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반대

[밑줄] 엄기호,『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두괴즐 2011. 7. 21. 19:24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낮은산 | 2009-05-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신자유주의, 넌 도대체 누구니? 아이들에게 저축하는 법 대신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밑줄] 엄기호,『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 2009.



* 들어가는 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지금은 예외적인 극히 일부만 탈락하고 망하는 시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언제든 예외가 되어 버리는 그런 시대이다. ‘누구나 예외’라는 이 처참한 덫으로부터 벗어나 ‘예외의 예외’가 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사람들은 인생 한 방을 노리고 로또를 긁거나 부동산 투기를 한다. 현실은 이미 나의 문제로 바싹 다가와 있는데도 신자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교묘하게 자신을 속이고 있다. 8


 문제는 이런 연금기금을 가지고 운용하는 헤지펀드가 최단기간에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려고만 하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이나 산업의 육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마치 도박판처럼 투기 자본이 세계경제를 교란시키는 이러한 자본주의를 영국의 경제학자 수전 스트레인지는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카지노 자본주의에서 가장 흔하고 복잡하게 이용되는 자본운용 방식은 고액배당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헤지펀드에 의해 투자를 받은 회사는 당연히 주주들 눈치를 보느라 바빠서 일자리 창출이나 경쟁력 강화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식품제조업체인 콘아그라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1995년 6천5백 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29개의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하자마자 주가가 급등하여 하루 만에 주식 시가 총액이 5억 달러나 상승하였다. 좋은 물건을 많이 팔아서 주주들에게 높은 이익을 지불하는 대신, 덜 만들고 덜 팔아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용만 절감하면 대박이 터지는 셈이다.

 이처럼 금융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부의 창출은 생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투자 자체에서 부의 창출이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연금기금은 실제로는 현재 노동자의 연금을 가지고 미래 세대의 일자리를 갉아먹으면서, 겉으로는 미래 연금생활자를 먹여 살리겠다는 공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22-23


신자유주의는 극단적으로 시장을 맹신하는 ‘시장 근본주의’로, 사람의 삶이란 머릿속에서 발끝까지 모두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장 근본주의는 시장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한 자유의 의지로 충만한 사람이라며 칭송한다. 24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신자유주의가 도처에 있듯이,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길도 도처에 있다. 하지만 도처에 있는 수천 개의 대안은 오로지 그 대안을 실천하는 동안에만 볼 수 있으며, 극복의 가능성을 낙관할 수 있다.(···) 하지만 고원 밑에서 팔짱을 끼고 쳐다보는 비판을 통해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가능성이다. 팔짱을 낀 비판을 통해서는 오로지 냉소주의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고원 가운데 하나에라도 올라설 때만, 그 장엄한 고원의 연속체를 만날 수 있다. 26


근대국가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영토 안에서 국민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모두 다 동등하게 대하겠다는 것을 자기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치밀한 계산을 하여, 주권과 시민권 영역에 예외를 설정한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 중국의 경제특구, 한국의 경제자유주역처럼 자국의 영토 안에 주권의 영역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자율권을 보장하는 지역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런 구역 안에서는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노동법이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같은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가 작동하지 않고,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인 치안과 복지도 상당 부분 기업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예외를 통해 주권과 시민권은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권리로 나누어진다. 28-29


 하비가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식 자본축적의 위기를 돌파하고 성장을 이루었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로지 부자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만 성공한 체제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화 이후에 서계경제의 성장률은 오히려 하락하였고, 다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의 차이만 엄청나게 벌어졌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는 못 가진 쪽에서 가진 쪽으로 소득을 이전하는 프로그램이다. 하비는 이것을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하비는 신자유주의가 유일무이한 대안적 경제 정책이 아님을 실증적으로 비판한다. 실제로 노르웨이나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덜 신자유주의화되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화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그 사회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신자유주의화의 경향성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31-32



1. 태어날 때부터 발버둥 쳐야 한다

-브랜드 아파트 단지와 특목고, 탈락하지 않기 위한 성채


 서울의 명문대를 다니는 다른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의료전문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한 학생은 사람을 만나면 시간을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연애도 하지 않고 섹스 파트너만 두고 있다고 했다.(···) 혼자만의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절제이다. 사랑은 취업의 가장 큰 적이다.

