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밑줄] 김규항, 『예수전』

두괴즐 2011. 6. 25. 10:35

[밑줄긋기] 김규항, 『예수전』


제 1장


율법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는 존재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들을 매우 꼼꼼하게 명령했는데, 그 명령을 잘 따르면 기뻐하고 상을 주었지만 어기면 크게 화를 내며 벌을 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배치되는 사람들이나 사회에 대해선 매우 차갑고 잔혹했다. 온 인류의 보편적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유일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젖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타적인 민족 신으로서 하느님어었던 셈이다.

(···)

예수는 그런 하느님상을 뒤집는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예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누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며 우리와 대화하려 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행여 진노할까 두려워 엎드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비로소 율법의 굴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인민들과 만났다. p.31-32 (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p.38-39


 그러나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자는 죄가 있어서 하느님의 벌을 받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성 질병 환자일수록 하느님께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여겨진 건 물론이다. 그런 사고방식 속에서 만성 질병일 뿐 아니라 외관마저 흉하게 일그러지는 ‘나병’(오늘의 한센병을 포함하여 좀더 넓은 범위의 만성 피부병을 뜻한다) 환자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 병자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보태어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인간적·사회적 고통을 받아야 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모든 사람이 가족이나 지역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제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인하던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건 죽음과 같았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일은 단지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던 삶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p.39-40


제 2장


로마가 이스라엘인을 지배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도 그 선민의식이었다. 로마가 점령한 모든 나라들은 로마의 힘과 문명에 압도되었지만 유독 이스라엘인들만은 로마를 자신들보다 격이 낮은 이방인들이라고 여겼다. 이스라엘인들은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건 감수해도 제 선민의식을 훼손당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저항했다. 로마는 그런 선민의식을 우회하는 좀더 현명한 지배방법을 필요로 했다.

(···)

로마는 성전을 그 매개로 삼았다. 솔로몬 왕 시절에 처음 만들어진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의 상징이었다. 성전 한가운데 지성소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었으며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대제관(대제사장)만 그곳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권위도 성전을 넘어설 순 없었다. 로마는 성전의 그런 권위를 직접 건드리지 않는 대신 성전의 우두머리인 대제관의 임명권을 가졌다. 대제관은 유다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산헤드린의 의장을 겸했다. 로마는 그렇게 선민의식에 젖어 도무지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스라엘인들을 좀더 손쉽게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었고, 로마와 결탁한 성전 지배세력은 엄청난 권력과 기득권을 가질 수 있었다. 성전은 단지 성전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

예수는 성전의 그런 권위를 대놓고 반박하기 시작한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겠다는 말은 자신이 성전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대행자 권한을 독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소통에 성전이 필요 없다는 선언이다.(···) 하느님은 권위가 가득 찬 왕처럼 근엄한 얼굴로 성전 지성소에 거하며 비천한 인민들과 직접 만나길 거부하는 분이 아니라 늘 인민의 삶 속에 함께하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는 것이다. p.43-44


바리사이인들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사회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하느님이 주신 율법, 즉 토라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인민들에게 율법주의는 재앙이었다. 그 세세한 율법을 다 지키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바리사이인들 덕에 인민들은 ‘죄 없는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런 현실에 체념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켜야만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예수는 그 체제를 깨트리기 위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다. “의사는 건장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는 오로지 율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의 사랑이 닿는다고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p.48-49 


금욕적이며 지사적이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 자주 단식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예수와 그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았다.예수는 단식은커녕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 루가 7:34)라 불릴 만큼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다. 명색이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새로운 질서를 선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느님은 화난 얼굴로 우리를 심판하려고 벼르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잔치를 벌여 놓고 웃는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는 분입니다. 왜 우리가 굳은 얼굴로 단식을 해야 합니까? 기쁜 얼굴로 잔치에 참여합시다. 고단한 이웃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위로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p.52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여종뿐 아니라 소와 나귀와 그 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시명 5:13~15) 그런데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조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안식일을 어기니 죄인이라 말했다. 안식일은 ‘쉴 수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날’이 되어 버린 것이다.

