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

[밑줄]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두괴즐 2011. 6. 25. 10:28

[밑줄긋기]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스파이크>


 그들 사이엔 대화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우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영혼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거창한 주제다. 다음 끼니가 확실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건 다음 끼니뿐이다. 14쪽.(강조는 인용자, 이하동일)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15-16쪽.


 식사가 끝나자 주방장은 내게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을 버리라고 했다. 음식쓰레기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쇠고기로 만든 굉장한 요리들, 그리고 들통 몇 개 분량의 빵과 채소가 쓰레기처럼 내버려진 채 다 우려낸 찻잎으로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은 음식으로 넘쳐나도록 채워넣은 쓰레기통은 5개나 되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나의 동료 부랑자들은 200야드 떨어진 스파이크에 앉아 여느 때와 똑같은 빵과 차로, 그리고 잘하면 일요일이라 특별히 나오는 차가운 삶은 감자 2개로 배를 반쯤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남은 음식을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고 버리는 건 고의적인 방침인 듯했다.

 (···)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요.” 그가 말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때어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여기 이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려고 안 하지. 다들 그래서 저 꼴이 된 거라니까. 그런 사람들 격려해줄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6-19쪽.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부르주아는 납작 엎드려 있거나 일부러 노동자로 위장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중에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공산주의자와 우파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자, 정부는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부르주아는 은신처에서 나왔으며, 이전의 빈부격차는 거의 바뀌지 않고 재현되었다.(···) 불가피한 경우 몇 번을 제외하면 모든 게 처음 몇 달 동안의 혁명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사례가 많지만 딱 하나만 들어보면, 정말 민주적으로 조직되어 장교와 사병이 같은 급료를 받고 완전히 평등하게 한데 섞여 지내던 노동자 민병대가 해체되고, 최대한 일반 부르주아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장교의 특권이 대단하고 급료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등등의 대중군으로 대체됐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군사적인 필요성 때문이라는 발표와 함께 이루어졌고,(···) 같은 정책이 모든 부문에서 이어지더니, 전쟁과 혁명이 발발한 지 고작 1년 만에 결국 이룬 것이란 사실상 일반 부르주아 국가였으며 거기다 ‘현상 유지’를 위한 공포정치가 더해졌다. 56쪽.


 자본가들도 언젠가부터 공산주의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감에 따라 공산당의 영향력은 커지게 마련인 까닭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은 파시즘에 대하여 꽤 실질적인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사람들을 겁주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파시즘이 자본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 척하는 방법도 쓴다. 파시즘은 정신병원 하나 가득한 살인광들을 갑자기 풀어놓았을 때나 벌어질 수 있는 무의미한 악행이요 일탈이요 ‘집단 사디즘’이라는 식이다. 그들은 파시즘을 그런 식으로 비춤으로써, 적어도 당분간은 혁명적인 움직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파시즘에 반하는 여론을 조성할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로 파시즘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단, 그러는 동안 파시즘이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나 그게 그거라고 지적하는 말썽꾼을 제거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라 부르기 시작한다. 지금은 혁명에 대한 미사여구나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너무 따질 게 아니라 함께 파시즘에 맞서 싸울 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입 다물기를 거부하면 나중에는 어조를 바꾸어 그를 배신자라 부르기 시작한다. 58-59쪽.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권력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64쪽. 63-64쪽.



<마라케시>


 유대인에 대해 흔히들 하는 험담은 아랍인들뿐 아니라 형편 좋지 않은 유럽인들에게도 듣게 된다.

 “그 인간들이 내 일자리를 뺏어다가 유대인한테 줘버렸다니까요. 유대인들이 그래요! 이 나라를 진짜 지배하는 건 유대인이라니까요. 돈은 그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 은행이고 재정이고 뭐고 다 주무르지요.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시간당 1페니밖에 못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 아닌가요?.

 “아, 그건 쇼일 뿐이에요! 알고 보면 전부 돈놀이하는 사람들이지. 유대인들이 얼마나 교활한데.”

