물품을 집어 드는 순간 좀 더 비싼 무언가에 돈을 쓰고 좀 더 소비할 거라고, 그뿐 아니라 소비자 손에 들린 공짜 물건의 값을 대신 내준 특정 브랜드에 호의적인 느낌을 품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이 공짜 거래는 사실상 당신의 구매 결정과 선호를 바꾸려는 시도다.(···) 기업은 그러한 취향을 조정하려 끊임없이 애쓰고, 위험하게도 우리는 이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95-96
외부효과는 부분적으로 기업 규모에 따라 움직인다. 경제학 수업에서는 구글, 코카콜라, 월마트 같은 독점기업이나 과점기업이 예외적 형태라고 가르치지만, 이들 기업은 소비재 시장에서 예외가 아닌 원칙으로 군림한다. 104
이 세상에 모유만큼 확실하게 무상인 것도 없다. 또 모유 수유가 다른 어떤 형태의 유아식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명확히 입증하는 방대한 양의 연구가 있다. 그럼에도 유아식품업체들은 어머니들이 모유 대신 유아용 조제분유를 먹이도록 설득하기 위해 허위 정보를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유포해왔다. 모유 수유를 단념시키는 한 방법은 공짜 조제분유 배포였다. 만약 아이를 출산한 어머니가 자기 아기에게 공짜 조제분유를 먹이기 시작한다면 모유 수유는 중단되고 나아가 젖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어머니는 모유 대신 더욱 열등한 대체품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식의 마케팅을 위해 유아식품 제조업체는 무료 샘플을 앞다퉈 배포했다.
이는 130만 명에 이르는 유아 사망(2004년 기준)을 초래했지만, 그 덕에 유아식품 제조업체들은 매해 수백만 달러의 이윤을 챙겨왔다.(···) 소득이 낮은 어머니들은 ‘공짜’라는 당장의 금전적 혜택에 현혹될 뿐 아니라, 조제분유업체의 오도된 주장에 넘어가기도 한다. 이들 업체는 공공 보건은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이윤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도 말이다. 105-106
상품이 공짜든 1억 달러짜리든 간에, 모든 상품은 이윤 지향적 시장에서 오는 특성을 똑같이 가지게 되어 있다. 이윤 지향적 시장이야말로 애초에 상품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휴대폰에 묻은 피, 예컨대 휴대폰의 주요 원료 중 하나인 콜탄 채굴을 둘러싼 콩고 내전에서 흘린 피는 현대 소비자본주의의 일상적인 백병전 속에 더 큰 외부효과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외부효과는 시장사회가 세상의 값을 매기는 매일매일의 정상적인 작동 과정에서 언제나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107
4. 다이아몬드와 물
랜드는 이기적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장광설을 펼쳤지만, 이와 달리 스미스는 족쇄 풀린 시장을 결코 찬양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과 함께 연상되는 용어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딱 한 번 등장할 뿐이다. 그것도 자유시장의 유익한 영향을 기술하기 위한 용도로 절대 사용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은 스코틀랜드 투자자로 하여금 지역 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즉 해외 투자보다는 스코틀랜드 경제에 투자하도록 수익을 얻고, 그 지역 역시 이를 통해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지역이 누리는 혜택은 다시 그곳에 살고 있는 투자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투자자의 이기적 동기가 초래하는, 유익하지만 의도되지 않은 결과다. 또한 이것은 해외 투자보다 국내 투자를 선호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애덤 스미스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면서 옹호하고자 하는 자유방임 정책 때문에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 것이다. 111-112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개념은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임금에 대해 가진 관점에 결정적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별한 왜곡이 없다면, 스미스는 임금이란 하는 일의 양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보는 임금은 노동 능력을 자본가에게 제공한 대가로 받는 돈이었다. 하루의 일정 시간만 일하면, 노동자는 자기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 돈을 번다. 그러나 노동자는 온종일 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일 일하는 대가로 고용주가 임금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받치는 기둥이 되는 개념이다. 노동 능력은 자본가가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달리 원재료에 사용가치를 추가할 수 있는 마술적 요소기 때문이다.(···) 마르크사가 ‘잉여가치’라고 부르는 바로 이것이 이윤의 궁극적 원천이다.(···) 자본은 이윤을 얻기 위해 ‘돈’을 투입한 비용(기계와 원재료 구매 비용,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 등)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120-121