(···)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면서 밀 이삭을 떤 것은 율법적으로 추수 금지, 타작 금지, 키질 금지, 음식 장만 금지의 네 가지 조항을 한꺼번에 어기는 행동이었다. (···)예수에게서 뭔가 꼬투리 잡을 기회를 노리던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에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따졌다. 예수는 그들에게 정면으로 반박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안식일 논쟁을 넘어 율법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p.55-56


제 3장


바리사이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까지 하면서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나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는 바리사인인들보다 적지 않았지만 먹고사느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라사이인들 앞에서 죄의식과 열등감에 젖어야 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단 한 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p.58-59


예수의 말은 고통받는 사람과 죄인들이 지배계급이 누리던 부와 권력을 빼앗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p.62-63


"열혈당원“은 로마에 대해 무장 항쟁을 벌이던 ‘젤롯당’의 일원을 말한다. 그들은 나중에 벌어진 유다전쟁의 주역이기도 하다.(5:1~20 강독 부분) 아직 전쟁을 일으킬 만큼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예수의 제자 가운데 젤롯당원이 있었다는 사실, 말하자면 예수가 젤롯당원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것만 갖고 예수와 그의 운동이 폭력적 노선을 걸었다고 주장할 순 없지만,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없이 유순하기만 한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실 그런 오해들은 ‘평화’에 대한 오해와 관련되어 있다.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p.65-66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p.69


제 6장


7 또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둘씩 둘씩 파견하시기 시작하며, 더러운 영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그들에게 주셨다. 8 아울러 그들에게 명하시어,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가지 말 것이니, 빵도 자루도 전대에 돈도 갖고 가지 말고, 9 다만 샌들은 신되 “속옷은 두 벌 껴입지 마시오” 하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소유 원칙’을 명령한다. 무소유는 영적 자유를 위한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에게 동거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가진 게 많을수록 영적 자유는 적어진다. 또한 무소유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근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한 사회의 빈곤이나 기아가 대개 식량이나 재화가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고르고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두 고르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 p.98-99


24 “어느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실상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경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여러분의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은 음식보다 더 소중하고 몸은 옷보다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26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십니다. 여러분이야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27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릴 수 있습니까? 28 여러분은 왜 옷 걱정을 합니까? 들의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눈여겨보시오. 그것들은 수고하지도 않고 물레질하지도 않습니다. 29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그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습니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여러분이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32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다 여러분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33 여러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은 그 나름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그날 괴로움으로 족합니다.” (마태 6:24~34)

(···)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예수의 말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유대교 체제는 물질적인 부를 하느님의 축복이라 가르쳤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고는 물론 유대교 지배세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 지배세력은 매우 호화롭고 안락한 삶을 구가했다. 그들은 로마와 결탁해 있었고 부자와 귀족 유다인들의 대변자였다.(···) 그들이 부를 구가하려면 그들의 부가,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세력의 부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리고 ‘부’가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질 때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가 되어 버린다. 예수는 그걸 뒤집는다.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예수의 말은 결국 하느님은 부자의 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편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내세워 맘몬을 섬기는 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하느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라고 말한다. p.99-102


이 에피소드는 이른바 ‘나눔’에 대한 우리의 알량하고 가식적인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당장의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긴급한 조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것이며, 하느님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고루 나누어 쓰라고 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사적으로 소유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모두 함께 풍요롭고 만족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그런 변화를 위한 실천이며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나눔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예수는 그 사실을 ‘오병이어의 이적’이라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 준다. p.109-111


제 7장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 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

바리사이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적당한 열정과 적당한 순수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지간한 사회 개혁의 실천으로, 지배세력의 폭압이 혁명의 불길로 번지는 걸 차단하고 인민들의 변혁 의지를 중화하는 체제의 안전판이었다. 예수는 놀라운 통찰로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p.117-118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은 ‘영성’이라 할 때, 역사 속에서 혁명과 영성의 편향은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이를테면 20세기에 ‘영성 없는 혁명’에 빠져들었던 수많은 투사들은 제 영성의 빈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로 정반대의 편향에, ‘혁명 없는 영성’에 빠져들어 있다. 그들은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밖의 적은 허상일 뿐이다!’라고 외친다.

