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

[독서감상] 박민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두괴즐 2011. 7. 14. 10:56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저자
박민규 지음
출판사
예담 | 2009-07-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세상 옆에 들러리 선 우리의 자화상! 스무 살, 특별한 그녀와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에게 이상형을 물어올 때면 대응하던 몇 가지 방책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 중 ‘북극여우’타령을 하고 있다. ‘잉? 북극여우라니?’ 하겠지만 인터넷 검색창에 ‘북극여우’라고 쳐보면 나의 속내를 상당 부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북극여우는 귀엽고 예쁘다. 새하얀 북극의 눈 속에서도 빛나는 하얀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 눈웃음은 북극의 눈도 녹 일만큼 달콤하다. 그런데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냥 예쁜 생명체가 아니라 ‘여우’라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여우는 동물의 고기를 냠냠 씹어 먹고 사는 육식동물이다. 그러니깐, 내가 “아이고 예뻐”하고 머리를 쓰다듬다가는 “끄아악~!! ㅠ.ㅠ”하게 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안달나게 만드는, 상당히 치명적인 그런 사람이 좋다. 사실, 사랑에 빠지면 안달나고 치명적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심정이다.


 ‘북극여우’라고 해서 ‘오호라!’했겠지만, 사실 보통 남자들이 이상형이라고 얘기하는 정형화된 답변인 “예쁘고, 착한 여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냥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 것뿐이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치명적 위험성에 대한 요구인데, 이것은 나의 연애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쨌거나 살다보니 ‘이런 나라도’ 좋다는 ‘사랑구제위원급의 여성’이 두 분 계셨는데 나는 그녀들과 사랑에 빠졌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 연인의 관계에서 강자란 우습게도 덜 사랑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두 차례의 연애경험 동안 나는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고, 내 여친은 정말이지 나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사랑의 시작도 나에 대한 여자 쪽의 끊임없고 달콤한 구애로 가능했었다. 나는 정말이지 어지간해서는 사랑에 눈을 뜨지 못하는 봉사였던 셈이다.


 나는 달콤한 구애 덕에 사랑의 눈을 뜰 수 있었지만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나의 양심과 계속해서 부딪쳤고 우리의 사랑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후적으로 이렇게 판단하고 있지만, 연애를 할 당시에는 “정말이지 꼴깝떠네.”라던가 “아놔, 인류를 닭으로 만들 셈이냐.” 따위의 핀잔을 심심찮게 들었다. 나 역시 좀 미쳐있었고, 사랑은 원래가 좀 미친 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 지속의 정도가 문제가 됐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여친의 끝없는 사랑의 상승곡선과는 달리 나는 로봇화 과정을 밟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물론 내가 나쁜 놈이었다는 건 맞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식은 사랑을 부여잡고 연기를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깐.


 연애기간 동안 여친은 가끔씩 “꼭 예쁘게 하고 와야 해.”라고 요구하곤 했다. 그런 날은 여친의 측근에게 나를 자랑하는 날이었다. 사실 뭐 내가 그렇게 자랑할 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여친의 측근들에게 나는 상당히 팔리는 존재였던 것 같다. 뭐랄까, 앵기기 좋아하고 폼잡지 않는 그런 나의 모습은 남자에게 상처받은 그녀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특별한 무언가도 ‘나’ 자체라기 보단 여친의 측근들이 ‘이미지화 한 나’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친이 아닌 타인에게도 의외로 사랑받는 존재였고, 그 타인이 여친의 측근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곤 했을 때는 극도의 의처(부)증에 시달렸다. 내가 사랑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불안해했던 것만큼이나 그녀는 내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나의 인간관계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가게 됐다. 나의 두 차례 연애는 너무나도 똑같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고, 사랑에 대한 열등감에 여친의 불안이 더해지면서 나는 정말이지 지치게 되면서 포기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강자(더 사랑받는 것)가 좋다는 것을 앎에도 불과하고 사랑에 있어서 약자(덜 사랑받는 것)이고 싶은 나의 욕구는 이런 나의 연애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별 시답잖은 내용으로 서론을 구질구질하게 한 것 같다. 정화가 필요한 상황이니 박민규 형님을 불러보자.