가치가 노동에 의해서만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윤을 늘리는 또 다른 방법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줄이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드는 비용이 적을수록 이윤은 더 많아진다. 자본가 한 명이 혼자 힘으로 노동력의 가격을 낮출 수는 없지만,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노력할 수는 있다.121-122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이 한 가지 더 있다. 노동과는 관계없는 인클로저가 바로 그것이다.(···) 인클로저, 즉 자원의 사유화는 목재를 위해 국유림이 매각되고, 생물 다양성이 특허권의 대상이 되며, 채광권이 경매에 붙여질 때 일어난다. 인클로저를 통해 비용은 공공이 치르고 이윤은 개인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123-124
케인스는 일종의 수사적 예시로, 정부가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할 만큼 상상력이 없다면, 항아리에 돈을 넣어 쓰레기 더미에 묻어버리는 것만으로도 경제가 다시 움직이도록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누군가 쓰레기 더미를 파헤쳐 공돈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물론 이 공돈을 찾아내려면 땅을 파헤칠 인부가 필요할 것이다. 이 인부들이 발굴 작업을 하는 동안, 의식주를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한 비용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에게 먹을 것을 판 식료품 장수와 집을 빌려준 집주인은 그 돈으로 다른 상품을 구매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제는 다시 순환한다! 이것을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라고 부르는데, 정부가 내수경제에 돈을 지출함으로써 얻는 부가적 수확을 말한다. 이 유익한 효과는 고소득 집단에서보다는 저소득 집단에서 더욱 크게 나타난다. 돈을 이미 많이 가진 사람은 추가로 돈을 받아도 더 많이 쓰지 않지만, 없는 사람은 받은 돈을 즉각 지출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부자를 위한 감세정책이 바보 같은 생각(어떤 경제학자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감세 조치를 영구화하면 0.23의 승수효과, 즉 1달러의 지출에 23센트의 소득 증대 효과가 나타난다)인 반면, 저소득층에 주는 식품구매권인 푸드스탬프(승수효과 1.73)는 가장 효과적인 경기부양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129-130
5. 반(反)호모에코노미쿠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만 연 100만 명 이상이 말라리아로 사망하며, 아프리카 청년 사망자 4분의 1의 사망 원인이 말라리아다. 말라리아는 사람에게서 모기로, 모기에게서 다시 사람으로 옮겨다니는 기생충을 매개로 전파된다.(···) 말라리아에 대한 대처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다.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기 때문에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예방법이 된다. 이를 위한 가장 저렴한 방법은 효과가 3~7년 지속하는, 살충제 처리된 모기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3~6달러 하는 이런 모기장은 모기에게 물리는 것을 70%나 방지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어머니와 아이들에게 모기장을 무료로 나누어주라고 권고한다.(···) 이 모기장의 가치는 3~6달러 하는 가격보다 훨씬 높으며, 모기장의 보급을 시장에만 맡겨두어서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수익성 상품을 공짜로 제공하는 전략에서 보았듯이, 무료로 모기장을 공급하는 일은 명목상의 적은 금액이라도 내야 할 경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기장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할 것이다. 136
전직 장군으로서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퇴임 연설에서 남긴 발언은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권력의 등장으로 재앙이 초래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복합체가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위험에 빠뜨리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젠하워의 우려는 옳았다. 그는 자본주의가 한쪽에선 민주적 제도를 악용해 범죄를 은폐하고, 다른 한쪽에선 공공자금으로 사적인 주머니를 채움으로써 정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10여 건의 대(對) 게릴라 전쟁과 수백 건의 ‘훈련’ 작전,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의미 없는 전쟁은 군산복합체가 공공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증거다. 138-139