 취업을 앞둔 대학생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아이들도 일찍부터 자신의 몸과 시간, 가족이나 친구, 친척 간의 관계를 관리하고 잘 운영하여 자산으로 만들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자기 관리를 통해 현명한 소비자와 투자자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아이들조차 공부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자아실현이나 꿈을 들지 않는다. 53


한국에서 아이의 미래는 어느 지역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아파트는 그 아이가 누구와 경쟁하며,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대학에 진학할지 상당 부분을 결정한다. 주거와 교육이 서로 맞물리면서 아파트는 시세로 표시되는 단순한 부동산의 가치를 넘어선다. 학력 자본이며, 사회 자본이며, 문화 자본이다. 아파트는 그 주변에 사교육이 몰려 있고, 같은 신분끼리만 사귀고 교제하며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같은 헬스클럽과 문화센터를 다니며 교양을 쌓는 그들만의 성채이다. 56


서구에서 국민주택이나 공공주택이 “부의 이전 및 재분배를 도모”하려는 “연대 의식”에 기초했다면, 한국의 아파트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와는 아주 거리가 먼 “지불 능력이 있는” 중산층의 성채, 부유층의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장기임대주택은 거의 없고 주택 매매”를 부추기는 정책만 펼친 정부의 전략 때문이다. 정부는 부유층이 더 좋은 최신 주택으로 이주를 하면 하위 계층은 부유층이 남기고 간 주택을 저렴한 비용으로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형 아파트를 희생시켜 대형 아파트를 건설”하여 “하위 계층을 주변 지역으로 몰아내고 상위 계층이 도심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라고 줄레조는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한 결과이다. 57-58



2. 청년, 시한부 사랑을 하는 무산자 계급이 되다

-지방대생과 비정규직의 운명


 이 시대에는 외로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향락산업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차라리 위로 산업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아 보인다. 단지 섹스뿐만 아니라, 위로와 안정, 보살핌 같은 다양한 정서가 팔린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하나하나가 다 파편화되어 상품으로 팔려 나간다.(···) 취업이 아니라 실업이 원칙이 된 시대에 길거리를 헤매는 청년과 청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유일한 일자리는 바로 이 위로 산업(care industry)이다. 77


이랜드 그룹은 까르푸를 인수하기 위해 1조7천억 원을 들였는데 그 가운데 1조5천억 원이 대출이었다. 고작 자기 자본 2천억 원으로 1조7천억 원을 삼켰으니 새우가 고래를 삼킨 셈이다. 결국 이랜드 그룹은 이후 만성 재정 문제에 시달리자, 고용하겠다는 애초 약속을 깨고 기존 까르푸 직원을 대거 비정규직으로 돌렸다. 깊게 따지고 들지 않아도, 이랜드 사태의 근본 원인은 명백하다. 바로 무리한 대출과 사세 확장, 무책임한 인력 운용, 수수방관하는 정책이 그 원인이다. 이것은 명백한 기업의 실패이고, 시장의 실패이고, 정부 정책의 실패이다. 하지만 시장과 기업, 정부는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이러한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82


 신자유주의는 줄곧 이야기한다. 노조나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으려는 나약한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고. 무엇보다 노동자 개인은 자기 관리, 자기 계발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노동자 개인의 경쟁 상대는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내 옆의 동료이기 때문이다.(···) 여가라고 알려져 있는 비노동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을 위해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받고 도태되어야 한다. 여가는 생산 자본으로 전환 가능한 문화 자본, 사회 자본을 축적하는 시간이지, 놀고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84-85


우리들 모두의 시간과 공간, 관계는 이제 투자와 관리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91


 프레이저는 1990년대 이후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혁신을 통해 이룬 미국의 장기호황 ‘신경제’ 시기에, 화이트칼라가 어떻게 “인원 감축과 정리해고, 줄어드는 복지 혜택, 늘어가는 노동 시간과 점점 더 강해지는 노동 강도 등으로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지, 경영자에 의한 노동 감시는 얼마나 극심해졌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경제성장의 열매를 따먹은 사람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프레이저에 따르면 “18~25세 미혼 남녀의 경우 지난 25년 동안 평균 실질임금은 11%나 감소했고 대졸 남성의 초임은 89~97년 6.5%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CEO의 보수는 44.6% 상승”했다고 한다. “죽어라고 일했지만 번영의 열매는 경영진과 전문 투자자의 몫”인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계급 지배를 강화한 데 불과하다는 데이비드 하비의 말이 공연한 이데올로기적 선동이 아니라 사실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92-93



3. 평생, 언제나 누구나 망하리라는 공포와 함께한다

-외환위기 이후, 자유에 권리를 빼앗긴 우리 모두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망한다는 일은 자기 피부로는 느낄 수 없는, 당연히 그저 남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자기가 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망한 사람을 보면 늘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주제에 맞지 않게 욕심을 과하게 내었다든가, 부정부패가 심해서 언제든 법의 심판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든가.