 ······.


 아, 부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안 맞았다. 왜냐하면 서론이 시답잖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정리를 해보면, 나는 외모 덕에 연애에 있어서 강자가 되었다는 생각이고 내 여친은 그 덕에 우월감과 불안감을 함께 안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에는 결국 다른 성격일지라도 ‘열등감’이 그 근저에 깔려있었다는 것인데 자,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불러보자.


 결국 열등감이란 가지지 못했거나 존재감이 없는 인간들의 몫이야. 알아? 추녀를 부끄러워하고 공격하는 건 대부분 추남들이야. 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 거지. 안 그래도 다들 시시하게 보는데 자신이 더욱 시시해진다 생각을 하는 거라구. 실은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데 말이야.(····) 보잘것없는 인간들의 세계는 그런 거야.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봐줄 수 없는 거라구. 그래서 와와 하는 거야. 조금만 이뻐도 와와, 조금만 돈이 있다 싶어도 와와,(···) 결국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면서 결국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거야.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야.(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p.220-221) 


 이건 뭐, 좀 너무한 발언이 아닌가 싶은데, “평생을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한다는 말에는 그저 할 말이 없어진다. 결국 부러워하는 것과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과 누구를 비교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그 대상은 항상 자신보다 예쁘고 멋진 존재이기에 열등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쨌거나 살아가야 하므로 자신보다 못한 무언가와 비교하면서 안도하고 자위하는 것이다. 박민규는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좆밥들의 태도가 이 시대가 작동하는 원리임을 고발한다.


 너도 나도... 세상의 모든 아미고들은 이쁜이들을 좋아하게끔 만들어졌다고.(···) 그런거라니까, 지구 반대편의 여배우에 빠져 팬레터를 쓰는 게 아미고들의 운명이야.(···) 티브이에 나온 언니를 쫓아다니고, 함성을 지르지만 뭐 그 언니는 사랑해요 여러분... 하겠지만, 그 언니가 사랑할까?(···) 그건 너무 바보 같잖아요. 몰랐어? 모두 바보란 걸?(···) 아미고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실은 가질 수 없는 거거든. 가질 수 없으니까 열광하는 거야. 세상의 걸들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하녀라 해도, 어쨌거나 신데렐라가 왕궁에 가는 이유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한 거니까... 설사 시간이 지나고 꿈이 깨진다 해도 그 전까진 꿈을 꾸는 게 인간인 거야. 그래서 걸들도 열광을 하는 거야.(···) 물론 오빠들도 고마워요, 또 여러분 사랑해요... 하겠지만 오빠들이 과연 걸들을 사랑할까? 마찬가지지. 실은 가질 수 없기 때문이야. 너와 나... 이런 아미고들과 걸들은 말이야... 그래서 좆밥이야. 세상의 좆밥들이지. 정말로 그런 오빠를 얻을 수 있는 언니들은 말이야, 또 그런 언니를 만날 수 있는 왕자들은 말이야... 서로에게 열광하지 않아. 왠지 알아? 시시하기 때문이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건 누구에게나 시시한 거니까. 뭐, 그래도 좋은 거야. 돈만 주면 뭐든 하겠다는 인간들이 널린 게 사실이고, 윙크 한 번 날려주면 페이를 지불할 인간들도 널린 게 사실이니까. 문제는 바로 아미고들과... 걸들이지. 가질 수 없는데도 허구한 날 히죽대는 거야, 만날 수 없어도 허구한 날 박수를 치고 와와 하는 거지. 어머 왜들 이러실까 소릴 들어도... 하는 거야, 해서 저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거지.(···) 아미고인 너에게 차가 생겼다면 저들은 대체 얼마를 벌었을지... 걸인 네가 이 정도로 예뻐졌다면 저들은 대체 또 얼마나 예뻐졌을지... 그러니 내버려두라고, 설령 마법을 만든 게 저들이라 해도 그 마법을 유지하는 건 다 같은 좆밥들이야.(p.104-106)


 그야말로 속사포 같은 잔소리 아닌가? 뭔가 대들고 싶은데, 역시나 별 할 말이 없다. 뭐,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건 나중에 하겠다. 사실 지금 박민규의 시선을 고분고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의 경험담이었던 서론을 배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박민규 입장에서는 배신하거나 말거나 나몰라라겠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잔소리쟁이 박민규의 종착점은 ‘사랑’이다.


