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 선언에 대해 "서로의 진심이 통했고 정치권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합의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뒤 안 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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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40~50%p로 '부동의 1위'였던 안철수 교수는 5%에 불과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서울시장직 후보를 양보했다. 대한민국 정치역사에서 보기 드문 '그림'이다. 1987년 대선 김대중-김영삼 양김 분열 이후 지금까지 한국정치는 분열의 역사를 써왔다. 그런데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둔 이른바 '안박 단일화'는 신선한 충격을 국민들에게 안겨주었다. 안박 단일화는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이었다. 안철수 원장이 출마 고심부터 포기까지 하는 데는 딱 엿새 걸렸다. 두 사람은 앉자마자 20분 만에 담판을 지었다. 그 어떤 대가나 이면합의도 없었다고 한다. 재고 따지고 깎고 더한 끝에야 단 한 줄 토해내는 '여의도 정치'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 결과는 여론에 곧바로 반영됐다. 단일화 직후인 6일 CBS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과 야권 단일후보로 박원순 상임이사가 대결할 경우 나 의원은 41.7%, 박 이사는 37.3%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틀 전인 지난 4일 리얼미터의 조사에서 박 상임이사는 5.2% 가량의 지지율에 그쳤었다. 안철수의 통 큰 정치, 박원순의 콘텐츠 경쟁력 도대체 박원순 변호사가 어떤 사람이길래 안철수 교수는 10분간의 '발제'를 듣고 쿨하게 접었을까. 그는 1974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다 제적당했다. 사법시험을 봤고, 인권변호사가 됐다. 80년대 굵직한 시국사건 변론에 그는 빠진 적이 없다. 고 조영래 변호사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1995년, 그는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됐다. 시민단체로 출근하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변호사였다. 당시 참여연대 상근간사 급여가 60만 원이었는데 그는 그조차 받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참여연대 간사들에게 급여를 올려줄 수 있을까 골몰했다. 늘 전화통을 붙들고 구걸을 했다. "아, 선배님. 도와주세요." 그림도 팔고, 콘서트 티켓도 팔고, 기부금도 걷었다. 2000년, 낡은 정치 타파를 위한 '낙천낙선시민운동'을 벌였다. 그는 당시 낙선운동의 아이콘이었다. 마치 성직자처럼 '낙선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부패정치 추방을 외쳤다. 당시 부천의 낙선후보였던 이사철 한나라당 의원은 박원순 변호사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을 겨냥한 시민운동을 원망했다. 그는 늘 안주하는 삶을 못 견뎌 했다. 여유가 생기면 새로운 일을 꾸몄다. 신사유람도 좋아했다. 국내에 없는 것들을 해외에 가면 잘도 찾았다. 적용? 바로 한다.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늘 고단하다. 일단 아이디어 100개 깔고 시작하는 그 앞에서 '뺀질'거리는 것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은 주로 버스나 전철에서! 그 정도로 그는 열정적으로 일한다. 사람에게 열정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는 매사 열정으로 몸바쳐 일하는 스타일이므로. 누군가 지치면 다그치는 게 아니라, 달래고 왜 힘든지 묻고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 '거버넌스'가 가능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2001년 새로운 모색을 시작했다. 일단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는 멈추는 법이 없다. 그때부터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시작된다. 이른바 '에드보커시그룹' 형태의 권력감시운동, 영향의 정치보다 대중적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기부문화 확산'에 착목한다. 늘 재정 때문에 곤란을 겪는 시민단체를 도울 나름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좀체 보기 드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험을 시작했다. 곧바로 기부문화 전도사가 됐다. 아름다운재단을 만든 배경이다. 어찌 보면 박 변호사는 늘 재정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시민단체들에 합법적으로 재정을 만들 수 있는 통로를 연 셈이다. 캠페인 비용도 댔고, 10년 이상 활동해온 활동가들에게 안식도 제공했다.