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세대

[밑줄] 엄기호,『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2010.

두괴즐 2011. 8. 12. 18:28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출판사 | 2010-10-1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20대는 세상을 어떻게 읽는가?정신노동자이자 활동가 엄기호의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 그림출처: http://rulurulu.tistory.com/1008?srchid=IIMCHr9a100&focusid=A_120B13524D1837C72300F4



[밑줄] 엄기호,『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푸른숲, 2010.



* 들어가는 글: 너흰 괜찮아


 지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너흰 괜찮아.”(···)

 “세상이 너희를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대신 되돌려서 물어보자. 누가 너희더러 한심하다고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논리로 너희를 한심하다고 하는지. 어떤 언어로 너희를 한심하다고 말하는지를 되물어보자.” 11-12


 누가 힘든 일을 하기 싫어하는가?(···) 학생들은 몹시도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등록금을 마련하고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느라 방학이면 방학, 학기 중이면 학기 중에 별별 일들을 다 하고 있다. 노가다를 뛰는 학생들도 있고, 초중고교나 대학교의 졸업식이면 화원에서 꽃을 떼다가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월급 20만 원을 받으면서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열정을 불태우기도 한다. 따라서 오히려 우리가 물어봐야 하는 것은 누가 힘든 일을 하지 않고서도 대학을 다닐 수 있는가이다. 그것은 과외만으로도 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부의 대학생들이거나 혹은 부모를 잘 만난 몇몇 학생들이 아닌가? 오히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요즘 학생들은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말로 누가 누구의 삶을 무례하게도 삭제해버리는가이다. 15


 우리는 우리가 20대들을, 대학생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만 있으면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부모와 선생이 이런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보’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지배와 통제에 대한 욕심이지 이해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이해란 통제와는 달리 내가 그들과 무엇을,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작업이다. 때문에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를 넘어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지식이며, 그들의 감수성과 나의 감수성 사이의 거리와 차이에 대한 성찰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육의 현장에서 교사와 부모들은 자신들의 학생과 자식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토록 궁금해하면서 그들을 대하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감수성과 코드는 읽고 싶어 하면서 자신의 감수성과 코드는 성찰하지 않는다.(···) 좌파든 우파든 20대가 문제라고 하는 이야기, 혹은 우리 사회가 20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며 그들의 처지를 걱정하는 이야기 안에서 20대들을 대하는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무엇을 함께할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성찰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18-19


 386들이 지금의 대학생들을 두고 비겁하다고 하는 비난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용감’하고 ‘순수’하게 학생운동에 용왕매진할 수 있었던 조건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80년대까지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엘리트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대학생이 됨과 동시에 대단히 많은 사회적/문화적 자본이 주어졌다. 24


 아무도, 다른 이의 삶을 모독할 권리 따위는 없다. 각자의 삶이란 각자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27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


  김예슬 선언을 보면서 다른 대학생들에게 너희는 왜 움직이지 않느냐고 질타하는 사람들은 다른, 보통의, 많은 대학생들이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맨 꼭대기만 살아남는 구조에서 한 번도 제대로 셈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지금까지 자기들도 셈에 넣어달라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는데 말이다.(···) 이들은 ‘착취당할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55


 애초부터 시장은 학생들의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스펙은 이 잉여인간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하였다. 60-61


 무엇보다 이들이 대학에 와서 발견한 점은 대학이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생각했던 공부는 스펙 쌓기로 돌변해 있었고, 그들이 꿈꾸었던 ‘공부’는 캠퍼스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곳이 바로 대학이다. 62


 대학도 대안이 아니지만 대학의 밖에도 대안은 없다. 64



2부 뒷문으로 성장하다


 기성세대는 20대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다. 사유하는 방식도, 혹은 ‘혁명 그 너머’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도, 맹목적이게도 자신들의 ‘뜨거웠던 추억’만을 알려주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인 듯 이야기할 뿐이었다. 87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실천의 언어였어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정치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자 혼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90


 무성은 냉소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사실은 더 차갑고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바로 그래서 다른 전략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무성이 이야기하는 행동의 방식이다.(···) 냉소에 힘에 의지하여 냉소적이기 ‘ 때문에’,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91


냉소에 맞서는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이다. 우리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나아가 이들이 살아가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들은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한다. 93


 20대들은 민주주의가 우리를 구원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체가 오락이 될 때 움직인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본질 자체가 불화이고 혼돈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하고 견뎌야 한다고만 했지, 그것이 오락이 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서 우리가 하면 민주주의이고 저들이 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을 했을 뿐이다. 94