공공 부문의 군사비 지출을 모두 더하면, 미국 정부 혼자 자국 군대에 1조 달러 이상을 쏟아붓는다.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정부에서 방위비 지출이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2009년 무기 구입비를 두 배로 증액할 계획을 세웠고, 같은 해 중국의 군비 예산은 15%, 인도는 34% 증가했다. 지구가 맞이한 사상 최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과 훈련, 보건, 지속 가능한 에너지와 농업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 많은 나라가 빵이 아닌 총을 사는데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140
케인스는 정부가 지혜롭게 활용하면 시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라고 보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생각은 시장 사회 규칙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완하려는 것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도구가 손상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140
정부를 유능한 사업가의 손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해밀턴만이 아니었다. 특정한 계급 성원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었다. 프랑스의 19세기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는 사회의 통치를 맡을 신탁인으로 은행가를 선호했다. 세계 각국의 상원 구성을 살펴보면 힘의 균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영국의 상원에서 노동계급 출신자를 보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미국 상원의원 중 약 절반이 백만장자인 데 반해 하원에서는 4분의 1만이 백만장자다. 이것이 정책 결정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144-145
정부의 핵심 부처 대부분이 재계와 금융계에 장악되어왔다고 잠시 상상해보라. 이런 가상적 상황에서는 빈곤층이 부유층보다 높은 세율을 부담하고, 기업이 일반 국민보다 효과적으로 세금을 피할 수 있는 과세 구조가 생겨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미국에서는 실제로 일어났다. 2009년, 기업이 낸 소득세는 연방 소득세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일반 국민이 나머지 76%를 냈다), 백만장자들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감사 비율도 2007년에 비해 딱 절반에 불과했다. 워런 버핏(Warren Buffet)은 자체 내부 감사를 한 후 자신이 사무실의 비서와 사무원보다 훨씬 낮은 세율의 소득세를 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투쟁을 벌이는 쪽은 우리 부유층 쪽이며, 부유층이 투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노동자 이익에 반하는 고용 규제에서 탄소 배출권 거래제에 이르기까지, 또 공공 자원을 민간의 손에 맡기는 환경 법률에서 은행에 대한 구제금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부유층이 누리는 행운을 발견할 수 있다. 145
6. 우리는 모두 공유자다
오늘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은 전 세계 식량 공급량과 인구의 불일치와는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늘날 지구 상에는 현재 세계 인구의 1.5배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시장에서 식량을 사유재산으로 분배하는 방식 때문이다. 굶주리는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 식량을 살 수 없을 뿐이다. 설사 세계 인구가 더 적더라도 식량을 분배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릴 것이다. 159
파키스탄의 해양 공유지는 탐욕적인 현지 어민 탓에 고갈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공유지는 정부의 방조 아래 초국적 기업체들이 사유화[인클로저]해왔다. 이 기업들은 자신의 생존 근거를 파괴당할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파키스탄 어장이 붕괴하면, 산업적 트롤선은 자유로운 국제시장 환경 아래 수익성이 더 좋은 다른 바다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어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온 어민들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갈 수 있는 더 풍족한 바다란 없다.