수백 년 전에 변변한 끼니 한번 마련할 만큼의 마술도 못 부리던 불쌍한 여인네들을 마녀라며 태워 죽였을 때도 그런 식이었다. 71쪽.


 그것은 수줍어하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실 깊은 존경심이 드러나는 흑인의 표정이었다.(···) 숲에서 끌려와 바닥 청소나 하고 기지촌에서 매독에나 걸리게 될 이 불우한 소년은 정작 하얀 피부 앞에서 존경의 감정을 내보였다. 그는 백인종이 자신의 주인이라 배웠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 군대의 행군을 보면 어떤 백인이든 품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저들을 골려먹을 수 있을까? 얼마나 있으면 저들이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약아서 말은 안 하는 그런 유의 비밀이었다. 모르는 건 흑인들뿐이었다. 75쪽-76쪽.



<영국, 당신의 영국>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대단히 문명화된 인간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며,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흔히 말하듯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인 것이다. 나는 그들 대부분이 사생활에서는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꿈도 못 꿀 선량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시민임을 의심치 않는다. 반면에 그들 중 하나가 폭탄을 잘 떨어뜨려 나를 산산조각 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가 그 때문에 특별히 잠을 못 이룰 리도 없을 것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힘을 갖는다. 애국주의, 즉 국민적 충심이 갖는 압도적 힘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볼 수는 없다. 87-88쪽.


 하지만 영국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유용성이 다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그냥 도적떼로 돌변해버리는 게 불가능했다. 이를테면 미국의 백만장자들처럼 알면서도 부당한 특권에 집착하고 뇌물과 최루탄으로 반대파를 찍어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실은 동포들을 약탈해 먹고산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진정한 애국자라 ‘느껴야만’ 했다. 그들의 탈출구는 딱 하나뿐이었으니-바로 어리석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사회를 기존의 양상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110쪽.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정서는 몇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신문을 보면 당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불만 가득한 태도와, 언제나 건설적인 제안이라곤 없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잡아본 적도 없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트집 잡기 말고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 것이다.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사상의 세계에 살며 물리적인 현실과는 접촉이 별로 없는 사람들의 정서적 피상성이다. 좌파 지식인들 다수가 1935년까진 맥없는 평화주의자였고, 독일과의 1935~1939년 전쟁에 대해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전쟁이 시작되자 금세 조용해졌다. 스페인내전 당시 가장 ‘반파시스트’적이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가장 패배주의적이라는 건, 꼭 그렇진 않지만 대체로 맞는 말이다. 116쪽.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공군력을 세계연방 차원에서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은 무슨 소용인가? 문제는 결국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다. 세계국가가 바람직하다고 지적하는 건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 건 5대 군사대국 중 어느 하나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각 있는 사람들 모두 웰스 씨가 하는 말에 기본적으로 공감해왔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들은 아무 힘이 없으며, 기질적으로 스스로를 희생시킬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지난 한 해 동안 영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준 게 무엇인가?(···) 주된 것은 애국심이라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125쪽.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137쪽.


나는 ‘파시스트’를 쏘러 거기까지 갔던 것이다. 바지를 추스르며 내닫는 병사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같은 인간으로 보였으니, 그런 사람을 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141쪽.


장교는 무슨 이유에선지 당장 피부색 짙은 그 소년을 도둑으로 지목했다. 민병대는 절도에 대해 상당히 엄했으며, 원칙상으론 총살도 가능했다. 불쌍한 소년은 순순히 위병실로 따라가더니 몸수색에 응했다.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시도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 상황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서, 나는 그가 얼마나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시가도 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훔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건 그가 결백이 입증되었음에도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몇 분 동안 나는 그가 도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그가 받은 상처는 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42쪽.