 한국의 진보 세력은 민주주의가 정치적 언어에서 한쪽에서는 냉소주의로 다른 한쪽에서는 속물들의 윤리적 언어로 전환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우리가 일조한 정치의 도덕화가 문제이다. 97


우리는 학교가 교육의 공간이며 성장의 발판이라고 생각하면서 교실이 우정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정글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교실에서의 권력관계는 무시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모두 학생들의 개인적 문제나 인성 문제라는 식으로 돌려버리곤 한다.(···) 학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글이었다. 힘이 세거나 돈이 많거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지배하고, 힘이 약하고 가난하고 공부를 못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지배당하는 정글 말이다. 113


교육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초월한 척하지만 권력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폭력적인 교육과 비폭력적인 교육을 구분할 게 아니라 불가피하고 감수할 수 있는 폭력과 그렇지 않은 폭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120-121


 가족을 하숙집이 아니라 가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감정노동을 모성이나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기를 쓰고 노동이 아닌 인간의 다른 활동인 것철머 포장해왔다.(···) 그러나 가족이 되게 하는 실체는 바로 이 감정노동이다.(···) 감정노동이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의 화와 억지를 참아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혼자 있을 땐 상대방을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134

 

소통은 감정노동이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가진 가족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엄마가 가족들에게 전문 매니저로 인정받고, 그런 매니지먼트를 할 수 있는 다른 경제적 자원들이 뒷받침이 될 때나 가능한 일이란 뜻이다. 137


 우리가 다른 어떤 영역보다 이들의 사랑에 특히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때가 청춘이며 그 에너지는 이기적인 계산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면서도 숭고한 것이다. 바로 자본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연애와 사랑이야말로 인간 성장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이다. 148


 이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서사적 사랑’이란 불가능하다. 세상은 서사에 목을 매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저 사랑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사랑은 과감하게 버리라고 조언한다. 사랑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산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실컷 즐기다가 낡으면 버리는 청바지와 같은 것이라고 속삭인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153


 “사랑은 88만 원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의 등가교환을 선호한다. 사랑에도 주판알을 튕길 만큼 계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다.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랑이 손해를 감수하고 일방적으로 퍼줌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면, 지금은 등가교환을 통하여 서로의 곤궁함을 배려한다. 160


 자신을 남과 다르게 드러내기 위해서 소비한다고 하지만 사실 명품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과 내가 같은 경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174


몸이야말로 최고의 구경거리이다. 몸은 옷 안에 감추어진 ‘자연’이나 스타일을 통해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을 통해 드러나야만 하는 ‘문화’이다. 우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176


 원래 몸은 노동의 도구였다. 과거에 국가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신체를 국가의 감시 밑에 두었다.(···) 그러나 더 이상 국가가 노동력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도래하면서 이 노동윤리는 상품미학으로 대체되었다.(···) 건강하고 노동을 잘할 만한 몸이 아니라 보기 좋고 자기관리를 잘한 듯 보이는 몸으로 포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노동윤리의 대상에서 자기관리라는 새로운 윤리의 지표가 되었다.(···) 남자고 여자고 뚱뚱한 몸매를 하고 면접을 보러 가면 당장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다른 사람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시는 분인가 봐요.”, “자기관리를 전혀 안 하시는군요.” 177


 덕성여대에서 ‘꿀벅지’라는 말에 대해 여성으로서 모멸감을 느끼는가를 두고 토론하는 동안 한 학생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누군가가 자기를 ‘꿀벅지’라고 불러주면 섹시하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을 하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상품화에 대한 감수성이 없느냐며 이 학생은 분노를 터트렸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품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사회적으로 존재할 만한 가치와 의미를 획득했으며 인정투쟁에 승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84-185


 한편에서는 돈을 죄악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엄청난 비난과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돈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다. 돈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부모님이 아플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자식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데 돈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돈을 무시하는 것은 도덕에 대한 무시이며, 곧 삶 그 자체에 대한 무시이기도 하다. 188


 사실 돈이 작동할 수 있는 가장 큰 기반은 ‘무지’이다. 우리가 돈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실제 세계를 안다면 돈을 쓰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돈의 작동 자체가 중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상품들 또한 누군가의 피와 땀,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상품을 사서 소비할 수 없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몇 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나이키의 어린이 노동 착취이다. 파키스탄에 하청을 준 나이키는 어린이 노동 착취를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였다. 축구 경기장에서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둥근 공을 수제품으로 섬세하게 만드는 데 어린이들의 조막만 한 손만큼 최적화된 도구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몇 만 원을 받고 팔지만 노동의 대가는 달랑 몇 백 원이었다.(···) 우리가 사 먹는 대부분의 약품은 제3세계에서 약을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거쳐 만들어 진다. 우리가 먹는 닭고기는 유전자 조작으로 가슴살만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지도록 고안되어 걷지도 못할 뿐 아니라 평생 햇볕 한 번 못 보고 자란 닭들이다.(···) 소비는 ‘무지’를 먹고 살며, 돈은 무지를 통해 작동한다. 알면 먹을 수 없고, 입을 수도 즐길 수도 없게 된다. 192-193