(···)

먹고사는 데 절박하지 않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정한 안정을 가진 그들에게 밖의 적은 허상이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밖의 적에 의해 삶을 위협받는 수많은 사람들, 도무지 내 안을 되돌아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건 허상이려야 허상일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적이 밖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도 있었다. 나는 절반의 싸움만 해 온 셈이다. 두 가지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 p.122-123


제 10장


그러나 예수는 단지 그런 기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부 자체에 대해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부는 능력과 노력의 결과인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와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자발적으로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느님 나라에 들이시지 않는다.

(···)

제자들의 반응에서 보듯 예수 당시에도 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주가 만연한 세상을 향해 ‘부자는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p.161-163


제 11장


‘성전 정화’ 사건이라 불리는 이 에피소드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 가운데 가장 소란스러운 것이다.(···) 성전의 뜰에는 ‘정결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로 넘쳤는데 그 양과 비둘기 가격은 여느 양이나 비둘기보다 수십 배나 비쌌다.(···) 물론 그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과 결탁해 있었고, 그 막대한 수익의 대부분은 대제관을 비롯한 성전의 고위층에로 흘러 들어갔다.

(···)

 타락했지만 ‘그래도 성전인데, 그래도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인데’하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성전이나 제관들에게 대항하는 건 마치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말은 성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에 대한 ‘부인’이다. 예수는 그 성전이 ‘문제 있는 성전’이 아니라 ‘성전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은 성전 지배세력을 향한 공격이자 성전 체제의 권위에 눌려 침묵하는 인민들을 일깨우는 퍼포먼스였다. p.179-180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한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성전 뜰에서 그의 생애 중 가장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 예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용서를 말한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낸다.

(···)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p. 188-189


제 12장


예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해 기독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어 온 서양 세계에서 하느님은 우리 삶과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곽에서 절대적인 힘으로 우리 삶과 세계를 마음대로 관장하는 존재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런 존재라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은 그가 자행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묵인 아래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과연 하느님은 이런 정신적 참극을 벌이게 하는 그런 존재일까?

(···)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 1:27) 물론 여기에서 ‘모습’은 눈, 코, 입 같은 외적인 생김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지어졌다는 말이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세계의 외곽에서 우리를 절대적 힘으로 관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 ‘본디의 나’로 살아 있는 하느님인 것이다.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을 자행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불의와 학살과 기아와 참상 속에서 고통받는 분인 것이다.

(···)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지금 내 삶을 지배하는 온갖 부질없는 집착과 욕망들을 씻어 내고 내 본디 모습으로, 하느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p. 201-203


예수가 말한 이웃 사랑은 예수의 말 그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경계 지어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를 없애는 데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p. 203-205


제 13장


‘개발독재의 원조’ 헤로데 왕(BC 37~34)은 폭압적인 통치를 하는 한편 온갖 대형 토목공사로 인민들의 환심을 사려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 공사였다.(···) 성전은 가로 300미터 세로 480미터의 크기로 모두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렸고, 외면의 상당 부분이 황금으로 칠해졌다. 성전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그러나 예수는 제자가 무안해할 만큼 차갑게 ‘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도 아니며 외세와 결탁해 인민을 억압하고 벗겨 먹는 “강도들의 소굴”일 뿐이다. 휘황한, 누구나 찬탄하는 아름다운 외양은 그 강도짓을 위한 장식일 뿐이다. 강도의 소굴은 그저 강도의 소굴로 여겨져야 한다. 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