파키스탄의 이야기는 더 넓은 차원에서, 그리고 더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공유지의 비극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더스트볼에서 열대우림과 대양의 대멸종에 이르기까지, 환경 재앙은 자본주의적 농업, 임업, 어업의 결과이며 기업이 벌인 행위의 결과다.(···) 공유[commoning]을 위해서는 우리의 이기적인 충동을 제어해줄 사회적 관계망 그리고 세계의 가치를 평가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162-163
하딘 같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희소 자원을 사유화하려는 왕과 귀족들의 욕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원을 관리하고 계속해서 사용해나갈 방법을 찾아냈다.(···) 누군가가 공유지에 ‘비극’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려고 한다면, 악몽은 공유지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권 아래에서 진행되는 파괴 과정에서 시작된다. 167
사유재산이 성립하려면 그것을 공공의 손에서 떼어내 사유화하는 행위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 필요하다. 재산은 사회적인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땅에 울타리를 치고 다른 이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170
각 사회는 나름의 독특한 규범과 관습에 따라 의식을 벌였지만, 모든 의식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의식에는 선물을 나누어주는 행위가 수반되어 부(富)의 대규모 재분배가 일어났으며, 이런 행위가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이 점이 바로 백인 정부의 신경에 가장 거슬린 부분이었다. 173
칠레의 전통 어업에 대한 사례 연구에 따르면, ‘공유지’로서의 어장에 대한 권리를 공동체가 공유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칠레는 1960년대에 산업적 규모의 트롤선 조업을 금지해 파괴적인 초국적 사업체와의 경쟁으로부터 소규모 어업 부문을 보호하고자 했다.(···) 정부와 어민단체는 TURF 시스템(···)을 함께 만들어냈다. 어촌과 어민 단체는 수 세대에 걸쳐 고기를 잡아와 전통적 텃밭으로 여겨온 어장에 대한 집단적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어장이 회복된 것이다.(···)
하지만 칠레의 경험은 통상적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사례다. 21세기의 현실에서 공유 시스템은 대개 해체되고 있다. 177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포용적이든 배타적이든, 실제로 많은 대항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단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진보적인 대항운동의 사례를 보면, 그러한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힘없는 자, 그리하여 부자들이 일으킨 외부효과의 부담을 짊어지는 자들이다. 이들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한 자들, 그들 자신이 ‘스스로 기다려온 변화,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달은 자들이다. 179
PartⅡ 새로운 공유지의 탄생
7. 대항운동과 ‘권리를 가질 권리’
가장 뿌리 깊은 아이러니는 ‘가격 왕국’의 확산이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시장이 제공하는 자유는 모두 환상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품과 의료 서비스, 사회보장, 주택 등에 비용을 대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벌어들이는 소득과 자유에 치러야 하는 비용 사이의 괴리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미국인에게 자유란 돈이 없어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의미의 단어로 전락하고 있다. 185
미국에서 자유의 불공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산모 사망률(출산 중 이나 출산 직후 죽는 여성의 비율)에 관한 자료를 보면 생생히 알 수 있다. 미국의 산모 사망률은 산모 10만 명당 11명에 이르고, 영국은 8명, 슬로바키아는 6명이다. 미국의 1인당 보건 지출액은 6,000달러가 넘지만, 슬로바키아는 565달러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1995년에 미국 내 모든 소수 집단의 산모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의료 기술은 진보했고 평균 소득도 증가했으며 억만장자는 더 많아졌는데도,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는 여성은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자유시장적 자유가 선사하는 선물 중 하나는 젊어서 죽는 것이다. 186-187
오늘날 억압받는 소수 집단이 시장사회에 빼앗긴 힘을 되찾으려는 과정에서 권리라는 말이 제자리를 찾았다. 변화를 실행할 ‘정치적 의지’가 생길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정부의 요청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여성 운동부터 토착민의 요구에 이르기까지, 권리의 이름으로 민주적 사회 변화를 촉진하는 수백만 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권리 담론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징표다. 191
‘야만인’이 식민 개척자의 마술 주문이었다면, ‘정치적 의지’란 오늘날 민주주의의 요정이 뿌리는 꽃가루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정치적 의지’의 결핍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의자라는 개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사람들이 정부에 대해 가지는 이중적 태도다. 일반 대중은 군비 지출 감축, 보건, 교육이나 환경 문제 등에 대해 충분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단지 정부 대표들의 넘치는 의지가 너무나 자주 대중의 의제가 아닌 기업의 의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191-192