 혜교 또한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돈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이다. 195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1


 우리는 열정을 바치면 그만큼 값진 것이 돌아오리라고, 혹은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열정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가가 돌아올 만한 것에만 열정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가 있는 것들’이란 ‘남들이 말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단계 중 하나이거나 부모님 실망시키지 않을 만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이다. 그렇지 않은 열정은 삽질이 된다. 219-220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너무나 쉽게 삽질로 만들어버리면서 우리는 오히려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고 너무나 많은 것을 버린다.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할 시간, 이유 없이 무언가에 미친 듯이 열광해볼 기획 따위를 우리는 잃어버리게 된다. 어찌보면 삽질이야말로 훨씬 더 숭고한 유희에 가까운 열정이 아닌가? 220


재미가 있어야 참여를 하고 재미가 있어야 동료로 맞이한다. 따라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치에 대한 참여도 시민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게이머로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은 이들이 재미만을 얄팍하게 추구하기 때문에 깊이와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재미에는 전혀 다른 윤리적 차원이 있다.(···) 이들은 ‘오락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참여’하고 단독자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라 ‘공동 작업’을 수행한다.(···) 그것은 놀이를 노동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놀이처럼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게임조차 정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조차 게임처럼 한다. 더구나 이 열정과 재미는 자기만족을 넘어선다. 해커들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들이 남을 기쁘고 즐겁게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재미는 남을 희생하는 재미가 아니라 남을 기쁘게 하는 재미이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낀다. 222


잉여들의 삽질보다 더 비참한 운명에 처한 것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열정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빵’했던 친구들은 자신의 열정이 삽질로 돌변하는 경험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224



* 조금 긴 결론: 다시 교실에서


 우리는 매끈한 목소리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 감수성이 매우 큰 문제이다. 이러한 감수성으로는 늘 우리의 대변자, 혹은 그들의 대표자만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말할 권리’는 있지만 ‘들릴 권리’가 없는 셈이다.(···) ‘헛돌고 겉도는 언어’가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방식이 바로 이러한 감수성에서 기인한다. 239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가 오래 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좌파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에서 입장의 동일함을 찾으려다 결국 돌아서고 찢어지는 것 말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출발점이 아니다.(···) ‘우리’란 끊임없이 생산되고 해체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질문을 공유하는 것은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의 공유는 더 많은 다른 답들을 생산한다. 질문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 다른 답들을 환영한다. 그것이 나에게 더 많은 영감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해답의 공유가 같아져야 한다는 폭력이라면 질문의 공유는 차이에 대한 생산이며 다른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환대이다. 242


학생들은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를 어디에서 배웠는가. 바로 교과서와 학교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해야 할 때 무엇에 의지해서 말을 풀어내는가. 역시 교과서와 학교이다.

 학생들의 리포트와 토론에서 나는 공식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게 되는 언어와 담론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대단히 정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아이들의 삶을 겉돈다. 그러나 그 겉도는 지식이 아이들의 세계관을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학교가 이러한 ‘진리의 공간’이라는 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간과하는 중요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학교와 교과서는 여전히 ‘심각하게’ 중요하다. 이것이 몸과 언어를 만든다. 255-256


 인간의 공감 능력은 우리 사회의 서열 체제 앞에서 멈춘다.(···) 여기에서 도덕이 반(反)윤리로 타락한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된 자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잔인해 질 수 있다. 260


 대학에서 화두를 갖게 되고 그 화두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선생을 만나야 하고, 좋은 책을 만나야 하며, 또한 좋은 동료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학생들이 좋은 책과 선생, 그리고 동료를 만나게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만남을 ‘죄악시’한다. 좋은 책보다는 자기계발서나 토플 책을 펼쳐야 하고, 좋은 강의보다는 만만한 강의를 들어야 한다. 동료들과 협업을 통해서 집단지성을 발휘하기보다는 노트조차 빌려주어서는 안 되는 살벌한 공간이 지금의 대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 우리는 교실을 그 어느 때보다 제대로 진리가 상연되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죽은 대학에 저항하는 친구들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교실은 여전히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밑줄] 엄기호,『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hwp


[밑줄] 엄기호,『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hwp
0.04MB

'88만원세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밑줄]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0) 2011.06.21