그러나 외환위기는 부도와 파산, 명예퇴직과 정리해고를 평범한 누구의 삶에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일로 만들었다.(···) 몰락은 쉬웠지만 재기는 어려웠다. 몰락한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들 수 있는 재기의 공간이라 봤자, 요식업이나 소매업 같은 뻔한 업종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자리도 아내에게 더 쉽게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파출부나 식당 주방 일, 전화 상담원 같은 비정규직 자리는 대부분 여성들의 몫이다. 여성의 노동력은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데다 값도 싸서 신자유주의가 칭송해 마지않는 ‘유연한 노동’의 조건에 딱 맞기 때문이다. 104-105


 실제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세상은 소비자 천국이 아니다. 지금껏 살펴봤듯이 무한 경쟁, 승자 독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세상에 아무런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은 이제 짐이 되었으며,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와 지역사회는 ‘너 죽어야 나 사는’ 정글이 되어 버렸다.  114


 우리는 민철이 했던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라는 말이 가지고 온 기적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이 기적을 낳았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기 탓만 하던 부모에게 민철의 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였다.(···) 망한 것에 대해 모두가 자책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아들의 이 한마디는 식구 모두에게는 구원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맞서는 이런 위로와 돌봄이다. 114-115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자연재해가 어떻게 사회적, 도덕적 재해가 되었는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덮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우만은 그 자연재해야말로 얼마나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운명을 크게 갈라놓았는지를 폭로한다.

부자는 폭풍이 닥치기 전에 미리 도망갈 수 있었고, 그들의 재산은 보험을 통하여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막상 떠나 어디로 간다고 하더라도 모텔비조차 낼 능력이 안 되는, 갈 곳 없는 사람이었다. 보험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이들은 남았다. 그 결과 이들은 재산도 잃었고, 목숨도 잃었다.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한 일은 자연재해에 맞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카트리나가 덮치기 전에 미국 연방정부는 뉴올리언스의 홍수 대비 시스템을 재구축하려고 예산을 마구 삭감하였다. 재난이 발생하고 난 다음에도 주정부는 방위군의 출동을 미루었다. 결국 방위군이 파견되었을 때 이들은 사람을 구하기보다는, “약탈자를 검거하고 살해를 염두에 둔 발포”를 할 뿐이었다. “전자제품을 터는 강도이든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았다.

자연재해의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법 질서에 대한 위협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처럼 보였다고 바우만은 질타한다. 이처럼 “공포는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국가의 배려를 받을 만한 목숨과 살 가치가 없는 목숨을 나누었다.” “공포에 맞서는 근대의 싸움은 공포 규모의 축소보다 공포의 사회적 배분” 쪽으로 이루어졌다. 119-120



5. 탈락한 자에게는 쓸쓸한 묘비명조차 없다

-시장도 복지도 외면한 사람들


 인권의 실상을 가장 통찰력 있게 간파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이다.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아주 짤막하게 인권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인권의 핵심을 찔렀다. 인간이 순수한 인간이 되는 순간에 박탈당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달리 말하면, 인간은 인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에 소속된 무엇인가가 되어야만 한다. 즉, 인권의 실체는 시민권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시민이 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권을 가지게 되며, 소속 없이 순수한 인간일 때는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나의 국적이 무엇인가가 현대 정치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누가 순수한 독일인인가?’라는 질문에 나치가 그토록 천착한 것도 바로 이런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즉 오늘날의 권력은 생물학적 생명을 정치화해서 그 배제와 차별을 예외의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셈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생명은 그저 자연 상태로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니라 가장 정치적이고 정치화된 사건이 된다.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인권의 주체가 되지 못한 이들은 그저 인도주의의 대상일 뿐이다. 173-174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은 인권이 사실은 짐승의 권리에 불과하다며, 인권의 윤리가 가진 허구성을 통렬하게 파헤친 책이다. 인권은 피해자 너머에 대해서는 결코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권을 한층 절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피해자의 상태로, 절규하는 짐승의 상태로 묶어 두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상태에서만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인권의 가장 기만적인 모습이다. 인권은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며 반동적인 것이다.