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아름다운 재단 모델에 이어 여성재단, 환경재단 등 시민사회에서 가지 뻗기가 시작됐다. 여기에는 기업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거의 모든 기업들이 아름다운재단에 동참했다. 같은 해. 해외에선 잘 알려진 '세컨핸드숍' 개념의 아름다운 가게를 창업했다. 이를 모태로 아름다운 커피 같은 사회적 기업까지 뻗어나갔다. 나눔과 순환, 지속가능한 삶의 새로운 대안경제에 골몰하기 시작한 게다. 박원순의 무한도전의 역사 | ▲ 서울시장 출마설로 주목을 받고 있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고 이소선 여사 빈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기리며 방명록에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좋은 세상 만들어 가겠습니다'라고 글을 적었다. | ⓒ 유성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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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누구? | [경력] 2008~ 대한민국 디자인 홍보대사 2007 봉은사 미래위원회 위원장 2006~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06 람사총회 홍보대사 2003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2003 검찰인사위원회 위원 2001~2009 아름다운가게 총괄 상임이사 2000~2009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2001~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운영위원장 1999 한국인권재단 이사 1996~2002 참여연대 사무처장 1986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1982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수상] 2009 불교인권상 2007 단재상 2006 막사이사이상 2006 만해대상 2003 이웃돕기 유공자 국민포장 2002 심산상 1998 한국여성단체연합회 여성운동상 [출간] <마을 생태가 답이다> 검둥소, 2011 <행복한 진로학교>(공저) 시사인북, 2011 <열혈청춘>(공저) 휴, 2011 <마을 회사> 검둥소, 2011 <올리버는 어떻게 세상을 요리할까>이매진, 2011 <우유곽 대학을 빌려드립니다>(공저) 21세기북스, 2010 <원순씨를 빌려 드립니다> 21세기북스, 2010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 한겨레출판, 2010 <마을이 학교다> 검둥소, 2010 <내 인생의 첫 수업>(공저) 두리미디어, 2009 <거꾸로, 희망이다> 시사인북, 2009 |
2006, 신개념의 싱크탱크를 시작했다. 이름하여 희망제작소다. 희망제작소는 '시민들에 의한 싱크탱크'라는 이름을 걸고 기존 정부연구소나 기업연구소와 전혀 다른 방식의 사업을 벌인다. 오로지 시민의 이익만 고민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거시담론보다는 생활의 발견에 해당하는 연구작업을 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역에 특화된 상품을 만드는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이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노하우를 전달해왔다. 지식경제부 산하 디자인진흥원과 손잡고 상품 디자인을 무료로 제공하고 시중은행을 통해 300억 원의 자금을 조달, 취약계층의 창업을 돕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청년실업, 중·노년실업, 여성실업 등 실업자 300만 명 시대를 헤쳐나갈 희망을 박원순 상임이사는 도전정신에서 찾았다"며 "최악의 불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라고 기술돼 있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면 더 이상의 위기는 없다는 게 박 변호사의 생각인 것. 대안센터, 공공문화센터, 조례연구소, 농촌희망본부, 주민참여클리닉, 자치재정연구소 등의 하부연구소를 통해 지방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실제 '새로운 지방자치 모델'을 연구하고 있었다. 서울시장 출마에 도전하기까지 박원순 변호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운동가였다. 주변엔 '걸어 다니는 아이디어뱅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와 함께 일하려면 적어도 3공파일 100개는 기본으로 깔고 시작해야 한다는 시민운동계의 전설도 있다. 한 해에 한 번은 반드시 지리산 종주를 떠날 만큼 산을 좋아한다. 시민운동가로 지낼 때도 늘 정치진출과 서울시장 도전을 권유받았지만 한사코 사양해온 그가 이번만큼은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까닭. 그는 8일 기자회견에서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가 서울시민들에게 내놓을 콘텐츠가 어떤 것인지 적이 궁금한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