 나는 꽤 어릴 때부터 어떠한 사건도 신문에 정확히 보도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었는데, 그러다 스페인에 가서 처음으로 신문이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을 보도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일상적인 거짓말에서 은연중에 내비치기 마련인 최소한의 관련성조차 없는 보도였다. 나는 싸움이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대단한 전투가 있었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았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완전히 침묵하는 것도 보았다. 용감하게 싸운 부대원들을 비겁자나 반역자로 몰아세우는 것도 보았고, 총성 한번 못 들어본 이들을 상상의 승리를 거둔 영웅으로 마구 치켜세우는 것도 보았다. 또한 런던의 신문들이 그런 거짓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도 보았고, 열성적인 지식인들이 일어난 적도 없는 사건에다 감정적으로 살을 붙이는 것도 보았다. 145-146쪽.


 전쟁의 잔혹함과 더러움과 헛됨을 생각하다보면 꼭 발설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는 말이 한마디 있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자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153쪽.


그들은 모두 무언가 잃을 게 있는 사람들, 또는 계급사회를 염원하고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인 것이다. ‘신을 부인하는’ 러시아니 노동계급의 ‘물질주의’니 운운하는 과대 선전의 배후에는 매달릴 돈이나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단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마음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사회 재건은 무가치하다는 식의 얘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꾸는 게 훨씬 더 안심할 만한 방법인 것이다.(···)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그런 파렴치한들 입장에선 없으면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싶을 최소한의 불가결한 것들이다. 충분한 식량, 지긋지긋한 실업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자기 자식들은 공평한 기회를 누릴 것이라는 안심, 하루 한 번의 목욕, 적당히 자주 세탁된 깨끗한 시트, 새지 않는 지붕, 일과가 끝나고 나서도 약간의 에너지가 남을 정도의 짧은 노동시간인 것이다. ‘물질주의’에 반대하며 설교하는 자들 중에 그런 것들 없는 삶이 살 만하다고 생각할 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인류의 진짜 문제에 접근하자면 그전에 궁핍과 가혹한 노동부터 철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며, 보통의 인간이 소처럼 노역에 시달리거나 비밀경찰 때문에 떨고 있는 한 그런 문제에 접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158-159쪽.


<문학 예방>


 진정한 자유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그런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애쓸 때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공산주의 명제를, 알 만한 사람은 대부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슬쩍 끼어드는 게 있으니, 공산당이 계급 없는 사회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당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소련에서는 그런 목표가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226쪽.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다.(···) 창의적인 작가는 자신의 관점에서는 사실인 주관적인 감정을 조작해야만 할 때,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자기가 뜻하는 바를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비틀고 풍자할 수는 있어도,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곡해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면, 결과는 그의 창의력이 고갈되는 것뿐이다. 그가 논란이 될 만한 주제를 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231쪽.



<행락지>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 때문이다. 행락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 중 상당수는 의식을 파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인간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면 인간으로서 잘 산다는 것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등 아래서 녹음된 음악만 듣고 사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에겐 온기가, 사회가, 여유가, 안락이, 안전이 필요하다. 또 고독도, 창조적인 작업도, 경이감도 필요하다.(···)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46-248쪽.



<나는 왜 쓰는가>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294쪽.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297-299쪽.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정치 대 문학:『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공포나 허기에 시달리거나 치통이나 뱃멀미를 앓을 때,『리어 왕』은『피터 팬』보다 하등 나을 게 없을 수 있다. 지적으로는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야 기억하는 사실일 뿐이다.『리어 왕』의 장점을 ‘느끼게’ 되려면 정상 상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325쪽.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묘하게도 톨스토이 자신의 개인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외면하기 힘든 전반적인 유사성이 있으니,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리어처럼 대가 없이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는 노년에 땅과 작위와 저작권을 버렸으며, 특권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농민으로 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더 깊은 유사성은 톨스토이가 리어처럼 잘못 헤아린 동기에 따라 행동했다가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건 모든 속된 쾌락과 야심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면 자신이 더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고서 속세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 관해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그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의 포기 행위 때문에 그를 괴롭혔다. 362쪽.