 바디우는 인권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죽어 가는 환자의 예를 통해 예리하게 비판한다. 인권이나 생명 윤리를 운운하는 의사는 이 환자가 자신이 다루어야 하는 환자인지 아닌지를 토론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고려 조건을 가지고 윤리적 상황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가 보기에 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이 환자가 치료를 요구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임상적 상황, 그 하나면 족하다.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할 필요 없이 의사로서 해야 할 일, 바로 치료를 하면 된다. 만약 환자가 치료를 요구하는 상황 외에 어떤 “윤리적 고려”가 필요하다면 그 자리에 의사가 아니라 경찰이 필요하다고 바디우는 조소한다. 175-176



6. 국가의 반격

-사회 운동의 범죄화와 끊이지 않는 전쟁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기업을 유치하여 일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국민을 공격하는 상황이 정당화되고 있다.(···)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국민은 국가의 적이며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이다.(···)

 한국에서도 테러와의 전쟁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생존권을 위해 저항하는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다. 2009년 1월에 용산 철거민 점거 농성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철거민 5명이 사망한 용산 참사 사건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참사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한국 정부의 태도이다. 한국에서 이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 그리스에서는 시위에 참가하였던 한 이주민 청소년이 총에 맞아 숨지면서 시작된 폭발적인 대정부 시위로 정권의 존폐가 위협에 처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경찰의 유례없는 강경 진압에 의해 희생된 농성자를 “도심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며 강경 진압을 정당화하였다. 180-182


 이처럼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은 국민을 시장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국민으로부터 지키는 것으로 극적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통치의 군사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통치의 군사화 뒤편에서 우리는 ‘통치의 실패’를 만날 수밖에 없다. 186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기 직전까지의 복지국가는 국민에게 “시장은 늘 불안하다. 너희가 시장에서 언제 퇴출되어 탈락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국민인 한에서 너희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국민’인 너희를 살게 하기 위해서 나는 너희에게 일자리와 교육, 의료와 기본적인 복지를 제공할 것이다. 대신 너희는 나에게 세금과 공권력을 바쳐야 한다.”는 약속을 하였다.(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 이렇게 시장이나 삶의 여러 가지 불안 요소로부터 국민을 지켜 준다는 약속을 통해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규율과 법률의 준수를 요구하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187


 푸코가 간파했듯이, 근대 국민국가 시대에 국가는 “기를 쓰고 국민을 살게 하여, (여기서 탈락하면)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국가는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기업을 최대한 유치하고, 시장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일 뿐, 직접적으로 일자리의 문제에 관여하는 일은 반시장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만일 자유 시장과 경쟁에서부터 오는 위험과 불평등함에 대해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자원을 스스로 알아서 동원해서 자기를 방어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면, 국가는 왜 필요하고 국민은 왜 세금을 내며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에 왜 동의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비경제적 영역에서 개인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과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공권력을 독점해야 한다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류를 국민에게 설득한다. 188-189



7. 탈락한 자들의 급진적 귀환

-조류독감, 광우병, 촛불의 급진성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합의와 동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다수결, 합의나 동의는 그 사회에서 이미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과정이다. 이에 반해 민주주의는 그 협상의 테이블 바깥에 놓인 이들, 그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가지지 못한 “아무개들”이 자기 몫을 주장함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주의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아무개들”이다.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자기 “몫이 없는” 아무개들이 능력이 없거나 시혜를 바라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많은 이들은 아무개들이 우리 사회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음에 주목하며 그들 역시 우리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 아무개들은 평등을 단지 “요구”만 하지 않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아무개들은 주장할 수 있는 능력,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한다. 아무개들의 동등함은 이들이 받아야 하는 “몫의 동등함”이 아니라, 이들의 “능력의 동등함”에 있다.