이탈리아 공산당은 결코 희망을 걸 만한 존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1970년대 평당원들은 서구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잊고 있던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바로 다수의 수동적 태도가 힘 있는 자들의 지배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통찰 속에서 폴라니의 이중운동을 위한 ‘로켓 연료’를 발견할 수 있다. 이중운동의 두 번째 부분, 바로 사회가 시장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오는 운동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다. 192
민주주의가 꽃피게 하려면, 경제 시스템이 우리를 망쳐놓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는 생각과 정치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먼저 되찾아야만, 민주주의와 경제를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버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193
1980년대 내내, 세계은행은 남반구에서 시장을 창출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시카고학파의 복음으로 훈련받은 경제학자들이 선지자 같은 열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삐 풀린 자유시장의 소식을 전파했다. 이들은 전술적으로 인클로저를 선택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공유지 강탈뿐 아니라 문화와 지식까지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상품화를 전술로 삼았다. 194
라 비아 캄페시나에서 권리는 매우 구체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들은 행동에 앞서 먼저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거쳤다. ‘권리를 가질 권리’에 관한 담론은 행동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요구에 선행하는 것, 바로 의지의 천명이다.
라 비아 캄페시나는 수차례 회의에서 식량 주권 개념을 지속적으로 개정하면서, 자신들이 시장이나 세계무역을 깡그리 없애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들은 단지 시장이나 세계무역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은 사회가 시장을 통제하길 원하고, 자유시장이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가치를 되찾기를 원한다. 198
CIW가 가장 성공적인 전술을 개발한 것은 공적인 심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타코벨에 대한 불매운동은 10명의 CIW 회원이 모인 일상적인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불매운동을 선언한 후 한 노동자 회의에서는 트럭운전사 조합원 한 명이 베니테스를 찾아와 “당신들, 정말 미쳤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4년 뒤 CIW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 타코벨이 CIW의 파운드당 노동 단가 인상에 동의한 것이다. 그러자 서브웨이와 버거킹, 맥도날드도 그 뒤를 따랐다. 207
CIW가 원하는 것은 그들과 그들의 노동이 가진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뿐이다. 그러기 위해 CIW는 자신들을 쓰다 버릴 수 있는 노동 기계로 전락시킨 힘에 대항해야 했다. 노동에 너무 낮은 가격이 매겨지는 바람에, 이들은 작년에 쓰던 휴대전화처럼 손쉽게 쓰다 버려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CIW는 이런 상황에 맞서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체를 결성했고, 이들의 움직임은 대항운동이 되었다. 208
CIW가 자신의 노동이 가진 가치를 정하려는 과정에서 창출해온 도구와 정치·사회적 유대는 더 큰 변화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다. 이런 변화는 플로리다의 농장에서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대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도시 공간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도시 생활과 노동, 생존에 가치가 매겨지는 환경을 탈바꿈시키고 있다. 209
8. 도시의 민주주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매우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시위에 나선 것은 자신의 요구를 전하려는 모든 시도가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아이티는 세계은행과 IMF으로부터 연이어 구조조정 차관을 받으면서 쌀 시장 개방 요구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이 때문에 자국 농민들은 미국의 쌀 재배업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 결과 쌀 산업이 몰락해 국가 전체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쌀 가격이 하루 만에 30% 치솟자 수많은 아이티 사람이 기아로 내몰렸다.(···) 이탈리아의 소비자 단체들은 치솟는 파스타 값 때문에 항의 시위를 벌이면서 밀 가격을 인하하라고 요구했고, 동시에 정부의 수많은 실정을 비판했다. 모든 폭동은 식량을 둘러싼 정치에 대해 국민이 가진 격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212
