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세트(전2권)
[독서감상] 박민규,『더블』
-『더블』에 대한 위화감과 박민규의 갱신 사이에서
박민규는 서태지와 함께 제게 창작에의 욕망을 지펴준 인물입니다. 사실상, 소설이라는 것이 ‘이렇게 재밌으면서도 의미심장한 것이 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해준 작가입니다. 제가 시험과 과제로부터 벗어나 자발적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준 작가이기도 하고요. 본 작은 그런 박민규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입니다.
박민규 빠돌이인 저는 당연히 본 작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고대하고 기대하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느끼게 된 위화감. 뭐랄까, 제가 박민규를 읽으면서 느꼈던 그 희열,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그 무엇이 이번에는 잠잠했습니다. 처음 박민규를 만나게 했던『카스테라』도 사실 ‘그다지’였는데『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삼미』)을 읽고 나서야 좋아하게 된 것처럼, 본 작도 나중에 다시 읽으면 다르게 될까 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 위화감에 대한 힌트를 얻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비평가 권희철이 쓴「아름다운 영혼이여, 안녕!」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박민규의 갱신을 발견합니다. 갱신은 “실패에 대한 충실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권희철은 박민규의 이전 작들이 영지주의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극단적인 선악이원론을 추구하며, 선과 악을 각각 영혼과 육체·물질에 배당한 뒤, 우리가 영지(靈智), 심오한 깨달음에 이르러서야 악으로 물든 육체·물질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선한 영혼의 세계로 진입하여 구원받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 “영지주의는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그 바깥 어딘가에 헛된 희망을 보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신 우위의 법칙과 육체·물질에 대한 혐오”가 뒤따르게 되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삼미』를 비판적인 고찰을 합니다. 간략히 말해『삼미』에서 말하는 “진짜 인생은 삼천포”라는 식은 “세속의 진부한 가르침들과 너무 닮”아 있고, “고매한 정신과 악마적 물질, 바깥으로의 구원의 약속이라는 영지주의적 이분법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지젝의 논의를 패러디하면서 ““삼미의 야구”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에서 오는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한 구제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 기능한다.(···) 현세의 비참함에 대한 상상적 보충물인, “인민의 아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권희철은 이러한 독해가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삼천포=진짜 인생’의 논리는 은연중에 비정규직의 삶을 받아들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유지합니다. 저 역시 현실적으로 ‘삼천포 인생론’이 이러한 맥락으로 흐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베버가 말한 ‘이념형’으로서 ‘삼미의 윤리’를 읽었습니다. 즉, ‘삼미의 윤리’가 ‘반(反)자본주의 정신’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결국 문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도래를 예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삼미의 윤리’가 ‘반(反)자본주의 정신’의 도래를 예견할 수 있는 지점에서 사유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이러한 도식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집니다. 베버의 것이 객관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 가능한 것인데 반해, 저의 것은 당위적이지요.
여하튼 권희철은 이러한 비판 이후『더블』에서 성취한 지점을 지적합니다. 그 핵심은 당연히 ‘영지주의의 유혹으로 부터의 극복’과 관련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고 싶은 유혹에 박민규의 소설이 더 이상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더블』의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박민규가 어떤 실패의 지점에 다다른 인물들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없게 묶어두고, 이 현실의 실패, 바로 그 자리에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묻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왜 본 작을 읽고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즉, 박민규가 유토피아를 제공해주지 않아 저로서는 답답한 심정이었던 것이지요. ‘빛’이 되는 ‘비전’을 보지 못했기에. 권희철은 박민규가 “사회 현실 속에 숨겨진 음모의 폭로와 탈출 매뉴얼 제시”로서의 ‘소설의 사회학’에서 ‘소설의 인간학’이라는 전향을 통해 미개척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평합니다. 그는 “영지주의-민주투사의 노선으로부터의 이러한 이탈의 결과가『더블』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판단 앞에 저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지젝이 움베르트 에코의『장미의 이름』의 ‘희극론’을 비판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해방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희극’이 실은 비극적 현실(후기자본주의)을 완전하게 해주는 보충물이라는 것이지요. ‘계몽된 허위의식’인 ‘냉소적 이성’을 비판한 슬로터다이크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냉소의 시대에 철학은 장바닥으로 내려와, 무례함과 뻔뻔함을 가지고 냉소를 냉소해야 한다(진중권)”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봅니다. ‘만약 내가 박민규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그 작품이『더블』이었다면 그래도 혹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더블』은 저를 지나친 수많은 작품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며 바둥거리게 되지도 않았겠지요. 사실『카스테라』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박민규의 장편소설들을 읽고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하고 나서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 개개인의 취향과 지향이 차이가 있다는 전제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방법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회 현실 속에 숨겨진 음모의 폭로와 탈출 매뉴얼 제시”는 ‘계몽’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계몽’을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계몽’이 근본적 변화를 오히려 억압하는 대리만족으로서의 보충물이라는 성격이 분명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저의 관계에 대한 매끈함을 의심하고 위화를 느낀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을 통해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신체의 지혜’(견유주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깐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 되겠지요.
빠르게 읽은 뒤 책의 무덤에 던져 놓았던『더블』을 다시 꺼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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