 랑시에르가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는 아무개들의 동등한 능력은 그의 책 <<무지한 스승>>에 잘 나타나 있다. 교육, 혹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목적은 해방이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뒤집어,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라는 평등의 전제를 이야기한다. 해방은 이 평등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스승의 역할은 “모든 보통 사람이 자신의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파악하고, 지적 능력의 진가를 알아보며, 그 능력을 쓰기로 결정”할 수 있도록 북돋우는 일이다. 또한 “한 명의 무지한 자가 이 일을 할 수 있었다면, 다른 무지한 자들도 언제나 이것을 할”수 있다. “무지에는 위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적 모험을 통해 스스로 유식하다고 하는 자들이 알지 못하는”, “지적 능력의 평등이 주는 혜택”을 널리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평등함을 통해 무지한 자들은 “아는 것을 넘어 행하게”되고 “행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소통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일”이며, 이 소통을 통해 “서로 공감하며 해방된 자들의 세상”을 꿈꿀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27-228


네그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 “제한 없는 민주주의”, “어떤 조건도 양보도 없는 민주주의”라는 “민주주의의 옛 의미들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근대의 민주주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근대 초기의 혁명가처럼 민주주의 개념을 ‘재창안’하고 새로운 ‘제도적 형식들과 실천들을 창조’하자고 제안”한다.

 네그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전 지구적으로 불만의 목록이 늘어 가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일국적이거나 지역적인 수준의 불만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의해 초래된 경제적 불만, 전쟁이나 생태 위기 등이 초래하는 “삶-정치”적 불만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적 항의 운동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전 지구적 항의는 삶의 도처에서 수많은 개혁을 실험하고 있다. 현재 상태에서 개혁에 대한 요구는 몇몇 근본주의자가 비판하듯이 혁명과 대립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변형의 역사적 과정”이 너무나 근본적이기 때문에 “개혁적 제안조차 혁명적 변화”에 이를 수 있다고 네그리는 주장한다.(···)

 네그리는 묻는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저녁”뿐인가?

 이 질문을 통해 네그리는 “삶-정치”의 출현에서 다중의 민주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그가 보기에 현재 우리의 삶은 이미 “삶-정치”적인 것으로 변하였다. “노동 자체도 네트워크화하여 네트워크 안에서 생산하고 혁신”한다. 네트워크 안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이어서, “자유로운 소통과 교류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처럼 노동은 “단지 재화만을 생산하지 않고, 협력과 소통을 생산”하며 “경제적 생산이 사회적 소통이며 정치적 의사 결정”이 되게 하고 있다. 네그리가 보기에 낮과 밤이 경제와 정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변화에 따라 낮도 밤도 그 자체로 정치적인 시간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처럼 공동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다중의 능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가능해진다.

 네그리의 논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다중의 잠재된 능력, 즉 활력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자본에 의해 끊임없이 포섭되어 죽은 것이 되지만 결코 죽지 않는, 이 다중의 잠재력이 활력으로 솟아나는 과정이며 그 결과이다. 네그리는 이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중의 민주주의”, 혹은 “절대적 민주주의”라고 한다. 229-231



* 나오는 말: 사유와 연대의 페다고지를 향하여


 나는 우리 시대에 두 가지 사유의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조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주의이다. 교조주의는 사유를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난다. 황우석 사건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성과에 대해 질문하고 진실을 추구하려고 하기보다는 진실이 폭로하는 결과를 두려워하여 사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불화를 인정하기보다는 억압하려는 교조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반면 상대주의는 쿨함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기를 거부한다. 너도 나도 다 다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얼마만큼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교조주의가 폭력적으로 보수적이라면, 상대주의 역시 딱 그만큼 패배적으로 보수적인 태도이다. 238


사유를 방해하는 교조주의와 상대주의의 밑바닥에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진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가 봉합이 불가능한 불화와 적대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적대와 불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냉소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포스트모던 사회를 공격하며 했던 말처럼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냉소주의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은 냉소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행한다.’였다면,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냉소적으로) 행한다.’이다.

(···)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은 어떻게 만나고 접할 수 있는가?(···) 신념의 실천이 영감을 준다.(···)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맞서야 한다.(···) 우리가 싸움을 지속적으로 이어 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착각과 먼저 싸워야 한다. ‘그들’ 빼고 ‘우리’는 대안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환상 말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사유가 필요하다.(···) 우리만큼이나 신자유주의를 따르는 자들도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돌보지 마라!”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만을 강조하는 그들 말이다.(···) 그들은 더욱 유연하고 재빠르고 과격하게, 급진적으로 진화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240-250

 

 

[밑줄] 엄기호,『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hwp


[밑줄] 엄기호,『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hwp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