 신은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거야.(···) 바로, 사랑이지.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다니는 고린도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p.228)


 박민규는 남들보다 더 가지고, 더 강해지고, 더 높은 곳에 자리잡는 것이 현명한 윤리관으로 정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 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p.224)


 박민규는 자신의 작품세계 속에서 인간보다 우선시 되는 자본의 세계관을 비판해 왔다. 그리고 본편에서는 사랑으로 균열을 일으키고자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재밌었고 즐거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답답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에서 박민규가 말하는 사랑은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그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말하자면 죠다쉬를 입은 고등학생의 <멋있어>와,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이를테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 상상이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 태양이 돌잖아? 해도 와와 하지 않고, 미리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거야.(p.226-227)


 자, 이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상기해보자. 그렇다. 믿을 수 없이 못생긴 여자와 ‘가까워지고 싶은 남자’ 투표 1위의 훈남과의 연애이야기다. 이쯤되니까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규정될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사랑도 <손해> 감수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비위에 거슬리긴 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일반적인 사랑’은 보다 나은 상품으로서의 대상자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도 더 나은 상품으로 보이기 위해 끊임없는 치장의 유혹에 시달린다. 결국 ‘나이’라는 유효기간의 절대적 힘 앞에서 눈높이를 낮추게 되고, 비록 기대 이하의 상품이라도 현실적 합리화 과정을 통해 극복해간다. 물론 당신이 외모나 조건 따위를 전혀 보지 않는다면 이미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정말이지 그 누구도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의 사랑의 역사는 오히려 나의 눈높이를 높이게 했고, 외로움이란 아슬아슬한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게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사랑도 자신의 경험 때문에 얻게 된 가치관 아니던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엄마를 보면서 자랐기에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외롭다며 징징대는 나에게 통렬한 한방을 먹인 선배가 있다. 그 형은 나에게 “몇 년 더 썩어보면 정신이 차려질 거다.”라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물론 이 메커니즘은 외로움의 증폭으로 나의 눈높이가 낮아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 형의 논리는 ‘당연히 문제는 눈높이’이다. 그런 형에게 나는 눈이 높지 않다는 둥, 외모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둥, 문제는 눈높이가 아니라 영혼의 겹침이라는 둥 했지만-정말 그런걸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헐~ 뻥치시네’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몇 차례 헌팅을 당한 경험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 번도 연락처를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형은 “너는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그런 애들을 혐오스럽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네가 연락처를 주지 않았던 이유도 여자애들의 외모 때문 아니냐?”라고 했다. 그러니깐 “걔들 중에 니가 진짜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가 있었어도 연락처를 정녕 안 줬을까?”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고 별 착한 척은 다하지만 실상 나는 ‘되게 가식적인 놈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대적 상상력 너머를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물들어 버린 상태에서 나를(그리고 사회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욕망이라는 것이 사고적 차원이 아닌 신체적 차원에 까지 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적 깨달음으로 단번에 넘어 서기에는 신체에 각인된 욕망의 족쇄가 너무나 무겁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와 ‘그녀’의 사랑에 매혹을 느끼고 즐거웠던 만큼이나 ‘만두’를 보면서 안타까운 몰입과 공감을 가졌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평생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드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작동시키는 조건의 향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밀어내는 조건을 대신할 큐피트의 충만함이 정녕 나의 신체 속에서 가능한 걸까.


그러니깐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혀 자신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