데소토의 시장 지향적 입장은 힘 있는 자에게 유리할 뿐이다. 토지의 변혁은 더 큰 부와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이 저당 잡혔다가 결국 헐값으로 팔아넘기게 될 것을 잠시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부자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높은 임대료를 부담하게 되었다. 토지 소유권이 기업가 정신을 자극한다는 면에서는 데소토가 옳다. 하지만 혜택을 보는 쪽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힘의 불평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변혁의 명분으로 내세워지는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거의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18-219
공공정책에서의 기회비용은 집단적으로 토론하고 정의할 필요가 있다. 기회비용이 독성 폐기물을 버리는 유럽 기업과 그 폐기물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겪는 소말리아 주민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면, 기회비용의 평가는 전문가가 필요한 기술적 행위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필요한 정치적 행위다. 227
노동당 지방정부 아래, 그리고 지방 내 근린 주민 조직 연대가 압력을 행사한 결과, 199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참여적 예산 운영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방식은 현재 전 세계 300여 개 이상의 도시에서 실행되고 있다. 이 방식을 통해 시민은 자치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을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을 거쳐 도시의 기회비용이 밝혀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시장적 가치 결정 메커니즘이다.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이 가진 도시에 대한 권리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참여적 예산 운영은 도시의 16개 지구 각각에서 벌어지는 회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를 결합한 방식이다. 작은 비공식 마을 회의부터 연례지구총회에 이르는 각종회합에서 예산 지출 방식에 관한 토론이 벌어진다. 지방 정부 예산에서 자원을 어떻게 할당할 것인지, 주택, 위생, 도로, 보건, 교육 등에 재원을 어떻게 집행할 것인지가 토론의 주요 사안이다.(···)
참여적 예산 운영의 성공 열쇠는 시민의 참여 수준에 있다.(···) 2004년, 포르투알레그레 인구의 99.5%가 거주하는 지역에 상수도망이, 83%거주지역에 하수도망이 연결되었다. 참여적 예산 운영의 결과, 공립학교의 아동 수가 세 배 증가했다. 참여적 예산 운영 과정이 매력적인 것은 시민의 정치 참여가 구체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참여 결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228-229
중국 노동자들은 이모칼리의 노동자가 원했던 것과 매우 비슷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 바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공정하게 대우받을 권리, 발언할 권리, 소유하지는 않았어도 사용하고 있는 자산을 통제할 권리 등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 정부하에서 부정당하는 ‘정치를 가질 권리’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는 반드시 권력의 불평등 문제를 다루게 된다. 237
프리 소프트웨어 운동이 제기한 질문은 우리가 사유재산의 핵심, 재산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소유권에 ‘당연한’ 것이란 없다. 그것은 협상의 결과물일 뿐이며, 현대의 사회 변화 과정에서 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질문의 대상이었다. 240
9. 다시 식량 주권으로
지구를 살리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부유한 북반구에서는 시민의 자원 폭식(지구 상의 모든 사람이 평균적인 미국인이나 캐나다인과 같은 수준의 오염을 일으킨다면 이 배출물을 흡수하는 데 지구 9개가 필요할 것이다)을 그만두게 할 대대적 수준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가난한 남반구에서는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대체에너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이런 규제를 운영하는 규칙이 어떻게, 누구의 이해관게에 맞게 작동할 것인지에 있다. 244
우리는 탄소의 가격을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실가스를 350ppm 이하 수준으로 안정화하기 위해 설계된 일련의 정책이 필요하다. 인간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 이기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정함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협력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며, 정의와 민주주의를 요구할 수 있다.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진 생태 부채를 갚아나가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다. 북반구과 남반구에 걸쳐, 세계 각국의 정부는 하루 빨리 인류의 석유 중독을 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시장은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공유지[commons]에는 규칙과 규제가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공유지의 개념, 돈뿐만 아니라 정의와 부끄러움, 처벌과 규제를 사용한다는 개념은 기후변화에 어떻게 가격을 매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부유한 국가의 에너지 폭식을 위한 인프라 창출이 이미 가난한 나라에 엄청난 비용을 지웠고, 그 비용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부담이 되고 있다. 250-251
화석연료 사용에 대한 문화적 태도, 개개인의 자제, 청정에너지와 친환경 직업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 등에 변화를 가져오는 규제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251