 그는 모든 형태의 폭력도 포기했으며, 그로 인한 손해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강제의 원리를, 혹은 적어도 남에게 강제를 행사하고픈 ‘욕구’를 버렸다고 믿기는 쉽지 않다.(···) 평화주의와 무정부주의는, 겉으로는 힘을 완전히 포기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실은 그런 심리적 습성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당신이 일반적인 정치의 추잡함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어떤 신조를 받아들였다고 할 때 그 자체만으로 당신이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남들도 다 자기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괴롭히기 십상이다. 370쪽.



<정말, 정말 좋았지>


 나는 침대를 적시는 게 (a) 나쁜 짓이면서 (b) 내 통제력을 벗어난 일임을 알았다.(···) 때문에 저지르는지도 모르면서, 저지르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피할 수도 없으면서 죄를 저지르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죄는 누가 저지르는 무엇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무엇이었던 것이다. 378쪽.


 두 번째 매질을 내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처벌인듯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한 번 매질을 당한 것,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게 안 아팠다고 자랑을 하다 그보다 훨씬 심하게 또 매질을 당한 것-모두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 하나는 말채찍이 부러진 것을 내 잘못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걸 부러뜨린 건 바로 ‘나’라고 삼보가 말했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죄책감은 20~30년 동안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379-380쪽.


아닌 게 아니라 소년들 스스로도 체벌의 효험을 믿었다.(···) 비첨은 어핑엄 스쿨에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러 갔다가 시험을 망치고 돌아왔고, 이틀쯤 뒤엔 게으름을 피우다 매를 호되게 맞고 말았다. “시험 보러 가기 전에 매를 맞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로서는 한심하다 싶기는 했지만 십분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387쪽.


 나는 삼보와 플립을 증오했다. 어느 정도 부끄러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을 의심하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내게 사립학교 장학금을 타든지 아니면 열네 살에 사환이 되든지 둘 중 하나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것들이 내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두 갈래 갈림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삼보와 플립이 자신들은 내 은인이라고 한 말을 믿었다. 물론 지금은 삼보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좋은 투기감이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학교라는 게 우선적으로 장사라는 걸 어린아이가 깨닫기는 어렵다. 아이는 학교라는 게 교육을 위해 존재하며, 교장이 훈육을 하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남 괴롭히는 걸 좋아해서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년 시절 내내 내가 변변찮은 존재이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고, 재능을 망가뜨리고 있으며, 너무도 어리석고 못되고 배은망덕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아주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393-395쪽.


학교생활 돌아가는 게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데 있었다. 즉,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 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 지기만 했다.

나는 그런 지배적인 기준들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다른 기준이란 없었던 까닭이다. 419쪽.


 하지만 종교란 것에는 심리적으론 불가능한 것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듯했다. 예를 들어 기도서에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인 애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느껴야 ‘하는’ 것은 대개 웬만큼 분명했지만 감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한 일이었지만, 내 경우엔 아버지를 싫어하기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땅한 소양을 갖추거나 응당한 감정을 느끼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옳은 것과 가능한 것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았다. 421쪽.



<작가와 리바이어던>


 하지만 반제국주의자임을 요란스럽게 자랑하던 좌파 정당들은 그런 점들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수탈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득을 봤다는 사실을 이따금 인정하긴 했으나, 수탈을 그만둬도 어떻게든 번영을 계속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해야 했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세계 전체라는 차원에서 보면 자신들도 착취자가 되는 야만스러운 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피착취자라는 말에 넘어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런 문제를 좌파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람들과는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442-443쪽.



<역자후기>


오웰은 “고약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내팽개친 사람이다. 그는 사립 명문 이튼 졸업생으로선 유일하게 대학을 포기하고 식민지 경찰이 되었고, 안정된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고서 부랑자나 접시닦이가 되었다. 2차대전 전에는 런던에서 문단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시골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하며 텃밭을 일구는 생활을 했고, 전쟁 후 명사가 되었을 때는 한적한 섬에서 은거하는 쪽을 택했다.(···)

 오웰은 말한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475-4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