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조지 오웰,『위건부두로 가는 길』
1부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47~48쪽.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49쪽.
중산층인 사람들은 광부들이 제대로 씻을 수 있어도 안 씻을 거라고 말하길 좋아하는데, 난센스다. 그건 목욕탕이 있는 탄광에선 거의 모두가 이를 즐겨 이용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더욱이 탄광 목욕탕은 ‘광부 복지 기금’으로 세워지는 것으로, 광부들 자신이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한다.(···) 그러나 아직도 브라이턴에 있는 하숙집 노부인들은 “그놈의 광부들은 목욕탕을 지어줘도 삭탄 창고로나 쓸 거야”라는 소리를 한다. 53~54쪽.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언젠가 나는 함께 홉을 따다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나는 바로 ‘그들’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전능한 존재인 건 분명했다. 67쪽.
하지만 그 당시에는 누구도 실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실업이 계속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여전히 “실업수당이나 타먹고 사는 게으름뱅이”란 말을 썼으며 “그런 자들은 원하기만 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115쪽.
영국에선 2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먹는 것에서 생긴 결핍을 전기로 채우는 셈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전부 강탈당한 상당수의 노동 계급이 생활의 표피만을 누그러뜨리는 값싼 사치로 부분적인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121쪽.
민족주의가 처음 신앙이 되었을 때, 영국인들은 지도를 보고는 자기네 섬이 북반구에서 아주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북쪽에 살수록 도덕적으로 우월해진다는 기분 좋은 이론을 개발해냈다. 내가 어릴 때 주입받은 역사는 대개 날씨가 추워야 사람이 활동적으로 되고 더울수록 게을러지며 그래서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배한 것이라는 설명을 더없이 순진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인이 더 활동적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는(실제로는 유럽에서 제일 게으른 민족이다) 적어도 100년 동안 통해왔다. 150쪽.
2부
상류층 신사가 마차를 타고 슬럼가를 지나갈 때 동네 꼬마들이 몰려들어 “나리 납시오! 말한테 겁 좀 먹이세!”라고 외치는 모습이다. 지금 상류층 인사의 말을 겁주려는 동네 아이들이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그보다는 혹시나 팁이라도 주기를 바라며 들어붙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 지난 10여 년 동안 영국의 노동 계급은 소름끼칠 정도로 급속히 비굴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업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에 주눅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170~171쪽.
그렇지만 나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실업에 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부끄러울 것 없는’ 빈곤도 늘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평생토록 꾸준히 일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길바닥으로 내쫓기는 착실한 노동자의 끔찍한 운명, 이해할 수 없는 경제 법칙 때문에 그가 겪는 모진 고통, 가족의 해체, 그의 마음을 갉아먹는 수치심-이런 것은 내 경험의 범위 밖에 있는 일이었다. 나는 빈곤이라고 하면 끔찍한 기아의 차원으로만 생각했다. 202쪽.
때는 토요일 밤이었고, 육중한 젊은 부두 노동자 한 사람이 술에 취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가 날 보더니 비틀 비틀 다가와 넓적하고 벌건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릿한 눈빛이 위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몸이 굳었다. 오자마자 싸움을 걸다니! 그 순간 부두 노동자는 내 가슴팍으로 와락 달려들더니 내 목을 얼싸안는 것이었다. “차 한잔하쇼, 친구!” 그는 눈물 머금은 소리로 외쳤다. “차 한잔하쇼!”(···) 그것은 일종의 세례식이었다.(···) 아무도 내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아무도 공격적인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공손하고 친절했으며, 나를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205쪽.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212쪽.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215쪽.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217쪽.
빈곤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압제와 전쟁을 진정으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사회주의 편이다. 293쪽.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흔히 그러듯 사회적 지위가 소득만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경제적으론 분명 부자와 빈자의 두 계급만 존재하되, 사회적으론 각 계급의 다층적인 위계가 있으며, 각 계급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습득한 거동과 전통은 서로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대개 나서부터 죽기까지 지속된다. 301~302쪽.
육체노동자를 그 자체로 이상화하는 사회주의 경향 때문에, 그런 과제는 충분히 명확하게 해결된 바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나 부두 노동자보다 실제로 더 열악한 수많은 사무원과 점원 중에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304쪽.
'해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밑줄] 무라카미 하루키,『1Q84 BOOK1』, 문학동네, 2009. (0) | 2011.08.09 |
---|---|
[밑줄]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0) | 2011.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