일례로, 지역 주민은 공장형 돼지 사육장을 운영하는 데 반대했지만, 정부는 이들 사육장에 특별허가를 부여했다. 그 덕분에 돼지 사육장은 폐기물 배출에 크게 규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육장에서 나오는 폐기물은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었다. 결국 1995년, 폐기물과 접촉한 대니얼 펜녹과 토니 베언이라는 두 젊은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CELDF는 펜녹의 이름을 딴 민주주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학생들은 기업 세력과 직접 맞서는 단체 결성의 기법을 배운다. 또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창출할 지역 주민의 권리를 억압하기 위해 기업이 써온 수법의 역사도 교과과정에 들어 있다. 255-256
네슬레(Nestle)가 폴란드 스피링(Poland Spring) 생수 브랜드를 출시하기 위해 메인 주의 작은 마을에서 지하수를 개발하려고 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지역 자원에 대한 주권을 선언하고, CELDF에서 사용하는 수단을 동원해 수자원 보존 운동을 전개했다. 지역 차원의 운동에 실패할 염려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 단체가 중앙 정부보다 더 깨어 있으며, 선량하거나 지속 가능하다고 믿을 이유 역시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런 작은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시장이 민주 사회에 채운 속박으로부터 서서히 해방된다. 257
내가 연구한 세계 각국의 모든 사회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운동에 몸담은 이들은 물리적 자원뿐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고 조직하며 개발하고 기리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아가 물리적 세계와 문화적 세계 모두를 일종의 기반으로 이해한다. 모든 사람이 그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반,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공유하며 바탕으로 삼는 기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62
데칸개발공동체식의 공유지는 가격과 가치의 불일치가 초래한 문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유능한 전문가가 없어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시장의 뿌리 깊은 실패에 기인한다.(···) 가격의 뒤에 숨어 있는 비용의 일부를 수량화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사회적 자원의 잘못된 분배를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모든 물건에 가격을 매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숫자로 측정할 순 없지만 여전히 경영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을 공정하게 경영하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 정치다. 시장이 세계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문가가 꾸려나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문성과 자원의 민주화’다. 262-263
10. 안톤의 실명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시장사회와 싸울 능력, 바로 권리를 가질 권리를 되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민간 부문의 몇몇 주체는 그 자체로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일부라는 것, 따라서 그런 주체에 맞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런 저항은 현 상태를 위협한다. 그 때문에 농민부터 판자촌 주민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논의한 많은 운동에 몸담은 대부분이 범죄자와 불량배로 낙인찍혀왔다. 그것은 오늘날 시장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시장의 역할을 둘러싼 취약한 합의에 도전하는 자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271
킹스노스 식스(Kingsnorth Six)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여섯 명의 그린피스(Greenpeace) 회원이 석탄 화력 발전소의 추가 건설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면서 잉글랜드 남동부의 석탄 화력 발전소를 일시적으로 멈추게 했다. 이들은 발전소 굴뚝에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총리를 향해 “고든, 그 계획은 넣어둬”라는 문구를 쓸 작정이었지만, 결국 ‘고든’까지밖에 쓰지 못했다. 이 페인트칠을 지우는 데 3만 파운드가 들었고, 이들은 기물파손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발전소에 피해를 주긴 했지만,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에게 현재 오늘날 기후 변화가 일으키고 있는 피해의 증거로 발전소를 하루 폐쇄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인류 복지에 끼치는 약 150만 달러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배심원들은 피고 측 의견에 동의했다. 여섯 명은 방면되었고, 영국 정부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는 이 결정을 두고 2008년 ‘삶을 변화시킨 올해의 아이디어’로 꼽으며 칭송하기까지 했다.(···)
킹스노스 식스 재판의 피고뿐 아니라, 그 재판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든 다른 이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변호사, 활동가, 지지자들 모두가 중요했지만, 흐름을 뒤바꾼 12명, 바로 배심원을 빼놓을 수 없다.
판도를 바꾸는 법률적 판단이 정부 관료나 발전업체의 회계사가 아니라 열두 명의 평범하고 이름 없는 사람의 손에 있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배심원들은 협의의 과정에서 자유와 이성의 미덕을 발휘했고, 이 미덕은 가치가 결정되는 조건을 시민이 직접 만들어가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을 가지는지 암시해준다. 272-274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에서는 선거가 없었다. 정치는 권력을 추구하며 스스로 나선 이들이 아니라 만인에 의해 실행되었고,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가 있었다. 각각 500명으로 구성된 12개 집단은 각각 자체적으로 사건을 심리했는데, 전문가와 법률가는 자문 역할을 할 뿐이었다.
추첨을 통한 선출에는 어떤 시민도 사법 심의의 기회와 책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그 심의 과정이 법정 너머로 확정되었고, 이 시스템의 정신이 바로 사건을 판정하는 그 12명의 시민 속에 깃들어 있다. 이런 시스템은 다른 곳으로 확장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274
시장을 통제하려면 정부와 기업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며, 그럴 방법은 존재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경제적 무지뿐 아니라 정치적 무지 역시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간 우리 스스로 부추긴 셈인 정부와 기업의 파괴적 힘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 287
공유지의 사회학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켜야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 자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고 ‘책임’지는 것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이는 모든 재산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재산권은 중요하고, 합당한 한도 안에서 누구도 재산권을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또 시장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시장은 의사 결정을 분권화하기에 좋은 방식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시장이 세상의 가치를 평가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믿음이다. 288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소중함을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는 데 하나의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공동체는 실패할 수 있고, 민주주의 자체에도 안전망이 필요하다. 인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비록 인권의 확산 과정은 얼룩져왔지만, 인권 개념 자체는 보다 민주적인 생명력을 얻어왔다. 인권에 대한 요구는 국내적으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게임의 장을 공평하게 만든다.(···) 사회의 일부로 다시 들어온 시장, 즉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이라고 생각해보라.
좀 더 공정하고 온정적인 사회로 가는 과정에는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소수의 사람과 경제 주체의 손에 자원과 권력이 집중되면 민주주의의 성공이 가로막힌다. 우리에게는 좀 더 ‘유연한’ 재산권 개념이 필요하다. 재산권과 시장을 항상 공정성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민주적 고려의 아래에 두어야 한다. 289
우리는 가격이 우리가 믿는 것을 올바른 신호로 전달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가격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대는 일을 멈춘 다음에야 비로소 회복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토론, 규제, 신뢰, 관용, 자제가 시장이 우리에게서 심리적으로 앗아간 것을 되찾는 길이다. 293
정치를 되찾으려면 더 많은 상상력과 창조성,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투표함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평등, 책임, 정치의 가능성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시장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이 시장에서 끌어낼 수 있는 동기와 열정, 자원으로 인해 사회의 다른 부분과 지구가 계속해서 망가지지 않도록 시장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세계를 좀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며 가치를 매기고 꾸려나가야 한다. 또한 재산권과 정부를 그간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더 순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결국 공동이 함께하는 모험이 될 것이다.(···) 행복은 오히려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다. 295-296
[밑줄] 라즈 파텔(제현주, 우석훈 해제),『경.hwp
'신자유주의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밑줄] 엄기호,『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0) | 2011.07.21 |
---|---|
[밑줄] 장하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1) (0) | 2011.06.25 |
[밑줄] 장하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 (0) | 2011.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